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 사내구실 하는 것도 있고, 또 계집구실도 하고 ···."
"본론만 간략히 말해라!"
김관주가 다그쳤을 때야 최가의 얘긴 건조해졌다.
"그래서 죽은 김평산이 그 집을 쳐들어가 확인해 보기로 한 겁니다. 놈은 야밤에 월장해 칼을 들이댔어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토막 내버리겠다고요. 불을 밝히지 않은 방이었지만 여자는 망사를 쓴 얼굴로 묻더랍니다. 원하는 대로 할 터이니 자신의 말부터 들으랍니다. 김가는 안심하고 그 여자의 말을 들었는데, 일절 상대의 몸을 만지지 말고 통음(通淫)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리하자면 일종의 <후배위> 체위로 '개가 흘레붙듯'해야 했지만 김가는 개의치 않고 뜻을 이뤘답니다. 소신이 아는 건 이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고삼원을 지니고 있었느냐?"
"고삼원이라니오?"
"약재말이다!"
"이건 금산의 어느 의원에게 받아온 겁니다. 제가 유기(鍮器)를 가지고 조선 팔도를 떠돌기에 금산을 지나면 그 약재를 의원에게 보이고 구해 달라 해 가져온 것입니다만, 김가가 비명에 죽었으니 괜한 헛수고를 했지 뭡니까. 한데, 고삼원은 무엇에 쓰는 약잽니까?"
"그건 알 것 없다. 돌아가거라!"
최가가 돌아간 후 김관주는 사건을 정리해 봤다. 고삼원이 문둥병 치료약이라는 데 이상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김관주는 나름대로 사건을 정리하는 눈치였지만 정약용의 뇌리엔 자꾸만 이두용의 배다른 누이가 어른거렸다. 일단 그녀를 만나보는 게 급선무일 것 같아 집을 찾아갔으나 생각했던 것처럼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디서 데려 왔는지 듬직한 체격의 사내가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께서 만나지 않겠답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그럼 이 말은 전하게. 고삼원을 어찌 처리해야 좋은질!"
"뭐라고요?"
"너는 알 것 없으니 말만 전하라!"
사내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야 나타나 다소 수그러진 낯으로 정약용을 안내했다. 들었던 대로 방안엔 휘장이 쳐 있고 소리는 안쪽에서 들려왔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추락사한 김평산이 사람을 시켜 구해 온 고삼원은 아가씨께서 원하는 물건이었지요?"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아닙니까?"
"제가 원하는 물건이지만 그걸 구해 달라 청하진 않았습니다. 알고 오신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운수 기박해 천형(天刑)을 달고 태어났습니다만, 좋은 분을 만나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어려울 땐 모르다가도 몸이 편해지자 마음자리에 병이 생겼습니다. 이 집 모든 재산을 빼돌릴 궁리를 한 거지요. 그러던 차에 김평산이란 건달이 월장해 방에 들어와 겁간하려 하자 나 스스로 몸을 맡기고 흥정 했답니다. 금산 땅에 이름난 의원에게 가면 고삼원(苦蔘元)이란 약을 구할 수 있으니 구해 달라구요. 약의 진위를 알려면 관악산 등성이에 문둥병자가 있다하니 그들을 찾아가 먼저 시험해 보라는 말도 해주었지요."
정약용이 불쑥 물었다.
"김평산이 움막 가까이 갔을 때 그대의 배다른 오라비를 만났습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을 말씀드리면 이두용은 저의 이복 오라비가 아닙니다. 우연히 저희가 사는 곳을 지나시다 독사에 물려 죽게 된 걸 저희 부모님이 살려준 것이지요. 그 무렵은 내 몸에 천형 증세가 나타나기 전이었으므로 부모님을 산중에 두고 전 이두용이란 분을 따라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허면, 이두용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문둥병자들은 ···."
"그분들은 제 부모님입니다."
" ···."
