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었다기보다 우리 스스로 버린 우리 말빛
[우리 말에 마음쓰기 900] 외마디 한자말 털기 (94) 藍-
'우리 말에 마음쓰기'라는 이름으로 띄우는 우리 말 이야기가 어느덧 900째입니다. 900째 글을 맞이하면서 우리 스스로 잃었다기보다 우리 스스로 버린 우리 말빛 이야기를 적바림해 봅니다. 다른 전문가나 운동가가 살려 주는 말글보다 우리 스스로 살려서 쓸 우리 고운 말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노상 놓칠 뿐 아니라 늘 고개를 돌리고 있는 말빛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글쓴이 붙임말)
- 외마디 한자말 藍- : 남색
.. 바다의 음흉함을 생각해 보라. 가장 무서운 생물은 물속 깊이 들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남빛 아래 숨어 있다. 또한 수많은 종류의 상어가 제각기 아름답게 꾸며진 자태를 갖고 있듯이, 바다에서 가장 무자비한 종족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악마 같은 광채와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라 .. <허먼 멜빌/김석희 옮김-모비딕>(작가정신,2010) 398쪽
"바다의 음흉(陰凶)함을"은 "엉큼한 바다를"이나 "엉큼하며 모진 바다를"이나 "바다가 얼마나 엉큼한지를"이나 "바다가 얼마나 엉큼하고 모진가를"로 다듬고, "수많은 종류(種類)의 상어"는 "수많은 상어"나 "온갖 가지 상어"로 다듬으며, '제각기(-各其)'는 '저마다'로 다듬어 줍니다. '자태(姿態)'는 '모양'이나 '모습'이나 '모양새'나 '겉모습'으로 손보고, "무자비(無慈悲)한 종족(種族)들"은 "무시무시한 녀석들"이나 "끔찍한 물고기들"로 손봅니다. '대부분(大部分)이'는 '거의 모두'로 손질하고, "악마(惡魔) 같은 광채(光彩)"는 "악마 같은 빛"이나 "무서운 빛"이나 "사납고 무서운 빛"으로 손질해 봅니다.
┌ 남빛(藍-) : 짙은 푸른빛
├ 남색(藍色)
│ (1) 푸른빛을 띤 자주색. 또는 그런 색의 물감
│ - 남색 저고리 / 짙은 남색으로 변했다
│ (2) = 남색짜리
│ (3) [미술] 기본색의 하나. 먼셀 표색계에서는 5PB3/10에 해당한다
│
├ 가장 아름다운 남빛
│→ 가장 아름다운 파란빛
│→ 가장 아름다운 쪽빛
│→ 가장 아름다운 바다빛
│→ 가장 아름다운 파란 바다빛
└ …
숫자를 셀 때에 '하나 둘 셋'이라 하기도 하지만 '일 이 삼'이라 하기도 하는 우리들입니다. 시간을 말할 때 "열두 시 삼십 분"처럼 말해야 하고, 날짜를 일컬을 때 "오월 일일"처럼 말해야 하나, 이러한 때를 빼놓고는 굳이 '일 이 삼'을 안 써도 된다고 느낍니다. "삼일 걸렸어"가 아닌 "사흘 걸렸어"이고, "삼십 개예요"가 아닌 "서른 개예요"이며, "삼십 세입니다"가 아닌 "서른 살입니다"이니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색(色)'이라 이야기할 자리가 있습니다만, 따로 '色'이라는 낱말을 써야만 하는 '색연필'이나 '색종이' 같은 자리가 아니라 하면 '빛'이나 '빛깔'이라는 토박이말을 알뜰살뜰 살리면 한결 낫습니다. 아직은 힘들거나 어렵다 할 테지만, 앞으로는 '빛연필-빛종이'나 '빛깔연필-빛깔종이' 같은 새 우리 말 하나 빚어서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칼라사진'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따로 번역을 해서 '빛깔사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필름을 가리킬 때에도 '빛깔필름'이라고 이야기해요.
