▲ 전등불...어둠 밝히고... ⓒ 이명화
나는 가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출근길 늦을세라 발걸음 총총 옮기는 직장인들과 통근차를 기다리며 사거리 한쪽 구석에 서있는 사람들. 아침 일찍 일터로 나선 그들은 하루 온종일 상사나 사장, 동료들 속에 시달리며 허리 굽히고 때론 굴욕도 참아 얻은 대가로 가족들의 밥상을 또 마련할 것이다. 그것은 농도 짙은 소금 땀, 피 같은 땀의 대가요 그가 맞바꾼 시간의 대가이다. 하루의 생을 지불한 대가다. 가족의 안위와 소박한 밥상, 그 한 끼의 식사로 따뜻한 불빛 아래 모일 저녁을 희망하는 발걸음이다. 지난밤의 피로를 채 털어내기도 전에 몸을 이끌고 통근차에 오르는 그들의 뒷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잉어떼가 한꺼번에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면서 내는 퍼덕 퍼드덕 서로 몸을 부딪치는 소리와 물고기들의 일사불란한 몸짓은 필사적이었다. 머리와 머리, 몸과 몸이 부딪쳤다.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그것들의 민첩함, 거기에서 빚어지는 광경...물이 튀었다. 미처 그 난투극에 섞이지 못한 잉어는 그것들 뒤에서 허공을 향해 입을 벙긋벙긋했고 한숨처럼 입을 닫으며 물속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마치 바닷가에서 뱃전을 맴도는 갈매기들과 같았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향해 물기 젖은 날개를 퍼덕이며 머리가 깨질 듯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던 광경... 먹이에 온 힘을 쏟을 때의 그 민첩함, 몸을 아끼지 않고 돌진해 서로 엉켜들어 한데 뒤섞이는 잉어떼와 겹쳐졌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갈매기의 꿈)는 그 글을 읽던 시절만 해도 꿈은 이상적이고 현실은 누추해보였다. 꿈과 현실의 괴리에 시름 깊었다. 이제는 안다. 꿈도 꿈이지만 현실에 붙박아 살면서 밥을 벌기 위해 치열하게 몸 부대끼는 그 행위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임을...밥은 생명이고 밥으로 우리 삶은 연단되는 것임을.
'지상에는/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알전등이 켜질 무렵을/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내 신발은/ 십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슬픈 것이/ 존재한다/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박목월의 시 '가정')
박목월의 시' 가정'이다. 이 시를 읽다보면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유년의 뜰이 펼쳐진다. 그때 아버지 직업은 목수였다. 귓등에 연필 꽂은 아버지는 내 눈엔 예술가였다. 톱으로 켜고 대패로 다듬은 나무에 먹줄과 T자로 선을 그으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아버지, 퉁탕퉁탕 망치질, 슥삭슥삭 대피질 소리, 톱으로 나무 켜는 소리...
퉁탕거리며 망치질 할 때마다 뾰족 솟은 못이 나무의 살점을 파고들고, 슥삭슥삭 대패질 할 때면 고슬고슬 얇은 나무껍질이 새긴 나이테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도르르 말려 떨어질 때 나던 그 향기롭던 나무냄새. 그것이 신기해 손에 올려놓고 코에 대고 향기 맡곤 했다. 톱으로 나무를 켤 때마다 벌어지는 틈사이로 떨어지던 나무가루들... 모든 게 다 신기해서 아버지 뒤에 붙어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노동으로 단련된 울끈불끈 근육질의 팔뚝에 송글송글 돋아난 땀방울...
고샅 고샅마다 뛰놀다 놀이도 지쳐갈 쯤 엄마는 우리를 불러들였고, 흙투성이로 돌아온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엄마는 부엌에서 불을 때고 밥을 지었다. 쉭쉭~밥 끓는 소리와 부엌 가득 뿌옇게 수증기가 피워 올랐다. 씻어라, 밥상 펴라, 경화야, 명화야, 명래야... 아무개야... 심부름 하나 시키기 위해 일곱 명의 아이들 이름을 낱낱이 불러야 지목했던 이름에 겨우 멈추던 엄마, 전쟁 같은 하루가 끝나고 저녁 밥상 앞에 모이면 그때서야 큰 숨 한 번 내쉬었다. 아버지의 기도가 끝나면 일제히 '아멘!' 하고 나서 밥숟가락 들고 밥상 위에서도 전쟁처럼 밥 먹기를 치르던 시간... 평화는 모두가 잠든 시간에야 겨우 찾아왔다.
나는 박목월의 '가정'이라는 시를 읽을 때마다 내 어린 시절... 소중했던 추억들이 너도나도 먼저 튀어나가겠다고 퉁탕거린다. 불쑥불쑥 두서없이 떠오르는 기억들을 다스리기도 힘들다. 한 번 풀린 실타래를 풀고 또 풀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한 알의 볍씨로부터 그것이 밥이 되어 우리 앞에 놓일 때까지는 여든 여덟 번의 손질이 가야 한다'고 옛사람들은 말했다. 한 가정의 따뜻한 한 끼의 식사가 마련되기까지는 아버지의 노동과 어머니의 정성어린 손길... 밥 한 톨을 얻기 위해 봄, 여름, 가을... 뙤약볕에서 땀 흘리며 수고한 농부의 땀과 기도가 깃들어 있고, 토양과 햇빛, 물과 바람이 있다. 그 위에 이 모든 것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스며있다.
오늘도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이들 모습에서 힘들다 고단하다 않으시고 얼음으로 짜 올린 것 같은 세상에서 가정을 지켜 어린 자식들을 붙안고 오신 부모님 생각 절로 떠오른다. 해 지고 밤 찾아오면 사람 사는 지붕아랜 불이 켜진다. 나는 바깥세상에서 묻은 짙은 피로를 털며 돌아올 남편과 함께 저녁 불빛 아래 앉으리라. 마음모아 밥상을 마주하기 위해 달그락 달그락 저녁을 짓는다. 이 저녁 사람 사는 지붕마다 불이 켜지고 온 가족이 만든 밥상 앞에 서로 마음 낮추어 두 손을 모으리라. 내 앞에 놓인 저녁밥상이 문득 눈물겹다. 밥은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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