"우연한 일이겠지만 그곳에서 이집 어른이 살해당하고 모든 허물을 저의 부모님이 지셨으나 저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김평산은 제가 천형을 앓는다는 걸 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유와 협박으로 재산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집 재산은 한 푼도 남아있지 않은 빈껍데깁니다. 이집 어른은 당신의 아들을 관음사에 동자승으로 보내 세속의 쓸데없는 명리를 피하게 했습니다. 천형을 앓는 절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셨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어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벌을 받은 내가 죽는 건 아깝지 않으나 모든 재산이···."
그녀는 감정이 복받치는지 중간에 말이 끊어지더니 한참 후에야 다시 이어졌다.
"김평산이란 자가 가져간 집문서와 땅문서엔 특이한 문구가 써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재산은 마땅히 후손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사흘 후면 이 집도 비워줘야 하는데요. 내가 병을 고치려는 뜬생각만 아니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얘긴 잘 들었습니다. 지금 나라에서도 나병(癩病)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들이 팔을 걷고 나섰으니 힘들더라도 기다리시면 좋은 약이 나오리라 봅니다. 내 아가씨께 할 말이 있습니다. 이 집을 사흘 후 비워준다 했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만약 집문서를 들고 와 이행해 주길 청한다면 마땅히 관에 고변하라 하십시오. 그래줄 수 있겠습니까?"
"···예에."
그러나 사흘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 일찍 이두용의 아들과 비구니가 감영 뜨락에 나타나자 송장(訟狀)을 든 사내 셋이 당당히 들이닥쳤다. 그들은 김감사에게 자신들이 이두용의 재산을 취득하게 된 경위를 간단히 고하고 관병을 보내 천형을 앓는 계집을 산으로 쫓아버리라는 청을 넣었다. 정약용의 귓속말을 전해들은 김관주는 그들이 허공에 대고 흔들어대는 집문서와 땅문서를 형방에게 가져오게 했다.
"이 문서는 누구에게 받았는가?"
"물론 이두용입니다. 그 사람이 누이의 병 치료에 돈이 필요하다 해 이것들을 맡기고 돈을 가져갔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이상하잖은가. 어찌 문서에 모든 재산을 마땅히 후손에게 전한다고 써 있는가?"
"그 사람은 자식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서라는 건 받을 때 어떤 말이 쓰여졌는가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 아버지 이두용은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자신을 구해준 문둥병을 앓는 부부의 딸을 데려와 선친의 혈육이라 주변을 속이고 치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평산이란 자가 음심을 품고 월장한 후 그 집의 모든 재산을 빼돌려 투전과 주색으로 탕진한 건 동작부락 사람이면 아는 일이다. 나는 김평산의 죽음과 이두용의 살해 사건을 지휘 감독하는 관장으로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서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길 명한다."
갑작스런 명을 받은 세 사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손 안에 들어온 집문서와 땅 문서를 내어준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사또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나라 법이 지엄한 것을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허나,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누가 이두용의 혈육인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그 문서를 받을 때엔 이두용의 핏줄은 세상에 없다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음을 사또께서 저희에게 증명해 주시면 이의없이 명을 따르겠습니다."
느닷없는 반격에 김관주의 낯빛이 변했으나 정약용은 약간 상체를 숙인 채 웃는 낯으로 받아들였다.
"하긴 그렇다. 나라 법대로 하리라!"
곧 형방에게 준비시킨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 하나는 이두용이 비구니에게 보관을 시켰다는 목기(木器)였고, 다른 하나는 세 해 전 아내의 무덤을 열고 가져온 뼈가 담긴 유골함이었다. 유골함은 땅 속에 묻혔지만 옻칠이 잘 된 탓에 감영에서 겉을 닦아내자 손색없이 번들거렸다. 정약용은 그걸 단 위에 올려놓고 송화에게 꺼내게 했다. 어느 부분인지 알 수 없지만 뼈는 넓적한 부위였다.
