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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울고 소리지르고...그게 산재였던 거다"

[참 좋은, 노동자①] 정신질환도 업무상 재해라고 알린 청구성심병원 노조

등록|2010.05.17 11:59 수정|2010.05.17 13:48
2010년 4월 8일, 언론이 주목하진 않았지만 의미 있는 산재 승인이 있었다. KT(옛 한국통신)의 감시와 차별로 스트레스를 받아 발생한 박아무개씨의 정신질환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은 것이다. 박씨는 2004년에도 비슷한 이유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은 바 있다. (KT 관련 기사 읽으러 가기)

사업장 이름만 바꾸면 우리는 시간차만 있을 뿐 똑같은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청구성심병원이다. 청구성심병원은 1998년부터 노동자 탄압으로 유명세를 탔다. 2003년 7월 그 사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9명은 회사의 노조 탄압과 조합원 차별로 '우울과 불안을 동반한 적응 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며 집단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대한민국에 산재보험 제도가 운영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탄압과 차별로 고통 받은 노동자에 앞서 '최초 정신질환 집단 산재신청과 전원 승인(1명은 개인사정으로 신청 철회)'으로 기억되는 그들이 있었기에 한국 사회에 정신질환도 업무상 재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 노조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똥물 투척, 식칼테러, 폭력, 폭언, 감시, 차별을 받아온 청구성심병원 노동자. 2003년 8명이 산재를 인정받고 5년 뒤 같은 이유로 3명의 조합원이 산재를 신청할 정도로 청구성심병원의 노조관은 변하지 않았다. 

탄압과 차별이라는 청구성심병원 노동조합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지금은 분회장으로 활동하는 공공노조 의료연대 서울지역지부 청구성심병원분회 권기한 분회장을 만나 2003년과 2008년 집단 산재신청 의미를 되새겨봤다.  

"병원만 보면 울렁거려... 18명 중 11명이 우울증"

▲ 청구성심병원노조 권기한 분회장. ⓒ 이현정


- 예나 지금이나 정신질환은 금기시하는 게 사회 분위기다. 2003년은 지금보다 더 그랬을 것 같은데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신질환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병원이 (조합원을) 너무 괴롭혔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식욕도 없고 만날 몸싸움하고…. 병원을 쳐다보기도 싫고 보면 가슴이 울렁거렸다. 말도 조리 있게 하지 못하고, 우리끼리 툭하면 싸우고 울고. 이제는 열사가 된 이정미 전 지부장이 다른 간부들도 유형이 비슷한 걸 눈치 채고 휴직한 조합원 두 명 빼고 18명을 조사했다.

검사해보니 11명이 우울증 진단이 나와 (문제가) 조금 심각하게 됐던 거다. 이정미 전 지부장은 물론이고 간부들이 고민을 많이 했다. 세상에 알려지는 게 사실 두려웠다. 가족들 보기도 굉장히 민망하고. 그런데, 누군가는 또 그 자리에 있을 텐데 내가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텐데,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는데, 그 생각을 하고 오래 고민 안 했던 것 같다. '동지가 하니까 한다'는 분위기도 있었다. 공단이 집단으로 (산재신청) 하는 건 인정을 안 해줘 무작정 싸웠다. 내가 이렇게 아프고 삶의 기력조차 없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데, 그게 일하면서 생긴 병인데… (침묵) 100일 넘게 싸웠다, 다 같이. 그때 도와줬던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 당시 근로복지공단 분위기는 어땠나?
"2003년에 억지로, 억지로 노동자 측 위원이 (자문의사협의회에) 들어가서 얘기했다. 자문의사협의회가 판단을 잘 못하더라. 의사들이 정말 진료해보면 상황이 달랐을 텐데, 그냥 서류만 보고 판단했다. 나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결정) 내리더라. 그것도 맞지만 주요 질환은 누적된 우울증이었다. 더 심한 것은 자문의사협의회가 아무 생각 없이 서류상으로만 판단하는 게 문제였다. 질문도 기본만 하는데, 그때 우리 측 자문의원이 안 들어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정말 힘없고 아무 연고 없는 노동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왔을 거라 느꼈다. 그리고 지사장이 법이었다. 지사장이 다 할 수 있었다.

2008년에는 '2003년에 산재판정을 한 건 정신과의사들의 오류였다', 이렇게 얘기하더라. 집단으로 (산재신청을) 제기하는 것은 사회문제가 되니까 집단으로 하면 안 해준다는 얘기도 했다. 지금은 혼자 해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공단이나 노동부나 입장은 똑같은 것 같다. 노동자들 편에 서지 않고 막을 궁리와 함께 사용자 버팀막 노릇을 하는 게 노동부 같다." 

