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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먹여살리던 어머니 머리카락

어머니 머리를 다듬다 떠오른 어린 시절

등록|2010.05.08 16:17 수정|2010.05.08 16:17

▲ 마당에서 머리 자르는 날 ⓒ 김수복



5월 8일.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기로 했다. 굳이 날짜를 의식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어버이날과 맞물리게 되었다. 어버이를 어버이로 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희귀했으면 그런 날까지 따로 정해야 했을까 하는 투정 비슷한 마음도 사실은 없지 않다.

아무튼지 그렇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림잡아 두 달 만에 한 번씩 갖는 의미심장한 행사다. 이 일은 손톱 자르기나 귀 후비기와 같이 가슴 저 안쪽의 어떤 것을 깨워서 가끔은 눈물이 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고, 하여튼 온 몸에 힘을 빼고 마치 연체동물처럼 움직여야만 하는 내밀한 즐거움이다.

몸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자칫 귀를 건드려 피를 보게 된다. 손끝에 힘을 빼도 귀는 위험하다. 사각사각 잘려지는 머리카락, 잘려진 그것이 피부에 닿았을 때의 느낌, 이 느낌과 사각거리는 소리 사이에 어떤 것이 있다. 아득한 향수 같은, 까닭도 없이 눈물이 나려 하는, 뭔가가 그리워서 안타까워지는 그 순간에 어머니와 아들의 친밀감은, 유대감은 강화된다.

"아 가만히 좀 있어 봐아."
"나 암 것도 안 했어어."
"안 하긴 뭘, 귀 자를 뻔했구만."
"알았어, 가만히 있을게."

하지만 어머니는 금세 자신의 맹세(?)를 망각하고 고개를 돌린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겠다는 듯 갑자기 아래로 머리를 숙이기도 하고, 하늘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또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어 위를 보기도 한다. 딱히 볼 것이 무엇 있을까마는, 그러나 무엇인가 자꾸 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지는 것, 이것이 머리를 남의 손에 맡긴 사람이 치러야 하는 숙명적인 조바심이요 의구심이다. 아, 돌아보면 참 많이도 얻어맞았다.

쥐가 뜯어먹은 고구마 같았던 내 머리통

"아 가만 좀 있어봐, 써글놈아."

전라도 말로 귓방망이라고 한다. 주먹을 살짝 쥐고, 검지나 중지의 마디를 뾰족하게 세워서 머리통을 툭 치는 것, 어머니는 때로 웃으면서, 때로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써글놈아' 소리를 내며 한 방씩 쥐어박곤 하셨다. 국민학교 시절에, 일 년에 적어도 네다섯 차례는 그런 행사를 치르곤 했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머리가 너무 길었다고, '바리캉'이란 이름의 기계로 머리통 한 가운데를 일자로 쓰윽 밀어버린다. 말이 좋아서 일자로 쓰윽 밀어버리는 것일 뿐. 사실은 선생님이 이발사가 아니기 때문에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영 서툴어서 머리카락 태반이 잘려지는 것이 아니라 뽑히거나 건너뛰게 된다. 그때의 아픔은 이빨을 뽑는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어서 강제로 머리를 깎였다는 슬픔과 억울함 그리고 아픔까지 범벅이 되어 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게다가 여학생들은 뒤에서 그리고 옆에서 서로의 옆구리를 찔러대며 킥킥거린다. 요즘처럼 아이들의 배포와 개성이 강한 시대였다면 그것도 자랑이라고 오히려 어깨를 펴고 다닐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에는 무조건 창피요, 수모요, 모욕이었다. 아빠에게는 무서워서 차마 말도 못 꺼내고, 오직 엄마에게 온갖 성깔을 다 부리게 되는데, 그러면 참다못한 엄마가 "오냐, 깎아주마 그놈의 머리, 내 손으로는 못 할까" 하면서 반짇고리 속의 가위를 들고 나서는 것이다.

이발소에 갖다 바치는 5원이던가 10원이던가, 하여튼 그 이발료가 처음에는 아까웠지만 엄마의 심사는 이제 그런 차원이 아니다. '괘씸한 것들', 누가 왜 괘씸하다는 것인지는 사실 엄마 자신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엄마는 뭔가가 괘씸해서 잇달아 중얼거린다. '괘씸한 것들, 괘씸한 것들', 그러면서 커다란 가위를 들고 아들의 머리를 싹둑싹둑 잘라낸다. 그리고 다듬는다. 그런데 엄마가 이발사였던가. 기술자였던가. 커다란 가위로 절컥절컥 소리를 내가며 머리카락을 자르다 보니 귀를 잘라 피를 보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아 써글놈아 가만 좀 있어야. 귀때기를 기냥 칵 짤라 벌랑게."

귀를 건드려서 피가 비치면 엄마는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놀람과 슬픔으로 버무려진 그 목소리 속에 엄마의 애간장이 들어 있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라도 해야 할 것처럼 갑자기 엄숙해져서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숨소리조차 크게 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인 채로 코를 질질 흘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속으로만 끅, 끅 울먹거리는 시간,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발은 끝나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혀서 눈을 감아 버려야만 했다. 빡빡머리를 가위로 잘랐으니 이놈의 머리가 들쭉날쭉 그야말로 쥐 뜯어먹은 고구마 꼴이 되어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꼴로 바깥 출입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시절에 남학생들은 모두 모자를 쓰는 게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이다. 머리가 어서 자라기만을 바라며 모자를 쓰고 다니노라면, 또 어느새 규정 이상으로 다 자라서 선생님의 지적을 받게 된다. 정말이지 그 시절에는 그랬다. 이발소 주인과 선생님이 담합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발단속이 어마어마했다.

