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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26)

일상적인 토크쇼

등록|2010.05.05 15:12 수정|2010.05.05 15:12

▲ 인생은 즉석에서 해결할 수 없다 ⓒ 일러스트 - 조을영



26. 일상적인 토크쇼

꼬맹이는 손님용 소파에 가서 얌전히 앉았다. 그러자 카메라 몇 대가 그 애에게로 향하더니 이윽고 내 손을 잡고 아이 곁으로 이끄는 할머니에게 포커스가 맞춰졌다.

"인생이란 게 계획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걸 기억하고 현재에 임하면 돼."
"할머니..저..는.."

우리가 꼬맹이 곁으로 걸어갈 때 좀 전과는 다른 우아한 음악이 스튜디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할머니는 나를 그 애 옆에 앉히고는 자신의 집 응접실에 놀러 온 두 손녀에게 대하듯이
"서로 인사하고 이 쿠키를 먹으며 대화라도 나눠 보렴."
하고는 탁자 위에 놓인 접시를 내밀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내가 말했지?"
꼬맹이는 전과 다름없는 싸늘한 얼굴로 삐쭉거리며 말했다.
"너..여긴 어쩐 일로?"

"그 미술 선생이 이리로 보내줬어. 그는 지금 보카에 있어."
"뭐?"
"분노의 술이 여러 종류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자신이 큰 실수를 해서 만들어진 거래. 그걸 이제라도 무마시키고 싶다고 지하 창고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아."
"분노의 술을?"

"멜레나가 말하길, 그 남자는 열망 사냥꾼한테 영혼을 뺏겨서 미친 적이 있었다는 거야. 지금도 그 고통에 괴로워서 산 송장이나 다름없다고 했어. 게다가 자신이 여러 사람에게 그 병을 전염시켜서 다들 비슷한 증상을 보이면서 인생의 한 부분을 뜯긴 채로 살아가는 중이래. 그래서 이제 그 처방책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거라고 했어."

'결국 그도 엮여 있단 말이군.'
나는 한숨과 함께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멜레나의 소식도 이야기 했다. 그녀는 열망사냥꾼을 퇴치할 비방책이 든 상자를 관광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거다. 그래서 그걸 찾아내라고 환상관광에 따지고 들었고, 그 곳의 전화교환원은 이리저리 알아보던 중에 이 방송국에 그 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떻든 사수해야 한다고 맘먹었다고 한다. 고객과의 신의와 회사의 이미지를 최고로 여기는 안내원의 직업정신은 방송 피디와의 혈투에도 굴하지 않게 했고 목표를 향한 광적인 집념을 발휘하게 했다는 거다.

꼬맹이는 막힘없이 술술 잘도 말했다. 게다가 또박또박한 말투가 여간 밉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는 제법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는지 종알거리는 도중에도 쿠키를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여긴 너 혼자 온 거야?"
"보카에서 출발한 사람은 나와 아저씨 한명이 더 있어. 그리고  관광버스가 중도에 사람을 더 태웠어. 그들은 좀 있다가 나올거래."
그리고는 밉살스럽게 입을 옴쌀거리며 이제는 옆에 있던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큰 샌드위치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보고만 있던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배가 고팠지만 숙녀로서의 자존심은 반드시 지키고야 말거야' 하는 식으로, 아이는 호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냅킨인 양 무릎위에 펼쳐서는 혼자만의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만약 근사한 정식 식탁을 차려놓고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가져다 줬더라면 더 어울렸을 것 같은 태도였다. 진지하게 음식을 음미하며 하나하나의 속 재료를 되씹는 것 같은 성실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교훈을 주기까지 했다. 어떤 난관의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 아이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서 신념을 굽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철저한 자기 단련과 신중함과 결단력이 어우러진 생활태도가 기반이 됐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이야기를 넌지시 듣고 있던 할머니는 턱을 괸 손을 하고는 카메라 쪽으로 얼굴을 살짝 틀어서 말했다. 할머니의 진행이 좀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느슨하고 일상적으로 변한 분위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초대 손님이 두 분 더 오셨군요. 모셔보겠습니다."
그러자 탱고 음악과 함께 무대 뒤쪽에서 남녀 한쌍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흰갈매기 하고 합니다."
남자가 자기 소개를 하자 여자도 주삣거리며 소파곁으로 다가와서 애써 미소를 지었다. 좀 전 까지 씩씩 거리며 머리가 엉크러져있던 전화교환원, 그 여자였다.

<계속>
덧붙이는 글 필자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미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설 내용을 살려서 직접 작업한 일러스트를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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