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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민 영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20년 경력 영어교사 송봉숙의 <레드카드, 대한민국 영어공부>

등록|2010.04.19 15:13 수정|2010.04.19 15:20

▲ 책 <레드카드, 대한민국 영어공부> ⓒ 부키

영어 공부라면 평생 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는 평범한 아줌마 영어 선생님 송봉숙씨. 그녀는 6학년 때 알파벳을 배우며 처음 영어를 접하고, 대입 스트레스를 영어 공부로 풀 정도로 영어를 좋아했다고 한다.
대학은 고민할 것도 없이 외대 영어교육과를 들어갔건만, 막상 영어의 세계에 들어가고 보니 이 세상이 만만치 않다.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서 하루 종일 영어만 쓰며, 그 이후엔 15년간 학교 선생님으로 영어를 가르친다. 그래도 부족함을 메우지 못해 결국 미국 유학을 떠나지만 그녀는 아주 새로운 시각을 갖고 돌아오게 된다.

그녀가 얻은 결론은 절대 우리는 원어민처럼 할 수 없으며, 원어민처럼 영어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저자는 우리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이렇게 단언한다.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잘못된 교육 목표 때문에 비정상적인 영어 교육 열풍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런 주장은 무척 공감이 간다. '오렌지'를 '어륀지'로 발음해야 한다는 한때의 왜곡된 영어교육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꼭 원어민처럼 해야 한다는 잘못된 영어 교육 목표를 세우게 된 걸까? 그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자.

저자가 공부한 교수법에서는 영어권이 아닌 타 문화권 영어 사용자의 '다수 언어 구사 능력(multi-competence)'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제2언어로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모국어가 있으며 모국어 외에 다른 언어를 하나 더 구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로부터 마치 실패자인 양 취급받는 것은 부당하며, 영어 교육계의 이런 풍토는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즉 원어민 대 비원어민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영어 공부를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한 사람은 자신이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능력에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당당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제2언어 습득에 임하면 영어 사용자들끼리의 원활한 의사소통도 저절로 따라온다. 꼭 미국식 영어만 훌륭한 것이 아니고 이 언어를 사용하여 타문화권의 사람과 의사소통만 제대로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영어에 강박관념을 가진 학부모들은 외국 유학을 보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유학 생활을 했던 저자는 엄마들의 이런 생각이 오산이라고 답한다. 자기가 만난 대부분의 사춘기 한국 청소년들은 미국에서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격에 따라 혹은 알아듣는 정도에 따라 적응 기간이 단축되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하는데, 다섯 명의 사춘기 소년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아이는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더러 학교에서 발표도 하고 친구도 사귀었다. 남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아이의 성격이 장점으로 작용한 경우다.

그러나 나머지 조용한 아이들은 4개월에서 심하면 2년 넘게 학교에서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정도가 심했던 두 아이는 미국 생활 1년이 지나 학교에서 연락이 와 부모가 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이유는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사춘기 아이들의 그야말로 쿨하고 싶은 욕망과 떠듬거리며 한국어 악센트로 느릿느릿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 현실은 참으로 상반된 것이다. 극복하기 쉽지 않은 과제임을 이해할 만하다. 상황이 이러니 한국에서 유학 준비를 잘해서 몇 개월 만에 적응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례를 그대로 믿어야 할지 의문이다."

영어 교육을 전공하고 실제 아이를 미국 학교에 보내면서 얻은 저자의 결론이니, 유학 신드롬에 휩싸인 엄마들은 한번쯤 귀 기울일 만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더불어 유학 생활이 미국 문화를 접하게 하는 좋은 기회라는 의견들 또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크램시라는 학자는 "언어를 가르치면서 문화를 다룰 때에는 엄청난 다양성이 있다는 점을 특히 주의해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인들이 유학 가서 경험하는 미국 문화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 좁은 경험을 가지고 마치 미국 전체를 경험한 양 떠들어 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른 나이에 영어권에서 생활하면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문법적 직관력은 한 두 해 영어권에서 살았다고 갖출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어릴 때 영어권에서 영어를 배웠다 하더라도 계속 영어권에서 살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그 언어를 제대로 습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들 외에도 툭하면 영어 교육을 들먹이며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현 교육정책에 경고장을 주는 말들이 많다. 평생 영어 공부를 하면서도 영어에 주눅이 들어 있는 우리.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한국어 악센트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영어를 말하자.

미국에서 태어나고 쭉 자라지 않는 이상 우리는 결코 원어민처럼 될 수 없다. 하지만 반기문 사무총장처럼 미국에서 영어를 계속 공부하지 않더라도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기죽을 필요 없이 씩씩하게 영어를 공부하고 외국인과 소통하며 넓은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 많은 나라, 저자와 같은 영어 교육관이 넘치는 나라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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