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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전화 안 받아요?

3년 만에 엄마에게 전화 한 사연

등록|2010.04.29 16:49 수정|2010.04.30 14:12
가족이라는 이들을 기억에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언제부터였을까. 소리 내서 말을 하기보다는 무엇인가를 글로 써보려 하기 시작했던 게.
아마도 열 서너 살부터가 아니었을까. 거창하게 무엇인가 짜임새를 갖추어서 쓰려던 게 아닌. 울고 싶은데 울어지지는 않고 목구멍이 터질 것처럼 아프기만 해서 저절로 눈에 눈물이 고여 떨어지곤 하던 그 무렵. 그때부터였다고 기억한다.

실어증에 걸린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고서 늘 눈이 젖어 있던 그 무렵, 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 홀로 떨어져 나와 목숨 붙어 살아가야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의 얼굴은 늘 무엇인가에 지쳐 서리 맞은 풀잎처럼 시들어 있었고, 부엌이 유일하게 자신의 공간이 되어 버린 언니는 늘 울고 있곤 했다.

바람도 햇빛도 내가 머물고 있는 곳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던 그때.
구석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어둡고 어두운 잠속을 더듬곤 했던 그 시절.
문득 오래된 사진 속의 어떤 기억처럼 가끔 나를 찾아오는 이런 시간.

이젠 그런 시간들과는 그만 인연을 놓아도 좋을 만큼 나는 지금 모든 게 평화롭고 고요하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씩 통증처럼 가슴이 저린다. 이런 날. 오랜만에 언니와 전화 통화를 끝내고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면서 음악을 듣고 있을 때 한숨처럼 그렇게 마음이 아프다.

언제부터였나. 언니를 만나는 것보다는 그저 잘 있으려니. 그리 짐작하며 모르는 체 살아버리기 시작한 게. 가능하면 가족이라는 이들을 기억에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살기 시작한 게,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오늘 아침, 오래 된 전화번호부를 뒤져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 세상에, 엄마 전화번호를 몰라 메모해 놓은 걸 찾아서 전화를 하는 딸이, 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단 한번도 딸의 삶에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 엄마

나는 비교적 엄마의 넋두리를  잘 들어주는 딸이었다. 마음 속에 엉킨 게 많아 엄마라는 사람 본연의 모습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엄마가 한나절 내내 당신의 살아 온 내력을 풀어 놓는 날이면 하던 일도 접어버리고 참을성 좋게 들어주는 편이었었다.

내 엄마는, 나이 열여섯에 밥 먹는 입 하나 덜어 낸다고 외할머니가 당신의 집에서 고개하나만 넘어가면 보이는 동네로 당신을 시집 보내셨다고 했다. 시어머니도 없는 홀시아버지와 머리만 시커먼 아들 둘이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간 엄마는 늘 외할머니를 타박하였다.
한나절만 품버리면 그 집 사정을 알아냈으련만 중신아비 말만 믿고 보따리 하나 챙겨 싸주듯 홀랑 딸을 주어버려 그리도 박복하게 살고 계시다는 거였다.

할머니가 일찍 세상을 버리신 통에 아들만 형제였던 내 아버지는, 겨우 나이 열여섯이었던, 그 고명 같은 아우를 6.25전쟁 때 의용군으로 끌려 간 이후로 다시 보지 못하셨다. 그러시곤 지푸라기라도 내 것이 많아야 한다고 일곱씩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으셨다고 한다.
세상에, 자식을 두고서 지푸라기라는 표현을 쓰셨다는 게 들을 때마다 말이 안 나왔다.
그렇게 얻어 낸 자식들을 키워 내는 건 온전히 엄마 혼자의 몫이었다.

남편에게 아무것도 기댈 수 없었던 엄마는 아들에게서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셨던 것인지
딸은 안중에도 없으셨다. 딸이 학교를 가야 할 나이가 되어서도 가방 대신 그 어린 등에 아이를 업혀 놓으시고 단 한번도 딸의 삶에는 눈길 한번 눈여겨 보아주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를 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기 싫다는 말이 더 옳았다. 어린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큰 딸을 타박하는 엄마의 무서운 목소리와 눈을 피해  어두운 부엌 흙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언니의 등 뒤에 우두커니 서 있곤 했었다.