▲ 2003년 7월 노조, 안전보건단체, 인권단체, 보건의료단체 등이 꾸린 공동대책위원회는 청구성심병원 노동자의 산재인정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청구성심병원노조 홈페이지


"노노 싸움 만들어질 때 가장 힘들어"

권기한 분회장은 대화 도중 종종 침묵했다. 기억 저편에 묻었을 과거를 말할 때, 이정미 전 지부장을 이야기할 때, 지금은 청구성심병원에 없는 동지들 소식을 전할 때 그랬다. 침묵은 날마다 전쟁터였을 지난 12년의 투쟁 현장을 지킨 그가 삼키는 상처였다.

폭언, 폭행, 업무과중, 부서 내 회식 배제, 사소한 실수에 경고 남발, 승진 탈락, 잦은 부서이동, CCTV 감시, 조퇴와 외출 엄격히 제한 등 나열하기도 벅찬 노조와 조합원 탄압을 견디는 것보다 권 분회장을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다른 일이었다. 노노 싸움, 함께 싸웠던 이의 자살 시도, 힘들 때 의지했던 지부장의 사망까지 동지와 아픔을 같이 나누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매번 투쟁에서 관리자들은 서서 말만 할 뿐이다. 그 앞에서 몸싸움하는 사람들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라며 (사측이) 노노 싸움을 만드는 게 가장 힘들고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도 병원 내에서 조직활동을 할 때 못되게 구는 비조합원이 있다며 우리끼리 싸우는 것 같아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아픈 몸을 돌보지도 않고 투쟁만 했던 이정미 전 지부장의 사망, 이○○ 전 지부장의 자살 기도 때에도 참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권 분회장은 쓰러지고 아픈 동지들 옆에서 왜 조금이라도 돕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며 다시 짧은 침묵에 빠졌다.

이정미 열사 관련 기사 보러 가기
이○○  전 지부장 관련 기사 보러 가기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기록한 청구성심병원 노동자 정신질환
청구성심병원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가 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이 노동자는 심한 요통으로 방문했지만 요통보다는 불안해하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지 못하며 공포를 느끼는 행동을 보여 정신과 의뢰를 통해 적응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 노동자로 인해 청구성심병원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다. 청구성심병원은 1998년부터 노사 갈등이 심했던 사업장으로 알려졌다. 사용자측은 노조 조합원들에게 직접 폭언과 폭력은 물론이고 감시, 승진 차별, 차별적인 업무 과부하, 회식에 끼워주지 않기, 인사해도 받지 않기와 같은 대화 배제와 단절, 부서 내 '왕따' 유도 등 일상적으로 끊임없이 스트레스와 압력을 드러내놓고 행사해왔다. 일상 업무와 활동 속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인권침해 속에서 거의 모든 조합원이 초조, 분노, 공포, 우울, 가슴 답답함이나 두근거림, 소화불량, 변비, 어깨 결림, 두통 또는 불면 등의 증세에 시달렸다. 

조합원 10명의 정신과의사 검진에서 '우울과 불안을 동반한 적응 장애'와 '전환 장애', '수면 장애'라는 질환을 진단받았다. 발생 원인은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근무조건과 근무환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고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노조와 안전보건단체, 보건의료단체, 인권운동단체, 법률지원단체, 지역활동단체로 구성된 '청구성심병원노동자 집단산재인정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연구소 임상혁 소장이 집행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활동 결과로 정신질환 노동자 전원이 산업재해로 인정되었다. 사업장은 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이 실시되어 사업주 처벌이 이뤄졌다. 청구성심병원 문제 해결은 서비스노동자의 정신건강문제가 조명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업무상 질병에 정신질환이 포함된다는 성과를 올렸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10년사, 산업의학실, 176쪽)

▲ 청구성심병원의 노조탄압은 1998년부터 유명했지만 노동부의 관리감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 청구성심병원노조


사업장 관리감독 제대로 못한 노동부 책임 커

- 2008년에 2003과 같은 이유로 산재신청을 했다.
"수간호사 2명과 간호사 1명이었다. 자살기도를 했던 이○○ 전 지부장도 했다. 이○○ 전 지부장은 2003년에 산재승인을 받았던 분인데, 2007년 임신부 시절 지금 병원장으로부터 '배를 쑤셔버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 지부장은 승인됐다. 수간호사 2명과 간호사 1명은 계속해서 퇴사 압력을 받고 회의에서 배제되고 감시받고 인력 충원도 못 받았다. 보니까 2003년 우리에게 있었던 증상과 비슷했다. 잠도 못 자고 분노하고 식욕도 없고 화는 나는데 일은 해야겠고. 일 나오면 스트레스 받고, 부서배치 돼서 힘들고. 그래서 검사를 하니까 진단이 나오더라.