'칼라사진-칼라필름' 같은 낱말은 그냥 써도 괜찮다 여길 수 있지만, '블랙 앤 화이트'는 한자말로라도 '흑백'으로 옮겨서 쓰니까, '칼라(color)'라는 낱말 또한 무언가 우리 깜냥껏 옮겨서 쓸 때가 한결 낫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제가 좀 더 슬기롭지 못해 '빛깔사진-빛깔필름'이라고 합니다만, '무지개빛사진-무지개빛필름'처럼 써 볼 수 있고, 저보다 훨씬 슬기로운 다른 분들이 한결 알맞으며 매끄럽고 좋은 낱말을 일구어 낸다면 얼마나 반가우랴 생각합니다.
┌ 짙푸름 / 짙푸른빛
└ 짙파랑 / 짙파랑빛
국어사전에서 '자주색(紫朱色)'이라는 빛깔을 찾아봅니다. 낱말풀이를 살피니 "짙은 남빛을 띤 붉은색"이라고 나옵니다. 국어사전을 덮고 쓰겁게 웃습니다. 이와 같은 뜻풀이를 생각한다면 국어사전에 실린 '남색' 뜻풀이는 엉터리입니다. 말이 되지 않아요. "푸른빛을 띤 자주색"을 '남색'이라 한다면서 '자주색'을 이렇게 풀이해 놓으면, '남색'이란 "푸른빛을 띤 짙은 남빛을 띤 붉은색"이란 소리입니다. 말글 얼거리를 잘 모르는 어리보기가 국어사전을 엮었다면 모르되, 우리 말글 얼거리를 깊이 헤아리고 익히고 가다듬는다는 국어학자가 이렇게 국어사전을 엮었다면 더없이 슬프고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더구나 아주 한자말로만 적는 '남색' 뜻풀이는 "푸른빛을 띤 자주색"이라 하고, 한쪽은 토박이말로 적는 '남빛' 뜻풀이는 "짙은 푸른빛"이라 하면 아주 엉망진창입니다. '남색'하고 '남빛'이 다른 빛깔인가요? '남색'과 '남빛'은 서로 다른 빛깔로 여겨야 하는가요?
"짙은 푸른빛"이라면 말 그대로 '짙푸른빛'이요 '짙푸름'입니다. 바다 빛깔을 놓고 '남빛과 같다'라든지 '남색과 같다'고 이야기하려 한다면 "바다는 짙푸르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생각하자면, 하늘과 바다는 '파란' 빛깔이고 들판과 산은 '푸른' 빛깔입니다. 하늘과 바다를 가리켜 '푸르다'고 이야기하면 올바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푸른'이든 '푸르다'이든 "풀 빛깔"이기 때문입니다.
풀 빛깔이란 한자말로 '초록'입니다. 한자말 '草綠'은 "풀 초(草) + 푸를 녹(綠)"입니다. 한자말 '초록'은 아예 "풀빛 + 풀빛" 짜임새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이 우리 빛깔을 옳고 바르게 말하려고 한다면, 한자말 '초록'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냥 '풀빛'이나 '푸름'이라고만 해야 합니다. 일본 한자말 '綠色' 또한 털어내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논밭과 산에 피어나는 풀과 나무 빛깔을 일컫는 '푸르다'를 하늘이나 바다를 일컬을 때에 엉뚱하게 쓰지 말아야 해요.
┌ 쪽빛
└ 짙쪽빛 / 짙은쪽빛
국어사전을 아예 덮고 우리 생각을 차분히 가다듬으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예부터 곱고 맑은 우리 빛깔말 '쪽빛'을 이야기했습니다. '남색'이란 다름아닌 "쪽이라는 풀 빛깔"을 일컫는 한자말이며, '藍'은 "쪽(빛) 람"입니다. 한자말로 '분홍색(粉紅色)'은 '잇빛'이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쪽'이라는 풀이 있어 '쪽 풀빛과 같은 빛깔'이라는 뜻에서 '쪽빛'이고, '잇꽃이라는 꽃잎 빛깔'이라는 뜻에서 '잇빛'입니다.
잇꽃을 한자말로 적으면 '홍화(紅花)'입니다. 봄에 마주하는 진달래를 헤아리며 '진달래빛'이라 할 때가 있고, 개나리를 떠올리며 '개나리빛'이라 할 때가 있으며, 밤 열매를 생각하며 '밤빛'이라 할 때가 있습니다. 온누리 빛깔이란 우리 자연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예부터 우리 땅 사람들이 붙인 빛이름이란 바로 자연 빛입니다.