나이가 들어 내가 학교에 가기 시작했을 땐 나는 투사 아닌 투사가 되어야 했다. 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려는 엄마와 사사건건 부딪히며 싸워야 했으니까. 그럴 때마다 언니는 '넌 어서 커서 이 집에 있지 마,' 그런 말로 내 편을 들어 주었다.

엄마의 소원대로 내 엄마의 아들들은 이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크게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주말이면 골프채를 휘두르고 많은 이들이 선망한다는 강남에 집들을 두고 산다.

"엄마, 언니 생각은 쪼금도 안 해?"

3년 전 가을, 엄마는 당신의 말을 그저 잘 들어주는 내게 그 날도 또 전화를 하셨다.
"니 어찌 생각 허냐?"
"뭘요?"
"저그 거시기 세째놈이 맘에 걸려서 말이다, 내가 통장 쪼매 헐어서 돈 쫌 해줄란디, 넌 어찌 생각 허냐고?"

물론 내 생각이 중요해서 그렇게 물으신 게 아니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저 자랑이 좀 하고 싶으신 거다. 이미 딸을 제외한 다른 세 아들한테도 이미 그런 일을 해 온 터이므로, 그걸 이미 알고 있는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갈 리 없었다.

"엄마, 제발 그러지 좀 마, 그 놈 살 만큼 살잖아, 그냥 엄마 쓰고 싶은 만큼 쓰고 나중에 행여 남거들랑 불우이웃 돕기라도 해."
나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혼자서 먹고 쓸 만큼의 여유가 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그게 그리 곱게 보이진 않고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기로 언니의 삶을 통째로 밟고 일어선 지금의 윤택함이 나는 영 달갑지가 않은 것이다.

"너, 시방 너는 안 주고 아들 준 당께 시암 나서 그러냐?"

웃음이 깔려 있던 처음의 엄마 목소리는 이미 아니었다. 늘 일방적으로 엄마의 말을 들어주는 입장에 있었던 딸의 돌연한 변화에 엄마도 좀 신경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엄마, 나한테 그런 거 묻지 말고 엄마 맘대로 혀. 그리고 엄마, 언니 생각은 쪼금도 안 해?

짧은 순간 폭발한 내 심장이, 사십 몇 년 동안 엄마의 눈빛에 찔려 한마디도 못했던 말들이 한말쯤은 쏟아졌던 것 같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수화기를 던져 버리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내 전화에 불러 나와 앉아 있는 친구를 앞에 앉혀 놓고 깔깔 거리며 술을 마셨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술을 마셔 보기는 아마 처음이었지 싶다.
마음에도 없이 억지로 쌓아 올린 탑 하나가 와르르 무너지는 환영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울어도 울어도 덜어내 지지 않던 무거웠던 그 무엇이 바람이라도 만난 양 훌훌 날개를 달고 날아가고 있었다.

그게 3년 전의 일이다. 그러고선 큰오빠 딸이 결혼하던 지난 2월에 엄마를 만났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를 보던 엄마가 부스럭거리며 당신의 치마주머니를 뒤지셨다.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딸에게 차비라도 주시려는지, 급하게 주머니를 뒤지는 엄마를 보면서 무엇에 놀란 것처럼 황급히 엄마 옆을 도망해 광주로 내려와 버렸다.

오늘 아침, 우두커니 앉아서  천안함 침몰 사고로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봄꽃처럼 져 버린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이 알 수 없는 세월 속에 사는 엄마들의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나도 더 늦기 전에 엄마와 화해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두 시간을 더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오래 된 전화번호부를 뒤져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비친 봄 햇살이 너무 좋아서 쑥이라도 뜯으러 가신 것일까?

엄마, 왜 제 전화 안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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