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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30회)

죽음을 부른 사랑의 시 <1>

등록|2010.04.16 10:25 수정|2010.04.16 10:25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문(權門)에서 책사(策士) 노릇을 하던 민우기(閔雨起) 대감은 쉰이 넘어가자 출사하는 것보다 사냥을 즐기며 기담이설을 쫓는 날이 많아졌다.

비 내리던 삼월 삼짇날 집을 찾아온 복술가(卜術家) 여인이 집안에 우환들 걸 알리며 경고했었다. 직접 대감을 만나 전한 게 아니라 부인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집안이 우환들 것이니 경거망동을 삼가야 합니다. 바깥어른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사냥으로 소일한다는 소문이 인근 삼십 리 안팎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사냥을 중지하고 공덕을 쌓아 다가오는 불행을 막아야 합니다."

혼겁할 내용이라 부인으로선 당연히 피할 방도를 물었다. 필경은 무속(巫俗)에 관한 일에 종사할 것으로 생각된 여인은 천문전(天門錢)을 던져 떨어진 모양새를 보고 탄식을 터뜨렸다.

"아무리 말해도 아니 들을 것 같으니, 마님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사냥을 중지하라 하십시오. 이 댁의 운은 아무리 좋아야 길흉이 반반입니다."

길흉이 반반이란 얘긴 항용할 수 있는 말이어서 부인은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하루건너 남편과 잠자릴 하게 됐을 때, 집안의 우환에 대해 슬그머니 운을 뗐으나 당치않은 일이라고 남편은 허드레 기침을 못마땅히 뽑아냈다.

"자꾸 그런 얘길 하시면 이곳에 못 들어옵니다. 내 나이 쉰 하나, 사냥을 해야 고작 한두 햅니다. 그 동안 권문에 의지한 덕으로 큰 아들 지후(閔智厚)는 글 잘하는 학사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고, 둘째는 나이 열다섯으로 다니는 서당에서 준재(俊才)란 말이 날 정도니 이만 하면 자식 농사는 잘 지은 것 아니오. 지금 이 나이에 방안 퉁소 마냥 집안에 틀어박혀 하인 놈과 투닥거리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예전처럼 권문에 빌붙어 세도의 곁가지를 잡고 위태롭게 춤이라도 춰 볼까요?"

민우기 대감이 큰 소리 떵떵치며 못마땅한 듯 부인을 노려보던 게 벌써 6개월 전이었다. 아들은 대과에 삼등으로 입격해 집안의 명예를 살렸는데 삼현육각 울리며 어사화 꽂은 채 집으로 돌아오다 말이 날뛴 바람에 말발굽에 채어 목숨을 잃었다. 머리 좋고 인물 좋은 자식이 비명횡사하자 민우기 대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냥 했어도 내가 했구, 짐승을 쏴 죽였어도 내가 한 일이야!  죄 없는 큰 아일 왜 데려 가느냐 말이야!"

아무리 큰소리를 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민대감이었다. 며칠 후 예전의 여인이 찾아와 첨자첩(籤子帖)을 펼치고 부인에게 글자 한 자를 고르게 했다. 그것은 이 집에 흉한 기운이 사라졌는지를 알아볼 요량이었다. 부인은 여러 글자 가운데 '범(范)'자를 가리켰다.

"부인께선 어찌 이 글자를 가리켰습니까?"
"글쎄, 마음이 자꾸만 그쪽으로 가네. 왠지 그 글자가 내게 해당되는 것 같네."

여인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좋은가?"

"마님, 범(范)은 죽을 사(死)의 반쪽(匕)과 활(活)의 반쪽(氵) 그리고 반(半)과 십(十)을 합한 글잡니다. 반쯤 죽은 것이나 산 것이나 이래저래 똑같은 운수니 부디 선을 행하십시오. 덕을 쌓아야 집안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처음부터 정적을 내치기 위해 지략을 쌓던 인물이고 보니 자신이 사는 길만 찾을 줄 알았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은 생각 밖이었다.

사냥하는 게 운수에 장해된다 하자 요즘엔 구성지게 얘길 잘하는 사내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한담을 듣는 게 일과였다.

