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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37회)

저승에서 온 편지 <2>

등록|2010.05.11 08:46 수정|2010.05.11 10:04
이두용의 주검이 발견된 그 날, 김관주는 서리배와 항인을 거느리고 현장에 달려가 주위를 단속했다. 산그늘이 내린 산록 자락이지만 무더운 여름이라 시신엔 구더기가 들끓었다. 코와 귀에서 흘러나온 악즙(惡汁)이 고약한 냄새를 주위에 번져놓아 관속들조차 접근을 꺼려했다.

검시 절차는 <초복검험관문식(初覆檢驗關文式)>의 양식에 따라 출발 일시와 함께 검험했다. 서리와 오작인의 이름, 시체가 놓인 장소와 관아에서 현장까지 거리 등을 적고 시신의 친척을 찾아 이두용의 배다른 누이에게 연락했으나 당사자의 건강이 좋지 않아 참예할 수 없다는 말에 손수 검험에 나섰다.

그렇다고 <관문>양식을 무시하고 처리한 건 아니었다. 그런 것은 동행한 항인들이 기록하는 것이므로, 자신은 살해 방법이나 놓인 주검이 어떤 상태인가를 조사했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살해된 이두용은 '간'을 도둑맞았다.

사람이 간을 먹을 수 없으므로 문둥병자가 아니면 깊은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임은 너무 당연했다. 심성이 무난한 이두용이 원한 살 일이 없고 보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단정됐으나 검험 기록엔 의문이 가는 부분은 잊지 않고 적어놓았다.

<···이두용의 주검엔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간이 통째로 사라지고, 사체(死體)의 흉부는 반월형을 이룬 채 깊이 팼는데, 시일이 경과됐다고곤 하나 도검에 의한 손상임을 알 수 있다···>

근처를 수색하던 관졸들은 이두용의 주검 가까이 문둥병자가 있었고, 그들이 살고 있는 움막에서 흉기로 사용된 낫이 발견된 것으로 보면 이러한 흉인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어찌 선정을 베푸는 치정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느냐에 격분했다. 관찰사의 복검을 거처 문둥병자는 참형에 처해졌었다.

상대의 얘기를 듣던 정약용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문둥병자가 그 사건에 개입된 정황이나 주변 여건에 부합하는 바가 적지 않지만, 한 걸음 먼저 이두용은 날이 선 검에 의해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틀이 지났으니 구더기가 들끓었고, 베인 상처 역시 상했으니 자세히 밝히긴 힘들었을 것이나, 벤 상처는 그 형태가 틀을 유지하기 마련이오. 상처 모양으로 보면 결코 낫에 의한 게 아닙니다. 더구나 문둥병자가 항우장사 같은 힘이 없고서야 어찌 한 칼에 이두용을 절명시키겠습니까. 분명 칼 쓰는 일에 이골이 난 자의 소행입니다. 그 자가 이두용을 절명시킨 후 시신이 문둥병자에게 발견돼 참혹하게 도륙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생간이 문둥병에 특효하다는 속설을 믿고 있으니까요."

"허면, 정지평께선 이두용을 살해한 범인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문둥병자도 씻지못할 죄를 저질렀습니다만, 그것은 우연의 일칩니다. 한 가지 김감사에게 묻습니다. 이두용이 살해당할 때 가지고 있던 물건은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죽은 부인의 무덤에서 가져온 뼙(骨)니다. 사건이 종결돼 가족에게 돌려주려 했습니다만 찾는 사람이 없어 관아에서 가매장했습니다. 그 자가 무슨 이유로 뼈를 가져왔는지 알 수 없으나, 재산을 처분한 일은 두고두고 고을 사람들의 얘깃거리였습니다."

"어쨌건 관음사 동자승이 된 그 아이 말을 들어 봅시다. 그리하면 묶인 매듭이 풀릴 수도 있잖겠습니까?"

김관주가 방안을 나가자 정약용은 여전히 검시기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송화를 불러 낮은 어조로 명한 후 밖으로 내몰았다.

"김평산이란 자가 죽기 전, 아무래도 가까운 술집에 있었을 것이다. 그 자가 타살된 정황은 없지만 실족해 죽게 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터, 그것을 알아 보거라. 이곳 노량진 감영에도 발 빠른 자가 있을 것이니 수단껏 잘 구슬러 보구."

그날 밤 관아를 나간 송화는 날이 새고 중천에 해가 떠올랐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날 관아에 들어온 관음사 비구니와 동자승은 감영 안에 마련된 빈 객실에서 정약용을 비롯한 김관주와 대좌했다. 쉰 살 어림의 비구니가 지초지종을 열었다.

"생로병사가 자신의 반연에 의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를 망칩니다. 소승이 이 아일 맡게 된 연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해 전, 소승이 탁발 나섰다가 아이의 집에 들르게 됐습니다. 부친의 상을 살피니 얼굴 가득 수심이 깔려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해서 물었지요. 어찌하여 그렇듯 만난(萬難)의 고통을 지고 있느냐고요. 그랬더니 아이 부친이 말하길, 집안이 멸문 당하지 않으려면 아이를 절로 보내 중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승의 말을 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아이 수명이 보존된다 했으니 그분께선 탁발을 나온 소승에게 아일 맡기며 물건 하나를 주었습니다."

