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게 독서하기>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우리 사회의 소통에 진정 필요한 것은 똘레랑스 정신
▲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초판. ⓒ 김동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홍세화, 창작과 비평사, 1995)
"우리 사회의 소통에 진정 필요한 것은 똘레랑스 정신"
2008년~010년에 걸친 가장 큰 화두는 무엇일까? 누구나 공감하듯 바로 소통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각종 기획 글에 또는 고등학교부터 시작해 대학교 그리고 각 동네 단위마다의 대표자 선거에 등장했던 단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된다.
왜일까? 개인과 개인의 네트워크가 인터넷 공간 속에서 보다 견고한 형태로 자리 잡고 실시간 소통 수단이 발전하는데도 옆집 문을 두드려 이사 왔다고 얘기하기는 꺼린다. 여기나 저기나 소통은 되지 않고, 자기 목소리는 높이며 상대방에게 소통이 안 된다고 한다. 그건 차라리 욕에 가깝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씨를 초대하기 위해 한겨레신문사에 전화한 적이 있다. 혹시나 연락처라도 알 수 있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허사였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하루는 동덕여대 총학생회 간부에게 혹시 알아볼 수 있나 물어보니 바로 그 자리에서 답을 해주었다. 유명인사 개인정보 아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학교에서 치른 강의는 대만원이었고, 홍세화씨의 인기는 비로소 실감되었다.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학교에서 제적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대학생활의 궤적을 유추할 수 있지만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조직사건에 연루된 것은 정말 청년기를 각오했다는 것 일게다. 무역회사 입사 후 해외지사 파견을 나간 빠리에서의 시작은 그대로 망명객으로서의 시작이었다. 그땐 차라리 솔직했다. 비판이라는 의견은 명백히 탄압의 필요충분조건임을 군부정권은 보여주었다. 줄줄이도 붙잡혀갔다. 인혁당, 민청학련, 동백림을 엮음은 물론 재도 정치권 내부의 민주화 지도자 김대중, 김영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소통은 화두가 되지 못했다.
머나먼 이국땅 프랑스에서 오직 갈 수 없는 나라는 '꼬레'라는 사실 앞에서 절망했다. 친지들과의 생이별을 자신의 고국이 강요할 때마다 몸서리쳤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아니 절망은 삶을 지배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다양한 직업을 오가며 제목답게 그는 택시 운전을 하면서 프랑스 사회에 대한 통찰을 시작한다.
보통의 국가에서 정치적 망명은 집권세력의 변화가 있을 때 종료될 만큼 상대세력과의 상생은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증오와 한이 앞설 수도 있으나 홍세화씨가 가져온 메시지는 뜻밖에도 '똘레랑스'였다. 그 언어의 효과는 놀라웠다. 생소한 단어는 금세 친숙한 단어로 바뀌고 어려울지언정 프랑스의 똘레랑스 정신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똘레랑스가 상대방과의 무조건적인 토론과 소통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홍세화씨는 무엇보다 프랑스 사회에서의 정치적 스펙트럼의 다양화에 주목했다. 극우정당에서 극좌까지 아우르는 국가의 정치적 이념은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전제 조건 하에 발생할 수 있었다. 함축되는 바가 크다. 다르면 다른 데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함으로서 낭비되는 것은 자신의 감정뿐임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똘레랑스의 개념을 한국 사회에 대입시켜 본다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화합할 수 없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영역까지 침투한지 오래되었다.
상생하고 똘레랑스 하자고 하지만 이러한 소통의 근원적인 해결책을 누가 가로막고 나서는가, 조금만 염두에 두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앵똘레랑스다.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망명생활이 끝난 홍세화씨는 지금도 한국 사회의 소통을 위해 앵똘레랑스와 씨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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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홍세화, 한겨레신문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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