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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개의 기록' 때문에 콤플렉스 겪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동이>, 여섯 번째 이야기

등록|2010.04.20 16:54 수정|2010.04.20 22:01

▲ MBC 드라마 <동이>. ⓒ MBC

죄인의 딸임을 숨기려고 '최동이(한효주 분)' 대신 '천동이'라는 가명으로 장악원 노비 생활을 하고 있는 동이. 어쩌다 요행히 장 상궁(장옥정·장희빈, 이소연 분)과 끈이 닿는가 싶더니, 요즘 동이에게는 계속해서 시련의 연속뿐이다.

장옥정 모친의 지시로 민간 약방에서 약재를 구해 장옥정 처소에 몰래 반입한 동이. 하필 그 약방의 의원이 피살되는 바람에, 동이는 처음에는 참고인 신분으로 포도청에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피의자 신분으로 내명부 감찰부에 체포돼 한바탕 고초를 겪는다.

이런 가운데, 동이의 실체를 추적하는 한 남자가 있다. 1980년대 KBS 인기 드라마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에서 헐크인 데이비드 배너 박사의 실체를 추적하는 신문기자 잭 맥기처럼, 동이의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인물은 포도청 종사관 서용기(정진영 분). 지금 눈앞에 있는 천동이가 혹 죄인의 딸인 최동이 아닐까 하고 그는 끊임없이 동이의 뒤를 캐고 있다.

이상은 19일에 방영된 MBC 드라마 <동이>(매주 월화 오후 10시 방송) 9부의 주요 내용이다.

드라마 속 서용기가 궁금해 하는 동이, 아니 최 숙빈(숙빈 최씨)의 실체. 그 실체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했을 한 인물이 있다. 그것도, 그냥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뼈저리게'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했을 한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최 숙빈의 아들인 영조 임금이다. 천민 출신으로서 숙종의 후궁이 되어 왕자인 자신을 낳은 어머니의 실체에 대해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뼈저리게 생각하고 더 뼈저리게 고민했을 것이다. 

영조는 어머니 때문에 콤플렉스 느꼈을까

▲ 51세 당시의 영조.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잘 알려졌듯이,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평생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았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오해처럼 최숙빈이 무수리 출신이었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 숙빈은 적어도 공노비 출신으로서 하급 궁녀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여인이다.

조선에서 가장 높은 지존이 조선에서 가장 낮은 노비 출신을 어머니로 두었으니, 그가 그 때문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물론 천민 출신의 어머니를 그 누구보다도 애절하게 사랑했겠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그로 인해 자신이 곤란해질 때마다 영조는 분하고 답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영조는 어머니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라고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만약 구체적인 자료를 놓고 살펴본다면, 우리는 영조가 그런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한층 더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역대 조선 왕모(王母)들의 신분 혹은 지위에 관한 기록이다. 영조 때까지의 역대 왕모들의 신분·지위를 살펴보면, 영조가 최 숙빈의 신분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현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영조는 자기 이전 역대 국왕의 왕모들과 자기 어머니를 비교해본 다음에 그런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영조 때까지의 역대 왕모들을 비교해보면, 영조의 어머니가 여러 가지 '종목'에서 단연 '꼴찌 다관왕'이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여기서는 그중 2가지 종목만 살펴보기로 하자.

광해군·경종 어머니와 같은 처지였던 최 숙빈

먼저, 후궁 책봉 당시의 신분.

영조 즉위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후궁 출신의 역대 왕모로는 제10대 연산군의 어머니인 제헌왕후 윤씨(폐비 윤씨), 제11대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 제12대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 제15대 광해군의 어머니인 김 공빈(공빈 김씨), 제20대 경종의 어머니인 장 희빈(희빈 장씨), 제21대 영조의 어머니인 최 숙빈을 들 수 있다.

제6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 역시 후궁과 다름없는 '세자의 첩' 출신이므로, 넓게 보면 그도 후궁의 범주에 포함된다. 현덕왕후까지 합하면, 후궁 출신 왕모는 모두 7명이다.

이들의 후궁 책봉 당시의 신분을 가르는 기준은 간택 여부다. 간택을 통해 후궁이 되는 것과 궁녀에서 곧바로 후궁이 되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른 일이었다. 왜냐하면, 간택을 통해 후궁이 되었다는 것은 양반가문의 여식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7명 중에서 광해군·경종·영조의 어머니는 간택을 거치지 않고 궁녀에서 곧바로 후궁이 된 여인들이다. '궁녀는 중앙관청 소속의 공노비 중에서 선발한다'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으므로, 궁녀에서 곧바로 후궁이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사회 최하층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후궁 책봉 당시의 신분을 기준으로 하면, 영조의 어머니가 광해군·경종의 어머니와 같은 처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광해군·경종과 함께 이 종목에서 '공동 최하위'를 기록한 셈이다.

왕후 못 된 이는 하동부대부인과 최 숙빈 뿐

다음으로, 왕후 책봉 여부.

영조 즉위 시점까지, 왕후로서 생을 마친 여인은 제2대 정종 및 제3대 태종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와 제4대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를 포함해서 모두 11명이었다.

한편, 본래 왕후가 아니었지만 나중에 왕후에 추존된 여인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와 제9대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와 제16대 인조의 어머니인 인원왕후 구씨다.

이제, 왕후도 추존 왕후도 아닌 상태에서 생을 마감한 여인은 네 명이다. 제14대 선조의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광해군의 어머니인 김 공빈, 경종의 어머니인 장 희빈, 영조의 어머니인 최 숙빈.

그럼, 이 네 명이 공동 최하위일까? 그렇지는 않다.

위에서 김 공빈과 장 희빈은 나머지 두 여인과 구별돼야 한다. 김 공빈은 광해군 즉위 이후 왕후로 추존되었다가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인해 후궁으로 격하된 여인이다. 장희빈은 숙종 때에 왕후에 올랐다가 정1품 희빈으로 도로 내려온 여인이다. 이들은 한때나마 추존 왕후 혹은 왕후였다는 점에서 하동부대부인이나 최 숙빈과는 처지가 달랐다.

따라서 단 한 번도 어떤 형태로든 왕후가 되지 못한 여인은 선조의 어머니인 하동부대부인과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 둘뿐이다. 선조와 영조는 이 종목에서 '공동 최하위'를 기록한 셈이다. 이번에도 영조는 '공동 최하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 <광해군사친추숭도감의궤>. 광해군의 어머니인 김공빈을 왕후로 추존한 일에 관한 기록.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위와 같이 영조의 어머니는 '후궁 책봉 당시의 신분'과 '왕후 책봉 여부'라는 측면에서 '꼴찌 2관왕'을 기록했다. 만약 다른 종목까지 추가할 경우, 최 숙빈의 '꼴찌 왕관'은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영조는 자기 이전의 역대 국왕들과 비교할 때에 어느 모로 보나 가장 미천한 어머니를 둔 임금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가장 미천한 왕모를 두었다는 점에서 영조는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인물이다. 

천동이가 혹시 최동이가 아닐까 하며 그의 실체를 바싹 추적하는 드라마 속의 서용기보다도 더욱 더 적극적으로 최 숙빈의 실체를 추적했을 영조 임금.

사춘기 시절의 영조 이금은 여기에 소개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종목을 놓고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면서 자기 어머니의 위상을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우리 어머니는 얼굴이 괜찮고 머리가 영리하며 성격이 원만하다는 몇 가지 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볼 게 없는 분이었구나'하고 한탄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콤플렉스를 안고 왕위에 오른 영조가 귀족세력인 노론 집권당의 틈바구니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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