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양벚꽃수양버들처럼 축축 늘어진 가지마다 벚꽃을 가득 피웠다. ⓒ 김민수
수양버들 춤추는 길, 꽃가마 타고 시집가는 아홉살 새색시 갑순이…. 이렇게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왔다가는 서둘러 가려는지 어느새 벚꽃이 하나 둘 봄바람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제게 있어서 벚꽃 중 백미는 수양벚꽃입니다. 수양버들처럼 축축 늘어진 가지에 피어나는 수양벚꽃, 긴 머리칼 정갈하게 빚어넘긴 여인을 연상하게 하는 꽃입니다.
▲ 수양벚꽃벚꽃, 일본의 국화라 조금은 오해를 받는 꽃이기도 하다. ⓒ 김민수
내게 각인된 누님같은 꽃은 국화가 아니라 수양벚꽃입니다. 겨우내 말랐던 가지에 수액이 돌고, 버드나무대신 호드기를 만들어 불어도 좋을 만큼 물이 차면 꽃을 피우는 수양벚꽃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서둘러 꽃을 떨구고 봄과 이별을 합니다.
그 이별이 당연하다는 듯, 조금 섭섭할지언정 사람 사는 것이 그렇게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봄바람에 자신을 놓아버리는 꽃입니다.
▲ 수양벚꽃수양버들도 그렇고 수양벚꽃도 그렇고 물 근처에 있어야 어울린다. ⓒ 김민수
수양벚꽃보다 더 급하게 생을 마감하는 목련도 있지만, 목련보다는 하얀 눈처럼 꽃비를 흩날리는 벚꽃이 훨씬 더 삶이 깊어 보입니다.
아직 피어나지 않는 꽃들도 있는데 서둘러 지는 꽃을 보면서 젊은 생을 서둘러 마감한 이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가는 것들이 있어 남은 것들이 꽃을 피우고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 수양벚꽃지난해 피었던 억새위로 피어나는 수양벚꽃 ⓒ 김민수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기마련입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쓸쓸했습니다.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간 젊은 영혼들과 이별 중에서 가장 슬픈 느닷없는 이별을 한 유가족들의 울부짖음이 깊은 봄날에도 꽃이 피어난다는 것이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 수양벚꽃봄바람에 흔들리거리는 수양벚꽃 ⓒ 김민수
남의 아픔은 정녕 자신의 아픔이 되기가 쉽지 않는가 봅니다. 그렇게 느껴보려고 해도 깊은 슬픔의 심연을 알 수 없고, 내 일상의 작은 일에 매몰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자의 특권일 수도 있고, 사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충대충 하루를 허투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지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 수양벚꽃단아한 여인의 긴 머리칼을 보는 듯 하다. ⓒ 김민수
떨어진 꽃 말 없듯이 망자들도 말이 없습니다. 속 시원하게 '어무이, 평안사십시오!'라고 한 마디만이라도 해주고 떠났더라면, 기왕에 슬플 것이지만 '잘가라!' 한 마디라고 해주었을 터인데 아무 말도 없습니다.
▲ 수양벚꽃분홍빛의 수양벚꽃도 있다. ⓒ 김민수
올 봄에 만난 수양벚꽃, 그들은 시집가는 새색시 갑순이를 떠올리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막 피어나려고 저렇게 꽃망울 맺어 설레이게 하는 이들의 삶에 너무도 심한 꽃샘추위가 밀려와 기어이 꽃을 피우지 못하게 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현실때문에 피지 못하고 지는 꽃도 있는 것이구나 실감했습니다.
▲ 수양벚꽃겹꽃, 수양벚꽃도 있다. ⓒ 김민수
기어이 피어나는 것이 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꽃도 있는 것입니다.
현실로 받아들이기 싫어도 현실, 현실과는 상관없이 묵묵히 꽃 피어나는 것도 현실, 혹은 내가 없어도 아무일 없는듯이 돌아가는 세상처럼 그들의 원혼이 차가운 바다에 잠겨 숨막혀할 때에도 아무일 없는 듯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러나 그냥 밉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피어나지 않으면 어쩌려구요. 현실이 아프다고 꽃 피지 않으면 꽃 피는 봄 몇 번이나 되려구요.
채 피지 못하고 차가운 바다에서 주검으로 돌아온, 영영 주검의 몸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영령들 모두 고이 쉬소서.
그대들 비록 꽃비처럼 떨어졌지만, 그대들이 있어 또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카페 <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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