"자, 여길 보시오. 본인의 손에 든 것은 제사 때 술잔을 얹어놓는 목기요. 그러고 보면 이것과 유골함은 모두 이두용이 남긴 것으로 일찍이 그는 이런 송사가 일어날 걸 예견했던 것 같소."
정약용은 먼저 목기에 대해 설명했다.
"이것은 제사를 지낼 때 술잔을 얹는 목기요. 그런데 이 목기의 중앙에 검은 점이 하나 찍혀 있소. 나를 비롯해 노량진 감영 사또는 이것이 오래돼 칠이 벗겨진 것으로만 생각했으나 그대들이 지닌 문서에 쓰인 내용을 볼 때 당연히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소. 그 결과 목기엔 틀림없이 점이 찍혀 있고, 그로 인해 하나의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오. 즉, 그릇 명(皿)에 점이 있으니 목기는 피(血)를 뜻하오. 그렇다면 왜 이두용은 피를 강조했을까. 이 점을 궁금히 여긴 나와 사또는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아냈소."
정약용은 문서를 지닌 자를 나오게 해 오른 손 검지를 찔러 몇 방울의 피를 뼛조각 위에 떨어뜨렸다. 핏방울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번에 아이를 나오게 해 검지를 찌른 후 피를 떨어뜨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핏방울은 순식간에 뼛속으로 흡수됐다. 그걸 보고 판정을 내렸다.
"우리 몸은 부모에게서 받았단 뜻으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했소. 모든 자식은 아버지가 남긴 몸뚱이며 낳은 자는 어머니라 했소. <세원록>의 험적골친법(驗滴骨親法)에 의하면 어떤 자의 해골이 있을 때 친생자를 확인하려면 해골 위에 당사자의 피를 떨어뜨려 친생자인 경우 피가 뼛속으로 스며든다 했으니 저 아인 분명 이두용의 친생자니, 그대들은 집과 땅 문서를 모두 돌려주기 바라오!"
[주]
∎통음(通淫) ; 성행위를 뜻함
"본론만 간략히 말해라!"
김관주가 다그쳤을 때야 최가의 얘긴 건조해졌다.
"그래서 죽은 김평산이 그 집을 쳐들어가 확인해 보기로 한 겁니다. 놈은 야밤에 월장해 칼을 들이댔어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토막 내버리겠다고요. 불을 밝히지 않은 방이었지만 여자는 망사를 쓴 얼굴로 묻더랍니다. 원하는 대로 할 터이니 자신의 말부터 들으랍니다. 김가는 안심하고 그 여자의 말을 들었는데, 일절 상대의 몸을 만지지 말고 통음(通淫)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리하자면 일종의 <후배위> 체위로 '개가 흘레붙듯'해야 했지만 김가는 개의치 않고 뜻을 이뤘답니다. 소신이 아는 건 이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고삼원을 지니고 있었느냐?"
"고삼원이라니오?"
"약재말이다!"
"이건 금산의 어느 의원에게 받아온 겁니다. 제가 유기(鍮器)를 가지고 조선 팔도를 떠돌기에 금산을 지나면 그 약재를 의원에게 보이고 구해 달라 해 가져온 것입니다만, 김가가 비명에 죽었으니 괜한 헛수고를 했지 뭡니까. 한데, 고삼원은 무엇에 쓰는 약잽니까?"
"그건 알 것 없다. 돌아가거라!"
최가가 돌아간 후 김관주는 사건을 정리해 봤다. 고삼원이 문둥병 치료약이라는 데 이상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김관주는 나름대로 사건을 정리하는 눈치였지만 정약용의 뇌리엔 자꾸만 이두용의 배다른 누이가 어른거렸다. 일단 그녀를 만나보는 게 급선무일 것 같아 집을 찾아갔으나 생각했던 것처럼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디서 데려 왔는지 듬직한 체격의 사내가 앞을 막아섰다.
"아가씨께서 만나지 않겠답니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그럼 이 말은 전하게. 고삼원을 어찌 처리해야 좋은질!"
