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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출가를 선언했습니다

보름 전 터져나온 충격 선언...은행 빚이 날 살렸습니다

등록|2010.05.21 16:35 수정|2010.05.21 19:42
지난해 가을, 직장에서 귀가한 처가 저를 굳이 방석 위에 앉히고,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와 양 무릎, 양 팔꿈치가 바닥에 닿는 오체투지의 큰 절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느닷없이 처의 절을 받은 저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오늘 강의는 부처님께 절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해왔던 절도 몰랐던 격식이 있더군요. 먼저 반배를 한 뒤 무릎을 굽히면서 합장했던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땅에 집어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몸을 엎드립니다. 그 상태에서 손을 뒤집어 부처님의 발을 받드는 것처럼 손끝이 위로 가도록 합니다. 또한 발은 왼발이 오른발의 위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일어설 때는 손을 뒤집어 바닥에 짚고 왼손을 앞가슴으로 가져가면서 합장하는 자세로 일어납니다. 마지막 절의 끝에 머리를 땅에 한 번 더 조아리는 고두례(叩頭禮)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예경 禮敬하는 마음을 마치게 되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 처는 여전히 불교 경전에 심취해있습니다. ⓒ 이안수




"아니 내게 절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절을 한  것이요?"

"아닙니다. 오늘 절하는 법을 연습하고 강의하신 스님께 이 오체투지의 절은 부처님께만 해야 되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절을 하는 뜻이 스스로를 낮추어 아만(我慢)하는 마음을 없애고 '몸·입·마음'의 세 가지 욕심으로 인해 짓는 죄업인 삼업(三業)을 끊기 위한 것이며 또한 '무명을 끊고 참성품을 공경한다(굴복무명 공경진성屈伏無明 恭敬眞性)'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공경하는 누구에게나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오체투지를 해도 되는지를 물었더니 화목까지 도모할 수 있으니 더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매일 절에 가서 부처님께 오체투지를 할 수 없으니 대신 당신께 하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뚜렷하게 한 종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학문하는 마음으로 모든 종교의 교리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장기간 해외여행 중에  주일이면, 예배 후 한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한인교회를 찾기도 했습니다. 장기간 타국음식만 먹다보면 쌀밥과 김치가 몹시 그립기 때문입니다.

처의 경우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불교에 관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더니 제대로 불교교리 공부를 해보겠다며 조계사의 기초교리강좌에 등록해서 다니게 되었습니다.

▲ 아내와 아내의 도반들 ⓒ 이안수




처가 불교교리를 공부하면서 제가 오체투지의 절을 받게 되니 저에게도 나쁘지 않은 공부 같았습니다. 처는 3개월간의 그 기초교리과정이 끝나자 불교대학에 입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는 난색을 보였습니다. 직장과 아이들의 서울집, 그리고 헤이리의 모티프원도 오가야하는 입장에서 장기간의 공부는 무리다, 싶었습니다. 저의 만류에 입학의사를 번복한 처는 대신 선방에 등록해서 참선공부를 몇 개월째 하고 있습니다.

▲ 참선중인 아내 ⓒ 이안수




예전과 달리 헤이리로 오지 못하는 날은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꼭 안부를 묻고, 저의 모든 결정과 행위에 칭찬과 긍정으로 반응하는 등 큰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처가 참선공부를 하는 것이 오체투지의 절을 받는 것 이상으로 제게도 득 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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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그런데 한 달 보름 전 아내는 제게 충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출가를 하고 싶습니다. 2주 전에 아는 스님께서 제가 수행을 하면 좋겠다는 제의를 하셨고, 저도 그 말에 솔깃해졌습니다. 나이 때문에 더 늦기 전에 단안을 내려야 합니다. 서울에서 아이들과는 상의를 했어요. 큰딸 나리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지만 이제 동생들이 다 컸으니 고려해 볼 수 있겠다'는 입장이고, 둘째딸 주리는 '엄마의 인생이니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고, 막내는 '그것은 가족이 해체되는 것과 다름없으니 안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당신과 상의해서 올해 말까지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처가 출가를 하겠다니, 저는 맑은 날씨에 벼락을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 선암사 성지순례길에서 ⓒ 이안수




다급해진 저는 별 구실을 다 끌어다댔습니다.

- 당신에게 출가를 종용한 그 스님이 분명 사이비 스님임이 틀림없소. 절이 어디 양로원이요? 나이 먹은 당신을 출가하라 하게…….
"아닙니다. 종단의 명망 있는 스님이에요."

-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게 분명해요. 절에 공양주가 필요하거나 아니면 당신을 돈 많은 보살로 잘못 알고 있는 게 확실합니다. 당신이 실상 돈이 없는 것을 뒤에 알면 당신은 산에서조차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거에요.
"그 스님이 비구니와 공양주를 혼동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한 돈은 필요없다고 했어요."

-그럼, 우리의 은행 빚은 어찌하면 좋겠소? 두 대학생의 등록금과 생활비는?"
"…."

아내는 빚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더 쐐기를 박았습니다.

"빚을 다 상환하고 출가를 하든지 아니면 출가 후 시주를 받아서 빚을 갚든지……. 나 혼자는 아이들을 졸업시키고 은행 빚까지 다 갚을 방법이 없소."

아내는 지금, 출가를 유보한 상태입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올해 중으로 은행 빚을 다 갚는다면 다시 잠복된 '출가'소리가 머리를 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내의 '출가'소리에 식겁한 저는 그동안 큰 스트레스였던 은행 빚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인 오늘 저의 처는 새벽 절로 떠났습니다.

▲ 사찰 나들이에서 처가 찍어온 작은 가람 ⓒ 이안수




저는 처가 '출가'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큰 가피(加被)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은행 빚만 없다면 아내를 출가시켜 예토(穢土)에서 정토(淨土)에 이르는 길을 탐구케하는 것이 저도 그 지름길을 얻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 보현사 법당 ⓒ 이안수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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