마음에 들면 몇 푼의 수고비를 건네며 소일거리 삼아 지내길 벌써 두 달이 가까웠다. 처음엔 우리나라 역사를 비롯해 괴담이나 기속(奇俗) 같은 걸 즐겨 들었는데, 차츰 남녀 간의 비사(秘事)로 옮겨갔다.

그렇다보니 민대감의 사랑채엔 은근짭잘한 얘길 구성지게 풀어헤치는 위인들이 즐비하게 찾아들었고 그들은 혀끝을 놀려 민대감의 궁금증을 채워줄 기회를 기다렸다.

일곱인가 여덟인가 되는 얘기꾼들이 한 사람으로 줄어든 것은 민대감이 새로 찾아온 사내의 얘기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었다. 김씨 성을 쓴다 했으나 얘기를 할 때 사용하는 그의 아호는 화자허(花子虛)였다. 꽃씨가 없다는 뜻이다.

"대감마님, 오늘은 중원의 기이한 풍속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중원엔 호색문학의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만, 그 책엔 은유적인 표현이 짙다는 데 시선을 모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모(母)를 비롯해 문(門)이나 빈(牝), 묘(妙)나 마(魔) 등은 한결같이 여인의 음패(陰貝)를 위주로 만들어낸 상형어라 할 수 있습니다."

민대감이 두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그런 얘기보다 다른 얘길 듣고 싶다는 투였다.
"오늘은 아호(雅號)에 대해 얘길 해보게. 아호라는 게 그 사람의 품격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얘기는 순식간에 아호 쪽으로 바뀌었다. 음란서생 화자허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대감마님, 아호를 얘기하자면 먼저 중원의 호색문학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호색문학? 그거 좋지."

"호색문학엔 그 나름의 성적(性的)인 아호가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궁 안이나 선비, 장사꾼 등등으로 나뉘는 데 대개 전하는 책들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금병매(金甁梅)는 금련을 비롯해 이병아와 춘매에서 이름자를 따왔고, 충화자(冲和子)는 돌진하여 화합을 이룬다는 사내의 양물에 대한 은유이며, 눈이 하나 뿐인 척안녀는 눈이 하나 밖에 없으므로 성적으로 대단한 기교가 있을 것으로 추단합니다. 이땐 반드시 발이 작아야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방술에 능한 여인은 모름지기 발이 작아야 제격이라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민우기 대감으로선 뭐가 좋고 그른지를 분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동안 자네를 쭉 봐 왔는데 성의가 그만해 내 집 출입을 허락했네. 마음에 있는 얘기 보따리가 비워지면 그때 말하시게. 그리하면 내가 달리 생각한 게 있네."

달리 생각한다는 건 길게 볼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일이야 그때 가서 생각할 것이고 당장은 입안에 거미줄 칠 게 없다는 점에서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물러나왔다. 마루를 내려와 섬돌에 서서 심호흡을 몰아쉰 후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사랑채로 들어오기 전 중문으로 빠지는 문 어림에서 이집 큰 며느리가 자신을 만나고 가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홀로 된 여인이 외간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화자허는 중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걸음걸이가 건들거렸다. 힘깨나 쓰는 장정처럼 어깨를 떠억 벌리고 유세 떠는 게 아니라 다리가 가는 대로 상체와 머리가 따라가듯 흔들흔들 걸었다.

중문을 벗어나 오동나무가 있는 오른쪽 길로 접어들자 저만큼 별당의 불빛이 보였다. 화자허는 문 앞에 이르러 크흠 큼! 기침을 쏟으며 방안 동정을 살폈다.

의당 문이 살며시 열리며 들어오라는 신호가 떨어져야 하는 데 감감 무소식이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그의 뇌리 한쪽엔 별당에 있는 큰 며느리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문밖에 있는 분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기침을 해도 내색이 없을 때는 신발을 들고 조용히 들어오시면 됩니다. 방 문은 열려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했기에 화자허는 신발을 왼손에 들고 오른 손으로 지도리를 잡아당기자 기다린 것처럼 문은 열렸다. 방안에 들어서자 머릿골을 때리는 섬뜩한 예감에 불빛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요조숙녀의 방안처럼 침구며 집기와 수예품들이 가지런히 한쪽에 놓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람. 방안에 불을 켜 놓고 어딜 간 게야?'