"뭐라고요?"
"너는 알 것 없으니 말만 전하라!"
사내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만에야 나타나 다소 수그러진 낯으로 정약용을 안내했다. 들었던 대로 방안엔 휘장이 쳐 있고 소리는 안쪽에서 들려왔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추락사한 김평산이 사람을 시켜 구해 온 고삼원은 아가씨께서 원하는 물건이었지요?"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아닙니까?"
"제가 원하는 물건이지만 그걸 구해 달라 청하진 않았습니다. 알고 오신 것 같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운수 기박해 천형(天刑)을 달고 태어났습니다만, 좋은 분을 만나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어려울 땐 모르다가도 몸이 편해지자 마음자리에 병이 생겼습니다. 이 집 모든 재산을 빼돌릴 궁리를 한 거지요. 그러던 차에 김평산이란 건달이 월장해 방에 들어와 겁간하려 하자 나 스스로 몸을 맡기고 흥정 했답니다. 금산 땅에 이름난 의원에게 가면 고삼원(苦蔘元)이란 약을 구할 수 있으니 구해 달라구요. 약의 진위를 알려면 관악산 등성이에 문둥병자가 있다하니 그들을 찾아가 먼저 시험해 보라는 말도 해주었지요."
정약용이 불쑥 물었다.
"김평산이 움막 가까이 갔을 때 그대의 배다른 오라비를 만났습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을 말씀드리면 이두용은 저의 이복 오라비가 아닙니다. 우연히 저희가 사는 곳을 지나시다 독사에 물려 죽게 된 걸 저희 부모님이 살려준 것이지요. 그 무렵은 내 몸에 천형 증세가 나타나기 전이었으므로 부모님을 산중에 두고 전 이두용이란 분을 따라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허면, 이두용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문둥병자들은 ···."
"그분들은 제 부모님입니다."
" ···."
"우연한 일이겠지만 그곳에서 이집 어른이 살해당하고 모든 허물을 저의 부모님이 지셨으나 저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김평산은 제가 천형을 앓는다는 걸 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유와 협박으로 재산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집 재산은 한 푼도 남아있지 않은 빈껍데깁니다. 이집 어른은 당신의 아들을 관음사에 동자승으로 보내 세속의 쓸데없는 명리를 피하게 했습니다. 천형을 앓는 절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셨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어 가슴 아파 하셨습니다. 벌을 받은 내가 죽는 건 아깝지 않으나 모든 재산이···."
그녀는 감정이 복받치는지 중간에 말이 끊어지더니 한참 후에야 다시 이어졌다.
"김평산이란 자가 가져간 집문서와 땅문서엔 특이한 문구가 써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재산은 마땅히 후손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사흘 후면 이 집도 비워줘야 하는데요. 내가 병을 고치려는 뜬생각만 아니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얘긴 잘 들었습니다. 지금 나라에서도 나병(癩病)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들이 팔을 걷고 나섰으니 힘들더라도 기다리시면 좋은 약이 나오리라 봅니다. 내 아가씨께 할 말이 있습니다. 이 집을 사흘 후 비워준다 했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만약 집문서를 들고 와 이행해 주길 청한다면 마땅히 관에 고변하라 하십시오. 그래줄 수 있겠습니까?"
"···예에."
그러나 사흘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 일찍 이두용의 아들과 비구니가 감영 뜨락에 나타나자 송장(訟狀)을 든 사내 셋이 당당히 들이닥쳤다. 그들은 김감사에게 자신들이 이두용의 재산을 취득하게 된 경위를 간단히 고하고 관병을 보내 천형을 앓는 계집을 산으로 쫓아버리라는 청을 넣었다. 정약용의 귓속말을 전해들은 김관주는 그들이 허공에 대고 흔들어대는 집문서와 땅문서를 형방에게 가져오게 했다.
"이 문서는 누구에게 받았는가?"
