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적벽'에서 시작된 아내와의 인연
아내를 만나게 된 동기는 정시에 출발한 버스
70년대 초부터 사진에 취미를 붙이고, 등산을 좋아하다 보니까 국내 명산과 동굴, 서해 낙도의 빼어난 기암절벽 등을 일찌감치 둘러볼 수 있었다. 특히 내장산 서래봉과 설악산 대청봉에서 내려다본 울긋불긋한 단풍은 지금도 가슴 한편을 붉게 물들인 채 남아 있다.
층층이 쌓이고 깎인 세월이 묻어난 채석강, 소금강을 품고 있는 오대산, 경남 황매산의 수려한 계곡, 신의 작품으로 일컫는 마이산과 무주구천동, 운일암 반일암 등도 빼놓을 수 없겠는데 전남 화순의 '적벽'은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어서 기억이 더욱 또렷하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던 1979년 연말과 광주에서 피의 학살이 자행됐던 80년대에는 아마추어 사진클럽에 가입해서 각종 촬영대회와 공모전 출품작을 고르는 창작활동에 몰두하는 것으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호남 8경의 하나로 꼽히는 전남 화순 '적벽'
1981년 5월 24일에 다녀온 전남 화순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풍광이 백미인 창랑천을 따라 '노루목 적벽'과 '보산 적벽', '창랑 적벽', '물염 적벽' 등이 있는데 모두를 합하여 '화순적벽'이라 한다. 특히 '노루목 적벽'을 최고의 절경으로 꼽는다.
화순의 적벽은 항아리 모양의 옹성산(해발 572.8m)을 휘감아 도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름다운 비경은 선경에 빠진 듯 착각을 일으키며 소동파의 적벽부 못잖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적벽'이란 명칭은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 선생이 소동파가 노래한 양자강 황주 적벽에 버금간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석천 임억령은 '적벽동천'이라 했고, 하서 김인후가 적벽시를 지은 뒤 더욱 유명해졌다고.
이후 수많은 풍류 시인 묵객들이 적벽에 들러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시인 김삿갓의 방랑벽을 멈추게 한 곳도 바로 화순이란다. 그는 화순에 머문 13년 동안 적벽에 들러 수많은 시를 남겼고 동복면 구암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동복천 상류 창랑천을 따라 7㎞에 걸쳐 있는 적벽은 호남 8경 중 하나로 꼽히는데, 백아산에서 발원한 동복천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절벽을 푸른 하늘로 반사시키며 옹성산을 휘감아 돌고는 곧바로 섬진강의 가장 큰 지류인 보성강으로 내달린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적벽'
사진이 발명된 지 2백여 년, 여타 예술분야에 비하면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도 평소 기록을 중요하게 여겼던 터라 사진에 매력을 느껴 자연스럽게 빠져들지 않았나 싶다.
필자가 활동하던 아마추어 사진 모임은 1968년 10월 7일 회원 9명이 군산에 인물과 거리 사진의 길목을 열어준 고(故) 채원석 선생님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출범했으며 매년 사진전시회를 개최해 오고 있었다. 다음은 1981년 5월 월례회에서 어느 회원의 제의.
"전남 화순군에 풍광이 뛰어난 '적벽'이라는 곳이 있는데 댐 건설이 완공되면 주변 마을이 물에 잠긴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적벽'의 비경을 다시는 못 볼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화순군에서 '제1회 적벽사진 촬영대회'를 24일에 개최한다고 하니까 참가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회원의 제의는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었고, 별다른 의견 개진 없이 받아들여져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2010년 5월24일은 아내와 처음 인연이 시작되어 29년째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버스를 이용했다. 자리가 비어 타 사진 모임 회원들도 동승해서 다녀왔는데, 그 속에 지금의 아내도 끼어 있었던 것. 그런데 안타깝게도 풋사과처럼 새콤달콤할 것 같은 첫 만남의 추억은 빛 들어간 필름을 현상해놓은 것처럼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고, 회원들끼리 다투었던 아름답지 못한 추억만 쓴웃음을 짓게 한다.
아름답지 못한 추억이란 모임을 원만하게 이끌어가야 할 회장이 채 선생님이 승차하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버스를 출발시킨 데서 시작되었다. 행사 때마다 회원들이 시간을 지키지 않으니까 "오늘은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출발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던 것.
당시 환갑을 갓 넘긴 채 선생님은 촬영대회가 끝나고 서울에서 내려온 (사) 한국사진작가협회 임원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버스를 출발시키기에 "이런 경우는 없다. 버스를 세워라!"라며 애걸하고 따졌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알력다툼이 있었던 모양인데 내막을 모르는 필자는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이대로는 그냥 갈 수 없으니 내려야겠습니다!'하고는 버스에서 내려 흙먼지가 날리는 길에 서 있는데 선생님이 터덜터덜 걸어오셨다. 택시를 타려고 나오는데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내리니까 여기저기에서 쑤군대며 내려달라는 사람이 나타났고, 결국 버스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서 있다고 했다.