그런데, 2008년 들어서 분위기가 완전 달라졌다. 사례나 유형이 2003년과 거의 다르지 않았는데 불승인됐다. 근로복지공단도 사례가 비슷하니까 될 거라고 했는데 뒤통수 맞은 거 같았다. 행정소송 가려고 했다가 본인들이 힘들어해 가지 않았다. (행정소송은) 포기했지만 서울지역지부에서 치료는 노동조합이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 특별판매로 치료비를 마련해 2009년 2월부터 지금까지 집단 상담을 하고 있다. 집단상담은 노조간부들도 함께 한다. 지금 간부들도 스트레스 많이 받고 2003년에 산재를 당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해서다."

- 청구성심병원 노동자의 정신질환 산재인정 싸움은 이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집단 정신질환 산재신청, 서비스노동자 감정노동 문제를 사회에 드러내는 계기였다. 당사자로서 보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전화로 상담하는 사람들이 다 감정노동을 하는 노동자라는 걸 몰랐다. (나도) 귀찮은 거 있으면 큰소리 내고 말이 길어지면 욕도 하고 그랬다. 치료 중이던 2004년인가, 감정노동이 부각돼서 전화 응대하는 분의 굉장히 많은 수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나도 가해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그분들이 아플 때 손가락질하기보다는 사회가 돌봐야 하는데, 정신병자니까 제가 미쳤으니까 식으로 개인 탓을 하는 게 제일 문제다. 무엇보다 노동부가 (사업장을) 제대로 관리감독만 하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노동부가 조금만이라도 신경 썼으면 이런 상황은 안 왔을 것이다. 산업안전 인식이나 상식을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로 인식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노조가 이런 얘기하면 '꿈같은 소리 하네' 이런다." 

- 힘든 과정이었지만 보람도 있을 것 같은데….
"보람은…, 별로 없다. 아픈 과거가 너무 많아서. (웃음) 기륭전자, 재능학습지 투쟁 지원했을 때다. (지역에서) 벼룩시장 다섯 번 해서 비정규직 투쟁에 전액 다 지원하고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돌아보니 사람들도 많이 좋아하고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아 보람이다." 

▲ 2003년 집단 산재신청과 승인에 이어 2008년에도 안전보건, 시민사회단체들은 청구성심병원의 인권침해 진상을 조사해 발표했다. ⓒ 인권단체 연석회의


평범한 삶 사는 동지 보며 "싸우길 잘 했어" 

청구성심병원에 노조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렇지만 어렵다. 2008년 11월, 병원 측과 노조를 인정하고 탄압하지 않는다는 합의도 했지만 조합원은 계속 줄었다. 병원에선 이사장의 친정체제가 구축됐다. 권기한 분회장은 "2008년, 2009년 상황이 많이 변했지만 과거처럼 노조를 대하는 태도는 어느 순간 다시 바뀔 것"이라고 했다. 승진차별, 남녀차별, 조합원과 비조합원 차별, 부서배치 차별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단다.

- 상상 이상의 일들을 겪었으면서도 노조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긴 생각에 잠기다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시간마다 포기하려고 했다. 이정미 열사는 직접 일자리를 구해주기도 했고 선배 심지어는 후배들이 자리가 있으니까 오라고도 했다. 그런데 동지들이 거기서 싸우고 있는데 나온다는 게 너무 힘들더라. 그때 포기했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 많이 한다. (침묵) 가족보다 더 많이 생활했던 동지들을 서로 믿고 의지하는 걸 10년 이상 했다. 아무도 없을 때 다 스스로 찾아와서 뭐 하면 좋을까 했던 비대위들, 그 간부들이 있어서 힘들지 않았다. 간부들이 아이 낳고 다른 사람처럼 생활하는 거 보면 싸우길 잘 했다 싶다. 또… 아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운동은 평생 하는 거다, 지금 내가 청구에서 발 뺀다고 해서 운동 안 하는 게 아니다, 자기도 같이 하는 거다, 혼자 하는 거 아니라고 했다. 울어도 아내 앞에서 울었다. 그래서 견디었던 거 같다. 그리고 도와준 분이 너무 많다. 임상혁 선생님, 배기영 선생님, 지금 집단상담 치료해 주시는 분도 평생 잊지 못할 분이다."

