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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없응께 더 좋아"

전남 장성 신촌마을 '무인 양심가게' 5년... 마을의 소통공간 자리매김

등록|2010.04.16 14:43 수정|2010.04.16 14:43

▲ 장성 신촌마을 양심가게 앞. 가게 안은 물론 가게 밖까지 마을사람들의 사랑방이 됐다. ⓒ 이돈삼


"여그(여기)가 우리 놀이터여. 여그 와서 이런저런 야그(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그라제. 주인이 없응께 더 좋아. 눈치 안 봐도 되잖어. 우리도 커피 한 잔 할라고 왔는디. 손님도 같이 한잔 해. 이리 오겨(오게)."

정한도(78) 할아버지의 얘기다.

"소통의 공간이죠. 먼저 온 사람이 커피 한 잔씩 빼주고, 술병 잡은 사람이 술도 한 잔씩 사고…. 그러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상의하고, 농사 정보도 교환해요. 요즘엔 천안함 침몰사고와 지방선거 얘기도 많이 하죠. 도시사람들이 보기엔 하찮은 공간이겠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에겐 정말 소중한 곳이에요."

박충렬(51) 이장의 말이다.

이처럼 마을사람들이 '놀이터'이자 '소통의 공간'이라고 얘기하는 곳은 다름 아닌 동네 구멍가게다. 그것도 주인 없이 5년을 운영하고 6년째 접어든 '양심가게'. 천년고찰 백양사로 널리 알려진 전라남도 장성군의 북하면 단전리 신촌마을에 있다.

▲ 5년 전 무인 양심가게를 처음 제안했던 박충렬 신촌마을 이장. 지금까지 7년째 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 이돈삼


▲ 양심가게에 전시된 생필품들. 물건마다 가격이 따로 씌어 있다. ⓒ 이돈삼


신촌마을에 양심가게가 문을 연 것은 지난 2005년 4월 5일. 마을에 하나 밖에 없던 구멍가게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주인이 서울로 떠난 직후다.

"가게가 없으니 마을 주민들의 불편이 컸죠. 가까운 곳에 슈퍼도 없고. 어르신들의 부탁을 받아 도시에서 물건을 사다드렸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솔직히 번거로웠습니다. 라면 두 봉지만 사다 달라, 소주 한 병만 사다 달라…. 그래서 무인 가게를 생각했었죠."

박충렬 이장의 말이다.

이렇게 시작한 가게가 입소문을 타고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특히 학생들의 현장체험 학습공간으로 이만한 데가 없다며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많이 찾았다.

"광주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도 오고 강원도, 제주도에서도 왔제. 와서 가게를 보고는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냐' 하면서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었어. 그런 사람들 보고 우리도 뿌듯했제."

김동남(75) 할아버지의 얘기다.

▲ 주인이 없는 양심가게는 어린이들의 현장체험 학습장으로도 인기다. 요즘도 어린이를 동반한 부모들이 가끔 찾아온다. ⓒ 이돈삼


주인 없는 양심가게는 지금도 여전히 마을사람들의 자랑이고 자부심이다. 이는 마을사람들의 행동에서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농사일 할 때를 빼곤 양심가게 앞에 모여 소일한다. 가게가 마을회관이고 경로당인 셈이다.

두런두런 얘기 나누다가 외지인이 보이면 '내 식구처럼' 언제나 반갑게 대해준다. "이런 시골에 뭔 볼 것이 있다고 왔냐?"고 하면서도 "설사 좋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살짝 눈 감고, 좋은 것만 보고 가라"고 당부한다.