속이 무척 상했던 채 선생님이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 마무리 되었는데, 다른 사진모임 회원이었던 아내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화도 없었고, 관심을 두지 않아서인지 훗날 아내가 얘기해서야 알았다.
두 번째 만남
칼바람이 불던 그해 12월 초였다. 선배가 가게 부근 제일다방에서 동양화 개인전을 한다기에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큰 매형이 갑자기 쓰러져 개정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며 급히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정신없이 병원에 도착, 큰 누님에게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듣고 초조한 마음으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얀 가운을 걸치고 머리에 캡을 쓴 간호사 둘이 지나가다 한 사람이 친절하게 인사를 했다. 지금의 아내였는데, 모르는 얼굴이어서 무척 답답했다.
간호사는 6개월 전(5월) 적벽 사진 촬영대회에 다녀오며 버스에서 옥신각신하는 걸 보았다며 얘기를 꺼냈다. 그제야 인사를 나눴으나 미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해서 양촌리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면 덜할 것 같아 자동판매기 앞으로 가니까 이번에는 동전이 모자랐다.
동전 때문에 어찌할 줄 모르는데 웃으며 다가오더니 커피를 빼주었다. 고마웠다. 해서 보답하겠다는 표시로 명함을 한 장 건네면서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겠으니 시내에 나왔다가 심심하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했다.
병원 대기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시간은 얼추 10분. 그렇게 헤어지고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부근 다방이라며 전화가 왔다. 해서 묻고 말 것 없이 나갔더니 후배와 함께 웃으며 반겨주었다.
채 선생님이 시간에 맞춰 오셨으면 버스가 일찍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채 선생님의 늦은 발걸음이 동기가 되어 만남은 계속 이어졌고, 이듬해 2월에는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는데, 삼류 소설 줄거리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경쾌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던 1981년 연말, 조금 어수선했던 다방에서 환한 미소로 맞아주던 아내 얼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느껴지는데, 나이 탓일까?
층층이 쌓이고 깎인 세월이 묻어난 채석강, 소금강을 품고 있는 오대산, 경남 황매산의 수려한 계곡, 신의 작품으로 일컫는 마이산과 무주구천동, 운일암 반일암 등도 빼놓을 수 없겠는데 전남 화순의 '적벽'은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이어서 기억이 더욱 또렷하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던 1979년 연말과 광주에서 피의 학살이 자행됐던 80년대에는 아마추어 사진클럽에 가입해서 각종 촬영대회와 공모전 출품작을 고르는 창작활동에 몰두하는 것으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호남 8경의 하나로 꼽히는 전남 화순 '적벽'
▲ 산수가 수려한 화순 적벽. 마구잡이 댐 공사로 적벽에서의 뱃놀이도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 조종안
1981년 5월 24일에 다녀온 전남 화순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풍광이 백미인 창랑천을 따라 '노루목 적벽'과 '보산 적벽', '창랑 적벽', '물염 적벽' 등이 있는데 모두를 합하여 '화순적벽'이라 한다. 특히 '노루목 적벽'을 최고의 절경으로 꼽는다.
화순의 적벽은 항아리 모양의 옹성산(해발 572.8m)을 휘감아 도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름다운 비경은 선경에 빠진 듯 착각을 일으키며 소동파의 적벽부 못잖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적벽'이란 명칭은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 선생이 소동파가 노래한 양자강 황주 적벽에 버금간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석천 임억령은 '적벽동천'이라 했고, 하서 김인후가 적벽시를 지은 뒤 더욱 유명해졌다고.
이후 수많은 풍류 시인 묵객들이 적벽에 들러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시인 김삿갓의 방랑벽을 멈추게 한 곳도 바로 화순이란다. 그는 화순에 머문 13년 동안 적벽에 들러 수많은 시를 남겼고 동복면 구암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동복천 상류 창랑천을 따라 7㎞에 걸쳐 있는 적벽은 호남 8경 중 하나로 꼽히는데, 백아산에서 발원한 동복천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절벽을 푸른 하늘로 반사시키며 옹성산을 휘감아 돌고는 곧바로 섬진강의 가장 큰 지류인 보성강으로 내달린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적벽'
사진이 발명된 지 2백여 년, 여타 예술분야에 비하면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도 평소 기록을 중요하게 여겼던 터라 사진에 매력을 느껴 자연스럽게 빠져들지 않았나 싶다.