오늘날은 인종 차별과 인권이라는 테두리에서 '살빛'을 쓰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살빛은 말 그대로 '살결 빛깔'일 뿐입니다. 크레파스 회사에서 살빛을 엉터리 빛깔로 입혀서 그렇지, 여느 사람들 살빛이란 구리빛입니다. 햇볕에 그을리며 일하는 여느 사람들 빛깔 그대로 구리빛 또는 흙빛인 이 나라 이 겨레 살빛이에요. 다만, 어느 사람은 살결이 새까맣고 어느 사람은 살결이 많이 하얗다고 할 터이니 살빛을 어느 한 가지로 못박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풀빛이든 진달래빛이든 보리빛이든, 어느 한 가지로 못박을 수 없기란 매한가지입니다. 철에 따라 다르고 갈래에 따라 다릅니다. 한 가지 진달래빛만 있지 않고 한 가지 개나리빛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빛'을 써야 알맞습니다. 그리고, 살빛이라는 빛깔을 제대로 써서 '하얀살빛'과 '누런살빛'과 '까만살빛'처럼 갈래를 좀 더 촘촘히 갈라서 써야 알맞습니다. 참답게 살피는 인권이라 할 때에는 참답게 가눌 줄 아는 말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다이 보듬자는 사람 권리라 할 때에는 참다이 어루만질 줄 아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부터 갖가지 지식부스러기를 머리에 잔뜩 집어넣어야 하는 바람에 너른 넋과 깊은 얼을 일구기 어렵습니다. 제도권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오로지 대학입시에만 목을 매고,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도 마음그릇 닦고 마음밭 가꾸며 마음앎을 북돋우는 배움마당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많은 돈과 큰 집과 빠른 차에 얽매이도록 내몹니다. 아름다이 어루만지는 삶이 아닌 만큼 아름다이 어루만지는 생각이 아니요, 아름다이 어루만지는 말이 아닙니다. 바다를 보면서 바다빛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늘을 보면서 하늘빛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이런 한국땅에서 쪽빛을 잃거나 잇빛을 내동댕이치는 모습이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환경운동 일꾼 스스로 풀빛을 사랑하지 못하는 가운데 초록과 녹색에서 주저앉습니다. 아예 그린으로 나아가기까지 합니다. 또는 에코페미니즘이라 하듯 에코라는 영어로 뻗어나갈 때마저 있습니다. 이리 보아도 슬프고 저리 눈을 두어도 안쓰럽습니다. 이곳에서도 말은 주눅들고 저곳에서도 글은 짓밟힙니다. 이 땅에 우리다운 빛깔이 사라졌고, 이 땅 사람들 스스로 나다움이라는 빛깔을 사랑하지 않는 마당에, 이 땅 사람들 누구한테 우리 말빛과 글빛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외마디 한자말 藍- : 남색
"바다의 음흉(陰凶)함을"은 "엉큼한 바다를"이나 "엉큼하며 모진 바다를"이나 "바다가 얼마나 엉큼한지를"이나 "바다가 얼마나 엉큼하고 모진가를"로 다듬고, "수많은 종류(種類)의 상어"는 "수많은 상어"나 "온갖 가지 상어"로 다듬으며, '제각기(-各其)'는 '저마다'로 다듬어 줍니다. '자태(姿態)'는 '모양'이나 '모습'이나 '모양새'나 '겉모습'으로 손보고, "무자비(無慈悲)한 종족(種族)들"은 "무시무시한 녀석들"이나 "끔찍한 물고기들"로 손봅니다. '대부분(大部分)이'는 '거의 모두'로 손질하고, "악마(惡魔) 같은 광채(光彩)"는 "악마 같은 빛"이나 "무서운 빛"이나 "사납고 무서운 빛"으로 손질해 봅니다.