"물론 이두용입니다. 그 사람이 누이의 병 치료에 돈이 필요하다 해 이것들을 맡기고 돈을 가져갔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이상하잖은가. 어찌 문서에 모든 재산을 마땅히 후손에게 전한다고 써 있는가?"
"그 사람은 자식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서라는 건 받을 때 어떤 말이 쓰여졌는가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 아버지 이두용은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자신을 구해준 문둥병을 앓는 부부의 딸을 데려와 선친의 혈육이라 주변을 속이고 치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평산이란 자가 음심을 품고 월장한 후 그 집의 모든 재산을 빼돌려 투전과 주색으로 탕진한 건 동작부락 사람이면 아는 일이다. 나는 김평산의 죽음과 이두용의 살해 사건을 지휘 감독하는 관장으로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서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길 명한다."
갑작스런 명을 받은 세 사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손 안에 들어온 집문서와 땅 문서를 내어준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사또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나라 법이 지엄한 것을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허나,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누가 이두용의 혈육인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그 문서를 받을 때엔 이두용의 핏줄은 세상에 없다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음을 사또께서 저희에게 증명해 주시면 이의없이 명을 따르겠습니다."
느닷없는 반격에 김관주의 낯빛이 변했으나 정약용은 약간 상체를 숙인 채 웃는 낯으로 받아들였다.
"하긴 그렇다. 나라 법대로 하리라!"
곧 형방에게 준비시킨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 하나는 이두용이 비구니에게 보관을 시켰다는 목기(木器)였고, 다른 하나는 세 해 전 아내의 무덤을 열고 가져온 뼈가 담긴 유골함이었다. 유골함은 땅 속에 묻혔지만 옻칠이 잘 된 탓에 감영에서 겉을 닦아내자 손색없이 번들거렸다. 정약용은 그걸 단 위에 올려놓고 송화에게 꺼내게 했다. 어느 부분인지 알 수 없지만 뼈는 넓적한 부위였다.
"자, 여길 보시오. 본인의 손에 든 것은 제사 때 술잔을 얹어놓는 목기요. 그러고 보면 이것과 유골함은 모두 이두용이 남긴 것으로 일찍이 그는 이런 송사가 일어날 걸 예견했던 것 같소."
정약용은 먼저 목기에 대해 설명했다.
"이것은 제사를 지낼 때 술잔을 얹는 목기요. 그런데 이 목기의 중앙에 검은 점이 하나 찍혀 있소. 나를 비롯해 노량진 감영 사또는 이것이 오래돼 칠이 벗겨진 것으로만 생각했으나 그대들이 지닌 문서에 쓰인 내용을 볼 때 당연히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됐소. 그 결과 목기엔 틀림없이 점이 찍혀 있고, 그로 인해 하나의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오. 즉, 그릇 명(皿)에 점이 있으니 목기는 피(血)를 뜻하오. 그렇다면 왜 이두용은 피를 강조했을까. 이 점을 궁금히 여긴 나와 사또는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아냈소."
정약용은 문서를 지닌 자를 나오게 해 오른 손 검지를 찔러 몇 방울의 피를 뼛조각 위에 떨어뜨렸다. 핏방울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번에 아이를 나오게 해 검지를 찌른 후 피를 떨어뜨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핏방울은 순식간에 뼛속으로 흡수됐다. 그걸 보고 판정을 내렸다.
"우리 몸은 부모에게서 받았단 뜻으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했소. 모든 자식은 아버지가 남긴 몸뚱이며 낳은 자는 어머니라 했소. <세원록>의 험적골친법(驗滴骨親法)에 의하면 어떤 자의 해골이 있을 때 친생자를 확인하려면 해골 위에 당사자의 피를 떨어뜨려 친생자인 경우 피가 뼛속으로 스며든다 했으니 저 아인 분명 이두용의 친생자니, 그대들은 집과 땅 문서를 모두 돌려주기 바라오!"
[주]
∎통음(通淫) ; 성행위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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