비구니는 바랑 안에서 기름종이에 꽁꽁 싼 두툼한 물건을 내놓았다. 그것은 제사를 지낼 때 술잔을 얹어놓는 조그마한 목기(木器)였다.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는지 낡은 목기엔 군데군데 흠집이 있었다. 특히 중앙 부분의 붉은 칠이 벗겨진 자리엔 시커먼 자국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그것 외엔 특별한 것이 없어 정약용에게 건네자 다시 비구니의 얘기가 이어졌다.

"세 해가 지나 관아에 탄원하게 한 것은 아이의 부친 생각입니다만, 무슨 까닭인진 모르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김관주는 조사를 마칠 때까지 감영에 머물라 하여 처소로 돌려보냈다. 초검과 복검 기록을 샅샅이 훑었을 때에 송화가 나타났다.

"···김평산과 어울렸던 자 중에 유씨 성을 쓰는 자가 있었는데 그 자는 김평산의 죽음을 아주 고소해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술집 작부도 얹힌 체증이 내려가듯 시원해 했습니다. 근자엔 유기장이들과 어울려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았지만 하는 일은 모른다 했습니다. 그 자에 대해 알아보니 사대부를 비롯해 상인이나 시중잡배들까지 꺼리고 있었습니다. 근자에 자주 어울렸다는 유기장이 최가가 품안에서 두툼한 약봉지를 꺼내 땅바닥에 팽개치며 욕설을 퍼붓는 게 아니겠습니까. 연유를 물었더니 죽은 김평산이 은밀히 구해 달라는 약인데 그 자가 죽었으니 필요없게 됐다는 겁니다."

송화가 올린 약첩을 받으며 정약용이 되물었다.

"죽은 자의 누이와 연결되는 끈은 없더냐?"
"없었습니다."

다시 검시기록으로 시선을 돌리며 문득 김관주에게 물었다.

"이두용의 배 다른 누인 어떤 사람입니까? 죽은 자의 친족관계도 명확치 않은데다···, 관아엔 얼굴 한번 내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병고로 고생한다 해도 이두용과 이복남매가 아닙니까. 더구나 굴러온 돌이니 관아에 참여해야 옳은 일이지요."

"사람을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집에 찾아갔을 때도 얼굴을 내밀지 않고 아랫것들을 시켜 말만 전했습니다. 중한 병이 몸에 침범했으니 손님맞일 못한다고 해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송화에게 시선을 향한 채 약첩에 대해 물었다.

"약첩은 알아봤느냐?"
"의원에게 물었더니 고삼원(苦蔘元)이라 했습니다."

김관주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형방에게 가져오게 해 고삼원의 쓰임새를 알아봤다. 여기엔 창(瘡)에 쓰이는 약재라 했는데 가장 악독한 창에 쓰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천포창(天泡瘡) · 양매창(楊梅瘡) · 음창(淫瘡) 등에 사용되는 약재였다.

<향약구급방>에 나온 이런 병들은 매독과 같은 일종의 성병이다. 병을 설명하는 과정에 '구료막(救療幕)을 설치하고 바닷물에 목욕했다'는 부분이 있다는 것으로 봐 단순한 성병이 아니었다. 김관주는 그 점을 지적했다.

"양매창이니 음창이니 하는 건 악성 매독으로 살이 썩어가는 성병입니다. 이중 천포창은 나병(癩病)인 문둥병이고요. 하늘이 내린 천형이라 가족 중 누군가가 이 병에 걸리면 밖으로 알려질까봐 예로부터 입단속을 했습니다."

비로소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삼국유사>나 <고려사> <향약집성방>엔 '나병'이라는 병명이 없다. <세종실록>엔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구료막을 설치해 바닷물에 목욕을 시켰다는 부분이 있었다.

광해군 때엔 경상 · 강원 · 충청도 환자들을 남녀별로 수용해 치료시켰는데, 도사(都事)로 하여금 각 지방을 순시케 하여 환자의 상황을 등록시키되 이를 태만히 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기록이 있었다. 이러한 문둥병자들은 미신적인 속설을 신봉해 인육을 복용하거나 사람의 장기를 약재로 사용했다고 적혀 있었다.

관병을 파견해 유기장이 최가를 잡아들이자 그는 선선히 김평산과의 거래를 털어놓았다.

"김가 놈은 세상이 알다시피 인육을 뒤집어쓴 파렴치한 짐승입니다. 세 해 전, 그 자와 술을 마시다 우연히 세상을 떠난 이두용의 이복누이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서른이 다 되도록 문밖 출입을 않은 탓에 이런 저런 소문은 꼬리를 물고 떠다녔는데, 소문 중에 눈이 한쪽 밖에 없다느니 곰보라느니···, 시러배 건달들의 술안주 감으론 적격이었지요. 이런 저런 말이 오가는 중에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어요. 이두용의 배다른 누이는 고것이 둘이라고요."

"고것이 ··· , 둘이라니?"

[주]
∎고삼원(苦參元) ; 문둥병의 치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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