화자허는 앉아 있을 수 없어 건너방 문을 열었다. 이불이 깔린 방안에 벌거벗은 몸으로 젊은 여인이 한쪽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가자 중문 깨를 지나던 이집 둘째 아들이 화자허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음란서생이 어찌 별당에서 뛰어나옵니까? 형수님이 찾으셨습니까?"
"주주주주···, 죽었어요. 별당에 계신 이 댁 큰 며느리님이 죽었다니까요. 발가벗고 죽어 있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게 무슨 말이오. 자네가 별당에 갈 일이 없는데 무슨 일로 거길 갔소? 우리 형수님이 자네에게 얘길 해달랬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대감님이 찾으시어 사랑채로 들어가려는 데 별당에 계신 분이 일이 끝나면 좀 뵙고 가라는 전갈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별당에 들어갔는데···, 아씨께서 발가벗은 채 죽어있지 뭡니까."

집안사람이 쏟아져 나오자 둘째 도령의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글쎄 이놈이 형수님 방에서 허겁지겁 뛰어나오지 않습니까. 이 자가 보니 형수님이 죽어 있더랍니다. 이놈이 형수님을 죽였을 지 모르니 관아에 연락하겠습니다."

민우기 대감이 상황을 추슬렀다.

"잠깐! 부인이 며느리 방에 들어가 보시오. 어찌 됐든 물건 하나 건들어선 안 됩니다. 잘못 하면 당신이 복잡한 일에 연루될 수 있어요."

부인이 들어갔다 나온 후 민대감은 급히 한통의 서찰을 휘갈겨 관아로 보냈다. 여인의 변사가 나타나면 치정이든 뭐든 간에 송화의 손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검시기록지를 들고 문밖에 선 채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간헐적으로 정약용이 물었다.

"검시기록을 작성할 것이다. 초검의 결안식에 따라 검안(檢案)한다. 알았느냐?"
"예에, 나으리."

"주검은 어떤 모습인고?"
"발가벗은 채 죽어 있습니다. 심하게 거부한 흔적이 보입니다만 사인은 무어라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서둘러라!"

언제나 그렇듯 정약용의 말은 짤막했다. 서두르라는 건 정해진 법식에 따라 검안하는 걸 의미한다. 주검이 발견되면 외상이 무엇인지부터 살핀다. 칼과 같은 날붙이(刃物)에 의한 것인지 몽둥이 등 타물에 의한 것인지 사인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걸 조사하는 게 순서였다.

영초를 사용해 몸을 닦아내고 입안에 법물을 찌르자 새까맸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도 까맸다. 방안엔 촛농이 타는 냄새가 메케했다. 정약용이 음란서생 화자허에게 물었다.

"자네가 방에 들어갔을 때, 이쪽 방은 불이 켜졌던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내 기억엔 이 방의 불빛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시생이 방문을 열고 목을 길게 뽑았던 것 같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왔을 땐 이쪽 방 불은 꺼진 채였고 사람 그림자가 없었단 얘기로세?"
"그렇습니다."

"방에 있는 송화에게 묻는다! 주검에서 이상한 징후를 느끼지 못하겠느냐?"
"몸에 상흔이 없으니 영초를 뿌린들 무엇이 나타나겠습니까.  자액이나 식기상(食氣顙) 흔적도 뵈질 않습니다. 독물에 의한 중독이라 생각해 입안에 법물을 넣자 새까만 것으로 보아 독물에 의한 중독임이 확실합니다."

"주검에 옷을 입히고 관아로 옮겨라. 이 주검은 해부할 필요가 있다."

[주]
∎천문전(天門錢) ; 점을 치는 엽전
∎첨자첩(籤子帖) ; 점을 칠 때 뽑는 숫자나 글자가 적힌 종이
∎식기상(食氣顙) ; 목젖 등을 베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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