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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폰서 검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비석

청렴한 '아곡'의 묘비에 비문이 없는 이유

등록|2010.04.26 14:56 수정|2010.04.26 14:56

▲ 조선 중기의 문신 아곡 박수량(朴守良:1491∼1554) 선생의 무덤이다. ⓒ 조찬현


비석이 하얗다. 아무런 글이 없다. 전남 장성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아곡 박수량(朴守良:1491∼1554) 선생의 무덤 앞에 있는 묘비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선생의 묘비에는 신기하게도 아무런 글이 없다.

오랜 세월에 비석이 풍화된 걸까. 자세히 살펴보니 비석의 외관은 멀쩡하다. 아예 맨 처음부터 글을 새기지 않은 듯 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선생은 명종9년(1554) 세상을 떠나며 "묘를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 조찬현


아곡 선생은 전남 장성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나 2품 벼슬인 판서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공직자로서 오직 맡은바 임무에만 충실하고 명예와 재물에는 사심이 없었다고 한다. 중종 9년(1514년) 문과에 급제한 후 판서에 이르기까지 38년 동안 많은 관직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선생은 명종9년(1554년) 세상을 떠나며 "묘를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명종은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여 서해안의 암석을 골라 하사하면서, 선생의 뜻이 훼손될까 염려하여 비문이 없는 백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는 돌에 새길 비문 대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선생의 뜻을 깊이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 청렴하기로 소문난 아곡 박수량 선생의 무덤가는 길이다. ⓒ 조찬현


유림들 사이에서도 학자로 존경을 받은 선생은 주세붕선생과도 깊은 교류를 했다. 집 한 채 없이 지낸 선생은 사후에도 남은 양식이 없어 초상마저 치를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대사헌 윤춘년이 정부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얼마 전 <PD수첩>의 '검사와 스폰서' 방송으로 공직자의 청렴성이 세간에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아곡 박수량 선생의 청빈한 삶에 주목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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