▲ 양심가게의 상징인 나무금고와 외상장부. 물건값은 양심껏 넣고 돈이 없을 땐 외상장부에 적어둔다. 나중에 돈을 갚으면 선을 그어 표시한다. ⓒ 이돈삼


▲ 박충렬 이장이 외상장부를 살펴보고 있다. 이 장부를 보면 누가 술을 좋아하는지, 누가 과자를 좋아하는지 대충 알 수 있다. ⓒ 이돈삼


가게 안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다. 전시된 생필품마다 가격이 적혀 있다. 물건을 살 사람이 알아서 계산하고 가라고 이장이 써서 붙여 놓았다. 돈을 넣을 수 있는 나무금고와 외상장부도 놓여있다. 누구든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갈 때 적어놓는 공간이다. 한글을 쓸 줄 모르는 어르신은 그냥 혼자서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갚아도 된다.

외상장부에는 마을사람들의 생활상이 환히 드러난다. 누가 외상을 자주 하고, 누가 소주를 즐겨 마시는지도…. 손때 묻은 장부에는 맞춤법에 맞지 않는 글이지만 외상을 달고 갚은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다 팔린 물건을 채워놓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박충렬 이장의 몫이다.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 아닐지라도 마을사람들이 미리 주문하면 아무 때나 사다주는 것도 그의 일이 된 지 오래다.

몇 년 사이 변한 것도 있다. 동전을 담아뒀던 비누곽이 없어지고 동전교환기가 자리하고 있다. 장성농협에서 선물한 것이다. 술잔과 젓가락 등을 씻을 수 있는 싱크대는 면사무소에서 설치해 주었다. 담배자판기는 KT&G에서 세워놓았다.

▲ 신촌마을 양심가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마을사람 모두가 주인이기도 하다. 정한도 어르신이 양심가게의 탁자를 손수 닦고 있다. ⓒ 이돈삼


▲ 신촌마을 양심가게는 마을사람들의 사랑방이 됐다. 김동남·정한도 두 할아버지가 가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 이돈삼


신촌마을의 양심가게가 문을 연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양심껏 가져다 쓰고 계산도 그렇게 하며 살고 있다. 한때 철부지 학생들의 호기심 탓에 불미스런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일도 없다.

"첨엔 어쩌께 혀야 헐지 모르겄더라고. 나는 지대로 계산 허고 돈을 넣었는디, 행여 넘이 오해할까봐 걱정되드랑께. 근디 지금은 신경 안써. 다 믿고 산께."

최만례(78) 할머니의 얘기다.

"양심가게가 생긴 뒤로 동네사람들 인심이 더 좋아졌어. 동네 돌아다님서 봐바. 대문 잠그고 산 데가 있능가? 없어."

김유순(74) 할머니의 얘기다.

▲ 신촌마을 양심가게 앞 풍경. 일손이 부족한 농사철을 빼곤 마을사람들이 가게 앞에 모여 소일을 한다. 마을사람들의 소통 공간이다. ⓒ 이돈삼


"돈이 없어도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게 흠이라면 흠입니다. 보통 가게는 아침부터 외상을 주지 않잖아요. 외상을 하겠다고 말하기도 꺼림칙하고요. 그런데 여기선 눈치 볼 주인이 없으니 아침이든 낮이든 언제라도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틈만 나면 가게 가서 술을 마신다고, 가게에서 술을 안 팔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대요. 고민입니다. 그렇다고 안 팔 수도 없고….(웃음)"

박충렬 이장의 말이다.

그는 또 "서로 믿고 사는 신용사회의 본보기라며 대부업체의 광고 출연 요구가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다"면서 "거액의 출연료를 주겠다고 하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이 그런 광고에 나가는 게 적절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매번 거절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노인들이 농사지으며 사는 모습은 여느 농촌마을과 다를 바 없는 신촌마을이다. 하지만 주인 없이 운영되는 양심가게가 마을사람들 마음 속에 자부심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함께 사는 공동체가 되살아나고 있다. 주민들 사이도 전보다 훨씬 더 돈독해지고 있다.

▲ 장성 신촌마을 풍경. 양심가게가 문을 연 이후 마을분위기까지 좋아졌다. 서로 믿고 살면서 대문을 잠그는 집안도 없을 정도가 됐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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