2003년, 2008년 산재인정을 받았던 노동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대부분 그 당시 병원을 그만뒀지만 권기한 분회장, 김미연 부분회장, 임○○ 수간호사와 산재로 휴직 중인 김○○ 조합원은 청구성심병원에 남았다. 자살 기도를 했던 이○○ 전 지부장은 양호교사를 준비하며 새 삶을 꾸리고 있다. 치과에서 '왕따'를 당했던 조합원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 신규 발령이 나자마자 노조에 가입해 격렬하게 싸웠던 이○○ 간호사도 다른 병원에서 일한다. 김○○ 조합원은 일을 그만뒀다. 권 분회장이 연락을 꾸준하게 하면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 권기한 분회장은 지역에서 노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가고 있다. ⓒ 이현정


지역에서 노조 역할 찾는다

2010년 4월 28일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국제 노동단체들은 '노조가 작업장을 안전하게 만든다'는 구호를 정했다. 노조가 있는 곳의 노동자가 그렇지 않은 곳보다 더 안전하고 건강하기 때문이다. 산재왕국이면서 노조 혐오증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에서 의미를 더하는 이 말은 청구성심병원노동조합의 정신질환 산재승인 투쟁에서도 엿볼 수 있다. 힘들고 지난한 싸움이었지만 산재를 인정받고 처우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었던 것은 노조가 있고 노조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기한 분회장은 요즘 지역지부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노조가 별로 없는 은평구 특성 때문에 회의 참여도 많고 지역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고민도 많다. "예전에 싸울 때 비하면 지금의 노동강도는 반 정도"라며 지역에서 노조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는 요즘이 재밌고 설레기도 한다며 착한 사람 웃음을 보이는 권기한 분회장. 청구성심병원노조 분회장으로는 오랜 싸움에 지친 간부나 조합원은 물론 비조합원에게도 노조가 즐겁게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싶어 했다. 노조활동에서 또 어떤 상처를 입을지 예상할 수 없지만 그가 사람 좋은 웃음 잃지 않고 건강하면 좋겠다.

▲ 2003년 집단 산재신청 이후 승인 투쟁을 벌이는 청구성심병원노조와 연대단체들. ⓒ 청구성심병원노조

최경숙 센터장은 2003년 당시 보건노조 조직2국장으로 청구성심병원 노조 싸움에 함께했던 이다. 최경숙 센터장에게 2003년 청구성심병원 노동자 산재인정을 위해 꾸려졌던 '청구성심병원노동자 집단산재 인정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활동을 물어봤다.

- 2003년 당시 많은 연대가 있었던 걸로 안다.
"인권의 문제로 봤기 때문에 시민단체, 보건노조, 건강권 단체 사이에 공감대가 금방 형성됐다. 공동대책위원회가 역할을 많이 했다. 사실 (청구성심병원) 노조는 산재 중에서도 정신질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상황이었다. 보건의료단체나 건강권 단체가 나서서 인권의 문제로 하자고 해서 시작됐다."

- 공대위는 어떤 역할을 했나?
"공대위가 역할을 많이 했다. 정신질환 산재 근거나 산재 진행을 위한 전문가 역할 뿐만 아니라 여론형성을 위한 기자회견, 면담, 집회까지 같이 했다. 공대위 활동에서 역할을 많이 한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노동건강연대, 노동조합, 보건의료단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도 정신질환과 업무연관성을 밝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당시 인의협 공동대표였던 배기영 선생은 상담도 해주고 산재판정 할 때 직접 자문의사협의회에도 들어갔다. 자문의사협의회가 끝날 때까지 있었고 산재 신청한 조합원과 같이 평가도 하고 대책도 세웠다. 공대위가 노조에서 알아서 할 일이 아니라 자기 일로 받아서 모든 일을 같이했다. 기억해보면 건강권 운동 단체나 법률, 전문가, 시민단체들이 하나가 돼서 청구 노조가 열심히 한 것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굉장히 잘했다. 노조가 힘들어할 때 공대위가 선도해 나가는 것도 있었다."

청구성심병원은 중소영세노동자 문제

- 청구성심병원의 노조 탄압이 정말 심했다.
"중소병원 노조 중 민주노조가 있는 곳으로 거의 유일하게 청구만 남아 있었다. 다른 곳은 노조가 없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는데 청구성심병원만 노조가 있어서 힘들다, 그래서 남아 있는 민주노조를 없애겠다는 집착이 (사측에) 있었다. 왕따라는 게 몇 달만 그래도 굉장히 힘든 건데 간부들이 끝까지 민주노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의지로 버텨온 것이다. 그러다가 집단으로 정신질환 진단까지 온 것이고."

- 청구성심병원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청구는) 중소병원 싸움에서 가장 핵심이고 상징이 된 싸움이었고 그 속에 건강권 문제도 연결된 것이었다. 이 문제는 중소영세병원 노동자들의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대학병원도 힘들다. (웃음) 안 힘든 곳이 없지만 중소병원은 노조 자체가 싫다는 노조혐오증이 뿌리가 박힌 것이다. 이게 바뀌려면 중소영세노동자들이 좀 더 조직되고 권리가 확대돼 사회 인식, 특히 병원 노사관계가 변하는 게 필요하다. 남아 있는 조합원들이 힘들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대단하다. 청구는 노조를 잘 보전하는 측면뿐만 아니라 지역 영세중소병원이 어떻게 서로 엄호하고 힘을 받고 갈 거냐가 노조의 과제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일과건강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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