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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게 정말 우리 집 맞아?"

[새터 찾아 삼만리 13] 시골집 내놓고 새 집 골조 완성하다

등록|2010.04.22 11:39 수정|2010.04.22 11:39

▲ 기초공사를 시작한지 보름도 채 안돼 지붕 골조까지 올렸다. ⓒ 송성영


"아따, 오도 가도 못 하고 죽는 줄 알았네다니께요."

처가에서 보내온 목재며 창호 문짝 등 집 지을 자재를 가득 실고 집터로 들어선 50대 후반의 5톤 트럭 기사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농로 길이 비좁아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을에서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타고 들어서다보면 비좁은 곡선 길을 만나게 됩니다. 5톤 트럭, 그것도 7미터에 가까운 장축이 들어서려면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쳐야 합니다. 운전에 이력이 붙은 기사가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었을 길이었기에 진땀깨나 흘렸을 것입니다.

"하참 죄송해서 어쩌지, 괜히 집 짓는다고 여러 사람 고생시키네유."
"뒤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냥 갔을 거요."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집터는 본래 푸석푸석한 밭 자리였기에 며칠 전 내린 빗물에 땅이 질퍽거렸습니다. 집터로 들어선 트럭이 짐을 풀어 놓고 돌아서려는데 땅이 미끄러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헛바퀴를 돌았습니다. 목재를 깔아놓고 시도해 보아도 소용없었습니다.

기사 아저씨 보다 내가 더 진땀이 났습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공연히 고개를 외로 꺽어 바퀴만 바라보고 있는데 목수들의 팀장인 윤구씨가 4륜구동 지프차에 밧줄을 연결해 끌어 댕기자는 것이었습니다.

"저 큰 덩치를 끌어 댕길 수 있을까?"
"형님이 앞에서 4륜으로 당기고 뒤에서 밀어주면 될 거 같은데요."

윤구씨의 예상이 적중했습니다. 15년 가까이 된 낡은 지프차에 4륜 기아를 넣고 가속페달을 힘차게 밟았더니 육중한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결국 진흙탕을 빠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중고 시장에서 80만원 밖에 쳐줄 수 없다고 했던 늙은 애마가 이렇게 큰 힘을 발휘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여기 저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종종 카센터 신세를 지고 있는 지프차지만 여전히 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보니 5년 이상은 거뜬하게 타고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기초공사에 쓰였던 목재 거푸집 해체작업. 목재는 재활용했다. ⓒ 송성영


목수들은 집 자리에 쏟아 부은 콘크리트가 굳자 목재 거푸집을 제거하는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거푸집에서 떼어낸 쓸 만한 목재를 골라냈습니다. 이 목재들은 건물 틀을 짤 때 요긴하게 쓰여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쯤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만큼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목수들이 일하는 옆에서 목재에 박혀 있는 못을 뽑아내고 건물을 짓는데 더 이상 가치가 없는 목재들을 한 옆에 쌓아 놓았습니다. 집을 다 짓고 난 다음에 선반이며 밥상, 아이들 책상 등을 만드는데 요긴하게 쓸 일 목재들이었습니다. 거푸집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갈라지고 터져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목재들은 화목용으로 쓰면 될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늘 그래왔듯이 식당에서 아침밥을 챙겨먹고 집터로 향했습니다. 집터로 들어서다보면 바다를 끼고 있는 야트막한 산들 틈에서 아침 해가 산뜻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종수씨와 성훈씨는 집 구조를 만들기 위해 적당한 크기로 잘라냈고 경험 많은 목수 윤구씨와 창영씨는 설계도면을 펼쳐 들고 먹줄을 이용해 콘크리트 바닥에 안방, 손님방, 아이들 방, 거실, 화장실 등의 공간을 그려나갔습니다.

설계도면은 인도로 떠난 목수 동생의 도움을 받아 아내가 한 달 내내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완성한 것입니다. 아내는 설계도면에 전기시설이며 수도시설, 창호 사이즈까지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윤구씨는 설계도면에 맞춰 정확한 치수로 공간을 나누면서 약간의 수정을 했습니다.

▲ 아내의 설계도면. 전기시설이며 수도시설, 창호 사이즈까지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 송성영


▲ 윤구씨와 창영씨는 먹줄을 이용해 아내의 설계도면에 따라 정확한 치수로 집 공간구조를 그려나갔다. ⓒ 송성영


"여기는 조금 늘리고 여기는 좀 줄여야 겠네요."  
"알아서 해요. 나는 잘 모르니께, 집 짓는데 편리한 대로 해요. 나는 밥벌이 하러 일주일 쯤 공주에 갔다올테니께."

나는 목수들이 집 구조물을 짜는 것을 보다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공주로 향했습니다. 집 짓는 일보다도 당장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었으니까요. 공주 시골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집을 팔기 위해 내 놨다고 합니다.

"집 내 놨어."
"이런 집을 누가 사겠어? 필요한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 살라구 그랴."
"사겠다고 하는 사람이 왔다갔어."
"벌써? 이걸 얼마에 팔려고?"
"오백만 원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안방에 빗물 새는 거 얘기했지 잉."
"그 사람이 직접 봤어. 양동이 받쳐 놓은 거."

지난해 여름부터 우리는 집 안방에 내내 양동이를 받쳐 놓아야만 했습니다. 나름대로 지붕을 수리하겠다고 용을 써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 덜 나가는 사촌동생이 새는 지붕을 땜방하겠다고 가볍게 올라갔지만 오히려 빗물 구멍만 키웠습니다. 다 낡은 함석지붕이 바스러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이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비가 올 때 마다 안방에 양동이를 받쳐 놓고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 뒤로 호남고속철도가 뚫릴 예정이라는 것두 말했지?"
"당연히 했지."
"그 사람들 우리 앞으로 등기가 올려져 있지 않다는 것두 알고 있는 겨?"
"다 알고 있더라구. 이미 시청에 가서 다 떼 본 거 같은데."