보릿고개 때 가족을 먹여살리던 어머니 머리카락

그 시절의 기억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어머니의 머리를 미장원에 맡기지 않고 내 손으로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굳이 미용기구를 새로 구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가위와 빗만 있으면 되는데 가위도 빗도 이미 집안에 있었다. 이웃집 할머니께서는 살림 가위로 머리를 자른다고 질겁을 하지만 글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머니도 물론 아무렇지 않다.

그런데 '왜 남자만 그래야 했던가?' 이 의문은 사실 지금도 남아 있다. 그때는 물론 지금보다 훨씬 강렬했을 것이다. 여자는 머리카락이 길어도 되고 남자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시절에 여자의 머리카락은 가난한 살림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전문가가 해마다 두세 차례씩 마을을 찾아왔다. 특히 보릿고개라 일컫는 봄철에는 마을 전체의 행사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와 당숙모들이 모여서 머리를 자른다고, 자르되 자르지 않은 것처럼 기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필요했던 것일까.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어머니와 당숙모들이 단체로 그렇게 모여앉아 시끌벅적하게 머리를 잘라서 팔곤 했다.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사람이 오는 시기는 대개 봄날의 춘궁기, 보릿고개 그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겨우내 덜덜 떨며 눈 속을 헤매고 다니던 마루 밑의 개가 살 판이 났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해대는 아주 따뜻한 날 오후 두세 시 무렵이면 그 일이 시작되곤 했었다. 어른 주먹 만하던 어머니와 당숙모들의 낭자머리는 다음 날부터 어린아이의 주먹 정도로 줄어든다. 손에 쥐면 한 움큼 그득하던 여자 아이들의 말총머리 또한 반 줌으로 줄어들었다.

여자는 그렇게 어른이나 아이나 머리카락 하나만으로도 살림에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남자는 왜, 도대체 왜 남자는 돈을 들여가면서 머리를 깎아야만 했더란 말인가. 빡빡머리에 모자를 쓰는 게 아마 일제의 잔영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하여튼지 그랬다. 남자아이들의 머리카락은 일정한 때가 되면 빨리빨리 잘라야 하는, 돈 먹는 애물단지였던 반면에 여자아이들의 머리는 때가 되면 돈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데 그 무렵에 머리카락은 사 가는데 왜 손톱이나 발톱은 사 가지 않는 것이냐고 물어본 아이는 누구였을까. 누군가 그런 질문을 했다가 웃음바다를 만들었다는 기억은 있지만 그 아이가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만약에 내가 그런 질문을 했었다면, 어린 시절의 나는 대단히 창의적이고 호기심이 강한 아이였다고, 그렇게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다.

시집살이에 머리 뜯긴 당숙모 얘기에 눈물 뚝뚝

▲ 마당에서 머리 자른 날 ⓒ 김수복



"참, 엄마, 송골할매 기억해?"
"송골? 알지. 나도 알어."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 할머니가 당숙모 머리채를 막 뽑고 그랬잖어."
"으응, 그랬어, 그려, 맞어. 아이고, 참말로."

어머니는 갑자기 치를 떠는 목소리로 말하셨다. 그랬다. 집안 살림에 큰 도움이 되어주었던 그 귀한 머리채를 작은댁의 할머니는 함부로 휘어잡고 질질 끌고 다니다가 한 움큼씩 뽑아내기도 했었다. 그것을 시집살이라고 했다. 여러 당숙모 가운데 유난히도 한 분 당숙모께서 그런 모진 시집살이를 하셨다.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때도 갑자기 나타나서 머리채를 잡아 뒤로 확 젖히며 "이년, 이년. 요강을 비우고 왜 안 씻어, 왜, 이년, 이년"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작은 할머니 당신이 그런 시집살이를 했으니까, 그래서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물려주는 것도 참 별나기도 하다.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래서 그 당숙모를 생각하면 그만 목구멍이 컬컬해지고 눈앞에 안개가 서리곤 한다.

어머니는 이런 내용들을 잘 기억하신다. 안타까웠던 것들, 애간장이 녹아나는 것들, 억울하거나 분하고 슬펐던 이런 것들은 아마도 기억의 창고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로 보호되고 있어서, 그래서 치매라는 녀석도 감히 뚫고 들어가지를 못하고, 삭제해 버리지도 못하는 것 같다.

어머니의 눈앞에서 당숙모의 머리채가 생시의 그것처럼 뽑히고 있었던 것일까. 코를 자꾸 훌쩍거린다 싶더니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뭐여, 울어?"
"아니."
"아 그만 울어어."
"나 안 울었어."
"울면서 안 울었다고나 하고, 순전히 거짓말쟁이라니깐."
"몰라, 나. 누구 울었간디?"

이럴 때의 어머니는, 내가 참 많이 헷갈린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의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치매 상태의 그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일은 구시포로 조개나 잡으러 가야겠다. 의자도 가져가야 할 것이다. 일단 갯벌에 들어가면 앉을 곳이 없으니까. 어머니는 자주 앉아 있어야 하는데 앉을 곳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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