┌ 남빛(藍-) : 짙은 푸른빛
├ 남색(藍色)
│ (1) 푸른빛을 띤 자주색. 또는 그런 색의 물감
│ - 남색 저고리 / 짙은 남색으로 변했다
│ (2) = 남색짜리
│ (3) [미술] 기본색의 하나. 먼셀 표색계에서는 5PB3/10에 해당한다
│
├ 가장 아름다운 남빛
│→ 가장 아름다운 파란빛
│→ 가장 아름다운 쪽빛
│→ 가장 아름다운 바다빛
│→ 가장 아름다운 파란 바다빛
└ …
숫자를 셀 때에 '하나 둘 셋'이라 하기도 하지만 '일 이 삼'이라 하기도 하는 우리들입니다. 시간을 말할 때 "열두 시 삼십 분"처럼 말해야 하고, 날짜를 일컬을 때 "오월 일일"처럼 말해야 하나, 이러한 때를 빼놓고는 굳이 '일 이 삼'을 안 써도 된다고 느낍니다. "삼일 걸렸어"가 아닌 "사흘 걸렸어"이고, "삼십 개예요"가 아닌 "서른 개예요"이며, "삼십 세입니다"가 아닌 "서른 살입니다"이니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색(色)'이라 이야기할 자리가 있습니다만, 따로 '色'이라는 낱말을 써야만 하는 '색연필'이나 '색종이' 같은 자리가 아니라 하면 '빛'이나 '빛깔'이라는 토박이말을 알뜰살뜰 살리면 한결 낫습니다. 아직은 힘들거나 어렵다 할 테지만, 앞으로는 '빛연필-빛종이'나 '빛깔연필-빛깔종이' 같은 새 우리 말 하나 빚어서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칼라사진'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따로 번역을 해서 '빛깔사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필름을 가리킬 때에도 '빛깔필름'이라고 이야기해요.
'칼라사진-칼라필름' 같은 낱말은 그냥 써도 괜찮다 여길 수 있지만, '블랙 앤 화이트'는 한자말로라도 '흑백'으로 옮겨서 쓰니까, '칼라(color)'라는 낱말 또한 무언가 우리 깜냥껏 옮겨서 쓸 때가 한결 낫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제가 좀 더 슬기롭지 못해 '빛깔사진-빛깔필름'이라고 합니다만, '무지개빛사진-무지개빛필름'처럼 써 볼 수 있고, 저보다 훨씬 슬기로운 다른 분들이 한결 알맞으며 매끄럽고 좋은 낱말을 일구어 낸다면 얼마나 반가우랴 생각합니다.
┌ 짙푸름 / 짙푸른빛
└ 짙파랑 / 짙파랑빛
국어사전에서 '자주색(紫朱色)'이라는 빛깔을 찾아봅니다. 낱말풀이를 살피니 "짙은 남빛을 띤 붉은색"이라고 나옵니다. 국어사전을 덮고 쓰겁게 웃습니다. 이와 같은 뜻풀이를 생각한다면 국어사전에 실린 '남색' 뜻풀이는 엉터리입니다. 말이 되지 않아요. "푸른빛을 띤 자주색"을 '남색'이라 한다면서 '자주색'을 이렇게 풀이해 놓으면, '남색'이란 "푸른빛을 띤 짙은 남빛을 띤 붉은색"이란 소리입니다. 말글 얼거리를 잘 모르는 어리보기가 국어사전을 엮었다면 모르되, 우리 말글 얼거리를 깊이 헤아리고 익히고 가다듬는다는 국어학자가 이렇게 국어사전을 엮었다면 더없이 슬프고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더구나 아주 한자말로만 적는 '남색' 뜻풀이는 "푸른빛을 띤 자주색"이라 하고, 한쪽은 토박이말로 적는 '남빛' 뜻풀이는 "짙은 푸른빛"이라 하면 아주 엉망진창입니다. '남색'하고 '남빛'이 다른 빛깔인가요? '남색'과 '남빛'은 서로 다른 빛깔로 여겨야 하는가요?
"짙은 푸른빛"이라면 말 그대로 '짙푸른빛'이요 '짙푸름'입니다. 바다 빛깔을 놓고 '남빛과 같다'라든지 '남색과 같다'고 이야기하려 한다면 "바다는 짙푸르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생각하자면, 하늘과 바다는 '파란' 빛깔이고 들판과 산은 '푸른' 빛깔입니다. 하늘과 바다를 가리켜 '푸르다'고 이야기하면 올바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푸른'이든 '푸르다'이든 "풀 빛깔"이기 때문입니다.
풀 빛깔이란 한자말로 '초록'입니다. 한자말 '草綠'은 "풀 초(草) + 푸를 녹(綠)"입니다. 한자말 '초록'은 아예 "풀빛 + 풀빛" 짜임새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이 우리 빛깔을 옳고 바르게 말하려고 한다면, 한자말 '초록'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냥 '풀빛'이나 '푸름'이라고만 해야 합니다. 일본 한자말 '綠色' 또한 털어내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논밭과 산에 피어나는 풀과 나무 빛깔을 일컫는 '푸르다'를 하늘이나 바다를 일컬을 때에 엉뚱하게 쓰지 말아야 해요.