10여년을 살아온 공주 시골집은 법적으로는 우리 집이 아니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빈농가를 구입할 당시 아무 생각 없이 집 주인을 믿고 등기조차 올리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사겠데?"
"아직은 모르지, 예전 집 주인하고 직접 계약하면 되니까 잘 하면 팔릴 거 같은데."
"막상 집을 처분한다고 생각하니께 집 한티 미안하네. 인효엄마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데. 서운하지?"
"아이들도 그렇구 나도 마찬가지지. 기분이 좀 이상해. 허전하고."

공주 시골집은 우리 집 아이들에게는 고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0여 년 전, 두세 살 무렵부터 흙 마당에 굴러가며 녀석들의 몸과 마음을 키워왔던 정든 집이었으니까요. 우리 부부는 본래 그 시골집을 사회운동가나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수행자들이 원하는 만큼씩 머물다 갈 수 있는 공동의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었습니다. 지붕만 고치면 안채는 멀쩡하니까요. 하지만 아내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집 짓는 자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처분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사랑방 구둘장은 그대로 놔두고 허물어 버리고 새로 지을 려나 봐."
"알아서 하겠지."

그날 밤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내내 작업실로 쓰고 있던 사랑방에서 밥벌이 방송 원고 작업을 했습니다. 천장에서 쥐새끼들이 운동회를 벌이곤 하는 사랑방은 이미 수 년 전 부터 한쪽 지붕이 내려 앉아 있었습니다. 대전에서 생활하시는 엄니는 비나 눈이 오면 전화를 걸어 지붕이 내려앉을까봐 사랑방에서 잠자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습니다. 

방송 원고를 마감하고 고흥으로 돌아오는 길에 20만 원짜리 중고 노트북 한 대를 장만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우리집 개 곰순이를 데리고 고흥 집 짓는 터로 향하면서 노트북 구입을 뒤늦게 후회했습니다. 집 짓는 작업을 하는 기간 동안 꼬박 꼬박 일지를 쓰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얼마든지 수첩 기록이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나 혼자만의 편리에 의한 불필요한 소비였습니다. 오래된 컴퓨터이긴 하지만 내겐 이미 컴퓨터가 있었습니다. 그 컴퓨터를 통해 동영상을 보면서 원고를 쓰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소비에 무감각해진 것은 집 짓는 기간 동안 거금의 공사자금을 지출하면서 생긴듯 했습니다. 일이 십만원은 물론이고 백만 원 이백만원조차 종이 쪼가리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돈이야 본래 불붙이면 잘 타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만 무감각해져 가는 소비가 문제였습니다. 불필요한 소비에 무감각해 가고 있다는 것은 자본의 깊은 수렁에 빠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의 수렁에 빠지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 고통이 뒤따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 벽체 세우기 공주 시골집으로 밥벌이 작업을 나설때 골조작업을 했는데 윤구씨가 사진을 찍어 놓았다. ⓒ 송성영


▲ 집 모양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윤구씨가 찍은 사진. ⓒ 송성영


가족들과 함께 일주일 만에 집터에 돌아와 보니 어느새 집의 겉모습이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이게 우리 집여, 여기서 사는 겨.' 신기하게 둘러보던 아이들은 이내 별 생각 없이 곰순이와 어울려 너른 풀밭에서 공을 차고 있었고 아내는 지붕까지 얹혀 있는 집 골조를 보면서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야! 이게 정말 우리 집 맞아?"
"이거 참, 생각보다 집이 너무 호화판인디. 소박하게 사느니 어쩌니 해놓고 이런 집을 짓고 있으니 사람들이 보면 욕하겠다." 
"그게 무슨 소리여, 그 돈을 어떻게 모은 건데. 우리가 투기를 해서 번 돈으로 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식투자를 해서 모은 돈으로 짓는 것도 아닌데."
"이건 그냥 우리 가족들만의 집이 아닌겨, 이런 집 짓겠다고 이 사람 저 사람 신세를 얼마나 많이 졌어."

별 생각 없이 말해 놓고 보니 그랬습니다. 인건비를 적게 받아가며 집짓기에 나선 윤구씨. 목재를 대준 처가. 집을 짓는데 부족한 거금을 선뜻 내준 사람들. 10여 년 동안 아내에게 그림을 배운 수많은 아이들. 한 달에 2만원 3만원씩 지불해 가며 아내에게 그림을 배운 수많은 아이들이 없었으면 애초에 집짓기는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 집 아이들에게 용돈을 건네 사람들, 내가 농사지은 2만 원 짜리 야채 박스를 고맙게 먹어준 사람들이며 방송 원고료를 받을 수 있게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준 사람들, 거기다가 <오마이뉴스>를 통해 받은 원고료며 '좋은 기사 원고료'를 내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집을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도움을 준 분들과 이 집을 같이 쓰면 되지 뭘."

아내는 기분좋게 한마디 툭 던져놓고 집을 부동켜 안기라도 하듯 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이제 겨우 외부골조를 완성한 텅 빈 집, 그 집이 앞으로 예상치 못한 자금들을 집어 삼키고자 입을 '떠억'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말입니다.

▲ "야! 이게 정말 우리 집 맞아?" 아내는 집을 껴안기라도 하듯 기분좋게 다가섰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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