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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날고기 먹는 여자야

어느 육식녀의 '肉'쾌한 육회 체험기

등록|2010.05.21 09:59 수정|2010.05.21 09:59
이제 별 원고 청탁이 다 들어온다. 소똥 한번 잘못 먹었더니 이번엔 육회를 먹어보란다. 요즘 부쩍 싸고 맛좋은 육회집이 늘었다면서. 이러다 여자이길 포기한 '육식녀'가 돼 시집도 못 가보고 죽는 것은 아닌가, 살짝 걱정이 돼 청탁을 정중히 거절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내 머릿속은 '어느 식당이 좋을까', '아무래도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좋겠지?', '소주 한 잔 곁들이면 딱 좋겠는데?'라는 생각들이 떠오르며 성큼성큼 육회집을 찾아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육회, 그걸 어떻게? 소똥도 먹었는데 뭘

▲ 빨간 고깃덩어리 위에 살아 꿈틀대는 산낙지들 ⓒ 박진희


몇몇 기사를 보니 육회 대중화가 이뤄진 듯한 요즘, 지금까지 육회를 먹어본 적이 없다. 30년 살면서 한 번쯤 먹어 볼 법도 한데 나는 왜 그간 못 먹었던 걸까 생각해 보았다. 답은 쉽게 나왔다. 내 주위에 '육회'를 즐겨 먹는 지인들이 없기 때문이었다.

'육회'보다 차라리 '개고기'를 택하겠다는 지인들. 이유는 단 하나, 육회는 '날 것'이기 때문이다. 짐승도 아니고, 정육점에 걸려 있는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채 썰어 먹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인간적인 느낌이 든다나 뭐라나.

언젠가 MBC <100분 토론>에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두고 팽팽한 찬반 토론이 펼쳐졌던 기억이 난다. 광우병 소고기니 뭐니 하면서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전화 연결을 한 시민이(물론 그분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 찬성자였다) 이런 말을 했었다.

"그거 끓여 먹으면 되잖아요."

<100분 토론>사회자인 손석희 아저씨도 할 말을 잃게 만든 그 사건을 2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잊을 수 없다. 100℃씨에서 10시간을 우려내도 광우병 소는 광우병 소인데(하물며 나 역시도 기막혀 하긴 했지만) 익히지 않고 날 것으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께름칙한 일로 생각되는 것 같다. 아프리카에서 소똥이 가득 든 막창구이를 먹은 나 역시도 '이건 불에 구웠으니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 말이다.

붉은 생고기 위에 산낙지가 '꿈틀꿈틀' 

▲ 젓가락과 육고기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 산낙지의 힘 ⓒ 박진희


그래도 어쩌랴. 약속한 원고는 써야 했다. 육회집을 혼자 갈 수는 없으니, 같이 갈 친구를 물색했다. 웬만큼 비위 좋은 사람이 아니면 날고기 먹는 여자와 함께 갈 남자는 없을 것 같고, 동성 친구 중에서 찾아야 했다.

그렇다. 그녀다. 언젠가 결혼식 뷔페식당 안에서 그녀의 접시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각종 고기와 '날 것'들이 즐비하게 담긴 접시를 보며 뭔가 사람이 먹는 음식이 담긴 밥그릇이라기보다는, 집짐승의 밥그릇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던 그녀의 접시. 그런 그녀와 함께 종로에 있는 육회집을 찾았다.

'한우가 아니면 소 열 마리로 돌려주겠다'는 강한 자부심을 드러낸 현수막이 걸린 육회전문점으로 들어간 시간은 이른 저녁 무렵이었다. 예상 외로 식당 안엔 손님들이 많았다. 육회전문점 안에는 모두 남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살짝 민망했다. 여자 둘이 복분자에 육회를 주문하려니 '짐승 같다'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살포시 붉은 육회 위에 산낙지가 올려진 '산낙육회'를 주문했다. 산낙육회, 그게 더 짐승 같나? 아무튼 둘이 충분히 먹을 정도의 양이 3만원이다(아흑, 좀 비싸다).

주문하고 오래 걸릴 것도 없이 산낙육회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산 채로 내기만 하면 되니까. '탕탕탕' 낙지 몸뚱이를 내리치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도마 위에 얹어진 붉은 고기가 우리 식탁 앞에 나왔다.

난생 처음 온 티를 팍팍 내며 어떻게 먹는지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요기 요 치즈 위에 고기 얹어 먹어도 되고예."
"양념장 섞어서 산낙지랑 같이 묻혀서 먹어도 되예."

사지가 잘려나간 하얀 낙지 몸통들이 고기 위에 엎드려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요리라기보다는 이제 요리를 해야 하는 준비재료 같아서 사실 난 젓가락질을 아주 살짝 망설였다. 

함께 간 친구는 씹기 불편한 낙지들을 슥슥 걷어내고는, 시뻘건 고기를 누가 더 많이 먹나 내기 하나 싶을 정도로 도전적으로 젓가락을 올려 육회 한 움큼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땅콩가루와 매실액, 그리고 매운 양념장을 섞은 드레싱에 육회를 푹 담가 먹으니 살맛이 난다"며 흥을 못이기고 몸부림을 쳐댄다.

난생 처음 맛 본 육회, 이게 바로 사는 맛

▲ 징그러워 할 새도 없이 사라진 육회 ⓒ 박진희


기사 한번 쓰려다 '날 것' 잘못 먹고 황천길로 가는 건 아니겠지?' 여전히 미심쩍은 생각으로 친구가 두어 번 육회를 입으로 가져가는 걸 확인하고 있던 나는 "살맛난다"는 표현에 아직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낙지 하나와 소고기 하나를 집어 치즈에 돌돌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아… 살살 녹더라. 그 다음부터는 날고기가 입으로 '술술' 들어가더라. 친구 말마따나 맛있으니까 정말 살맛나더라. 치즈에다 말고, 양념장에도 찍고, 날계란 노른자를 풀어서 찍어 먹기도 하고. 먹는 방식이 좀 더 다양해진다면, 아니 야채가 듬뿍 섞인 육회 비빔밥이라던지 여러 가지 양념장이 만들어지면 찾는 이들이 많아지리라. 이미 다양해진 육회 요리를 아는 사람이 늘어가면 육회도 여자들에게 초밥이나 생선회처럼 순식간에 인기 종목으로 급부상하겠단 생각도 들었다.

여자 둘이 시켜놓은 산낙육회는 어느새 바닥을 보였고, 어쩐지 육회 색깔과 잘 어울리는 복분자 한 병도 금세 동이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벌써 소주 서너 병을 해치운 테이블도 제법 보였다. 밥과 함께 회를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안주로 최고의 요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돌아가는 세상이야기와 함께 씹는 육회의 맛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맛있는 '위로'구나 생각했다. 잠깐 앞 테이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여자 둘이 육회를 먹으러온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 너도 세상 살 맛 좀 느껴봐야 되지 않겠냐" 하는 응원의 눈빛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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