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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31)

분노와 거짓 사이

등록|2010.05.26 11:52 수정|2010.05.26 11:52
31. 분노와 거짓 사이

화석이 된 생명. ⓒ 일러스트 - 조을영

한숨 더 자고 오후가 되었을 무렵, 작업실에서 대충 샤워를 하고 학교를 향해 출발했다. 새벽 내내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은 덕분인지 코가 마비돼 버린 기분이었지만 그건 나쁘지 않은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단숨에 버스를 잡아타고 우선 조제의 가게로 한걸음에 내달려 가서는 밤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나도 방송봤어."

조제는 시큰둥하니 말하고는 곁에있던 주전자에서 차를 한잔 따라 주었다.

"그래?"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들떠서 말했는데 조금 실망이 몰려왔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뭘 할 참이야?"

조제는 훌훌 소리내어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남은 기간이라니...뭔 소리야?"
"이 딱한 화상아! 넌 그럼 평생 이 일에 엮여 있을 참이야? 이를테면 지금 이 상황이란 건 말이지, 방과 후에 집에서 하는 숙제나 같은 거라고. 백과 사전도 찾아보고 검색을 통해서 남들이 해 놓은 동일한 주제의 숙제도 슥 훑어보면서' 나는 이것 보다 더 잘해서 제출해야지' 하면서 욕심도 내보는 거라고! 언제까지 남의 숙제 구경이나 하고, 철 지난 노트 펴 놓고 시험 족보 만들고 있을 참이야?"

"그렇지만 이걸 다 이해해야만 그 다음 생각으로 연결되어져서 나만의 작품이 만들어질 수가 있다면,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건 네 방식이지. 그래 물론 너의 방식도 존중받을 필요가 있긴해. 원래 그래야 하는 게 교과서적이고 이치에 맞아. 어느 누구든 자신의 권리대로 자신의 영역을 메워나갈 자유는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게 살아갈 용기를 가진 자가 몇이나 될까? 내 눈에 이게 옳다고 여겨도 남이 '아니야! 그쪽으로 가는 사람이 드물잖아. 너도 우리 편에 붙어' 해버리면 게임은 끝이라고."

조제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열망사냥꾼에 물리고 난 뒤로 그녀는 이상과 꿈에 대해 어느 정도는 포기를 한듯이 보였다. 어느 정도는 거칠고 냉소적이지만 자신의 눈에 옳다고 여겨지면 밀어붙이는 사람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내게 현실 속으로, 그리고 다수가 많이 붙는 쪽으로 안전하게 걸어가라고 말한다.

"나 솔직히 하나씩 계단 밟듯이 조심조심 사는 거 이제 질려. 그 전엔 아무것도 몰랐기에 연극이라는 꿈을 향해서 내가 발돋움하면 그 빛나는 별의 끄트머리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초조해져만 가고 있다고. 내 나이 벌써 스물 넷인데 나는 지금 뭘하고 있는 거지? 예전의 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건 이젠 글렀어. 그렇다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겁이 난다고."

하루 사이에 조제에겐 심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은것 같았다. 내가 어제 밤을 기점으로 해서 모호한 안개의 광장을 걸어나왔다면,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집으로 조금씩 발을 내딛는 지친 나그네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젠 현실에 기대서 살아보겠단 거야?"

나는 찻잔을 딸깍 내려놓으며 가늘게 말했다.

"그런지도 모르지. 전엔 적어도 연극을 하는 이유가 있었지. 그 이유의 구석진 곳엔 좋아하는 남자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인 목표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콧방귀 밖에 안 나와. 그 자식말야. 이제 드라마로 제법 잘나가니까 CF에다 영화까지 완전 난리더라. 겨우 밥이나 안 굶고 살 만큼 연극이나 오랫동안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던 놈이 이젠 완전 가관이더라고!"

조제는 독기와 체념이 반씩 섞인 얼굴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리곤 차를 단숨에 꿀꺽 마시더니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말했다.

"두고 보라구! 그 자식은 지질이 궁상 밖에 안 됐기에 나한텐 해준 것도 없고 추억조차 없지만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이제 부터 좋은 추억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만들겠어."
"너 정말, 분노의 술을 몇 병씩 마시더니 슬슬 약효가 드러나나봐."

"그럴지도 모르지. 처음엔 완전 이 갈렸어! 그렇지만 그 독기가 서서히 나에 대한 굉장한 사랑으로 변하더라고. 사람의 감정이란게 참. 무슨 생물체 같더라니까. 그전엔 내가 내 마음을 잘 돌보지도 않았고, 그냥 남의 마음에 비치는 나 자신을 소중히 했거든. 그러다 보니까 상대도 괴롭히게 되고, 나도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까 편하질 않았거든. 한 마디로 몸뚱아리는 현재에 있는데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찾질 못하니까 늘 괴로운 거야. 하지만 지금은 좀 더 편안해졌다고나 할까? "

"그럼 이제 보카엔 안 갈거야?"
"가긴 갈거야. 하지만 나는 이미 내 마음의 자리를 찾았으니 보카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안할지도 몰라. 이미 내 마음 속에 모든게 다 들어차 있는 기분이니까 굳이 지금 현재를 벗어나서 애타게 갈망하고 싶지는 않단 거지. 소풍가서 자리 뺏기 게임을 할 때, 이미 의자 하나씩을 차지한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겠니? '아, 이런 이런 방법으로 하면 좀 더 빨리 내가 쉴 곳을 찾을 수가 있구나. 다음에는 보폭을 좀 더 빨리 해서 밀고 들어가서 그때도 의자 하나정도는 거뜬히 차지 해야지' 하면서 나름의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된다고. 그러면서 자신에 대해 더 내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것 아닐까? 그게 인생이 아닐까 싶어."

"그럼 난 아직은 보카에 열심히 드나들어야겠군. 내가 앉을 의자가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으려면..."
"그거야 너 마음 아니겠어? 너가 앉을 의자니까."

조제의 가게를 나와서 학교로 가는 동안 나는 줄곧 떠오른 것이 있었다. 틀에 묶인 입시미술의 스킬에서 벗어나서 창작의 길로 가라고 그 노교수가 이야기 했을 때, 나는 예술이란 것이 온갖 거짓말로 점철되어진 검은 악몽일 뿐이란 신념을 가졌었다.

거짓은 스물스물 벌레처럼 기어오른다. 그리고 때론 아주 힘들게 그 꽃을 피우며 결실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정점에서 그 모든 것은 분노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내면에 쌓여있던 분노가 폭발하여 쏟아져 내려서는 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나는 한 마디로, 점철된 과장과 그 안에서 쏟아지는 야수같은 감정의 폭발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하나의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고 결론지어 버렸다.

분노와 거짓-ART. ⓒ 일러스트 - 조을영

그리고 창작자만이 아는 순진한 고통의 순간인 붉은 분노와 돋보임과 허세인 검은 위선의 중간 지점에 발을 담근 상념들은 그렇지 못한 끄트머리에게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이봐, 너도 여기에 걸쳐 봐. 어서 와야지 뭐해?'라고 말하겠지. 그런데 나는 지금 그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거나 점검해 주지 않는 인생, 그리고 이젠 패턴 암기나 색깔 섞는 테크닉을 전수 받는 것이 아닌, 나만의 그림이고 나만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란 사실에 몸이 떨려온다. 그리고 그 일기장이나 보카에 대한 흥미는 빛나는 내 인생 창작품의 보이지 않는 선생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머리를 들어 보니 어느덧 전공실 입구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노교수는 '금일 개인 작업'이라는 문구를 써놓곤 나타나지도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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