┌ 쪽빛
└ 짙쪽빛 / 짙은쪽빛
국어사전을 아예 덮고 우리 생각을 차분히 가다듬으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예부터 곱고 맑은 우리 빛깔말 '쪽빛'을 이야기했습니다. '남색'이란 다름아닌 "쪽이라는 풀 빛깔"을 일컫는 한자말이며, '藍'은 "쪽(빛) 람"입니다. 한자말로 '분홍색(粉紅色)'은 '잇빛'이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쪽'이라는 풀이 있어 '쪽 풀빛과 같은 빛깔'이라는 뜻에서 '쪽빛'이고, '잇꽃이라는 꽃잎 빛깔'이라는 뜻에서 '잇빛'입니다.
잇꽃을 한자말로 적으면 '홍화(紅花)'입니다. 봄에 마주하는 진달래를 헤아리며 '진달래빛'이라 할 때가 있고, 개나리를 떠올리며 '개나리빛'이라 할 때가 있으며, 밤 열매를 생각하며 '밤빛'이라 할 때가 있습니다. 온누리 빛깔이란 우리 자연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예부터 우리 땅 사람들이 붙인 빛이름이란 바로 자연 빛입니다.
오늘날은 인종 차별과 인권이라는 테두리에서 '살빛'을 쓰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살빛은 말 그대로 '살결 빛깔'일 뿐입니다. 크레파스 회사에서 살빛을 엉터리 빛깔로 입혀서 그렇지, 여느 사람들 살빛이란 구리빛입니다. 햇볕에 그을리며 일하는 여느 사람들 빛깔 그대로 구리빛 또는 흙빛인 이 나라 이 겨레 살빛이에요. 다만, 어느 사람은 살결이 새까맣고 어느 사람은 살결이 많이 하얗다고 할 터이니 살빛을 어느 한 가지로 못박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풀빛이든 진달래빛이든 보리빛이든, 어느 한 가지로 못박을 수 없기란 매한가지입니다. 철에 따라 다르고 갈래에 따라 다릅니다. 한 가지 진달래빛만 있지 않고 한 가지 개나리빛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빛'을 써야 알맞습니다. 그리고, 살빛이라는 빛깔을 제대로 써서 '하얀살빛'과 '누런살빛'과 '까만살빛'처럼 갈래를 좀 더 촘촘히 갈라서 써야 알맞습니다. 참답게 살피는 인권이라 할 때에는 참답게 가눌 줄 아는 말글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다이 보듬자는 사람 권리라 할 때에는 참다이 어루만질 줄 아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부터 갖가지 지식부스러기를 머리에 잔뜩 집어넣어야 하는 바람에 너른 넋과 깊은 얼을 일구기 어렵습니다. 제도권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오로지 대학입시에만 목을 매고,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에도 마음그릇 닦고 마음밭 가꾸며 마음앎을 북돋우는 배움마당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많은 돈과 큰 집과 빠른 차에 얽매이도록 내몹니다. 아름다이 어루만지는 삶이 아닌 만큼 아름다이 어루만지는 생각이 아니요, 아름다이 어루만지는 말이 아닙니다. 바다를 보면서 바다빛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늘을 보면서 하늘빛을 떠올리지 못합니다. 이런 한국땅에서 쪽빛을 잃거나 잇빛을 내동댕이치는 모습이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환경운동 일꾼 스스로 풀빛을 사랑하지 못하는 가운데 초록과 녹색에서 주저앉습니다. 아예 그린으로 나아가기까지 합니다. 또는 에코페미니즘이라 하듯 에코라는 영어로 뻗어나갈 때마저 있습니다. 이리 보아도 슬프고 저리 눈을 두어도 안쓰럽습니다. 이곳에서도 말은 주눅들고 저곳에서도 글은 짓밟힙니다. 이 땅에 우리다운 빛깔이 사라졌고, 이 땅 사람들 스스로 나다움이라는 빛깔을 사랑하지 않는 마당에, 이 땅 사람들 누구한테 우리 말빛과 글빛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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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