▲ 전남 화순군이 개최한 ‘제1회 적벽사진 전국 촬영대회’ 개회식 장면(1981년 5월24일). 아내와의 인연이 시작된 전남 화순은 지금도 고향처럼 정겹게 느껴집니다. ⓒ 조종안
필자가 활동하던 아마추어 사진 모임은 1968년 10월 7일 회원 9명이 군산에 인물과 거리 사진의 길목을 열어준 고(故) 채원석 선생님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출범했으며 매년 사진전시회를 개최해 오고 있었다. 다음은 1981년 5월 월례회에서 어느 회원의 제의.
"전남 화순군에 풍광이 뛰어난 '적벽'이라는 곳이 있는데 댐 건설이 완공되면 주변 마을이 물에 잠긴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적벽'의 비경을 다시는 못 볼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화순군에서 '제1회 적벽사진 촬영대회'를 24일에 개최한다고 하니까 참가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회원의 제의는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었고, 별다른 의견 개진 없이 받아들여져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래서 2010년 5월24일은 아내와 처음 인연이 시작되어 29년째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버스를 이용했다. 자리가 비어 타 사진 모임 회원들도 동승해서 다녀왔는데, 그 속에 지금의 아내도 끼어 있었던 것. 그런데 안타깝게도 풋사과처럼 새콤달콤할 것 같은 첫 만남의 추억은 빛 들어간 필름을 현상해놓은 것처럼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고, 회원들끼리 다투었던 아름답지 못한 추억만 쓴웃음을 짓게 한다.
아름답지 못한 추억이란 모임을 원만하게 이끌어가야 할 회장이 채 선생님이 승차하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버스를 출발시킨 데서 시작되었다. 행사 때마다 회원들이 시간을 지키지 않으니까 "오늘은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출발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던 것.
당시 환갑을 갓 넘긴 채 선생님은 촬영대회가 끝나고 서울에서 내려온 (사) 한국사진작가협회 임원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버스를 출발시키기에 "이런 경우는 없다. 버스를 세워라!"라며 애걸하고 따졌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알력다툼이 있었던 모양인데 내막을 모르는 필자는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이대로는 그냥 갈 수 없으니 내려야겠습니다!'하고는 버스에서 내려 흙먼지가 날리는 길에 서 있는데 선생님이 터덜터덜 걸어오셨다. 택시를 타려고 나오는데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내리니까 여기저기에서 쑤군대며 내려달라는 사람이 나타났고, 결국 버스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서 있다고 했다.
속이 무척 상했던 채 선생님이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 마무리 되었는데, 다른 사진모임 회원이었던 아내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화도 없었고, 관심을 두지 않아서인지 훗날 아내가 얘기해서야 알았다.
두 번째 만남
▲ 적벽에서 몽돌을 줍는 아내. 물에 반사되는 절벽이 그림 같은데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얼굴도 몰라보고, 동전이 모자라 커피도 얻어 마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조종안
칼바람이 불던 그해 12월 초였다. 선배가 가게 부근 제일다방에서 동양화 개인전을 한다기에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큰 매형이 갑자기 쓰러져 개정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며 급히 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정신없이 병원에 도착, 큰 누님에게 전후 사정 이야기를 듣고 초조한 마음으로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얀 가운을 걸치고 머리에 캡을 쓴 간호사 둘이 지나가다 한 사람이 친절하게 인사를 했다. 지금의 아내였는데, 모르는 얼굴이어서 무척 답답했다.
간호사는 6개월 전(5월) 적벽 사진 촬영대회에 다녀오며 버스에서 옥신각신하는 걸 보았다며 얘기를 꺼냈다. 그제야 인사를 나눴으나 미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해서 양촌리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면 덜할 것 같아 자동판매기 앞으로 가니까 이번에는 동전이 모자랐다.
동전 때문에 어찌할 줄 모르는데 웃으며 다가오더니 커피를 빼주었다. 고마웠다. 해서 보답하겠다는 표시로 명함을 한 장 건네면서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겠으니 시내에 나왔다가 심심하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했다.
병원 대기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시간은 얼추 10분. 그렇게 헤어지고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부근 다방이라며 전화가 왔다. 해서 묻고 말 것 없이 나갔더니 후배와 함께 웃으며 반겨주었다.
채 선생님이 시간에 맞춰 오셨으면 버스가 일찍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채 선생님의 늦은 발걸음이 동기가 되어 만남은 계속 이어졌고, 이듬해 2월에는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는데, 삼류 소설 줄거리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경쾌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던 1981년 연말, 조금 어수선했던 다방에서 환한 미소로 맞아주던 아내 얼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느껴지는데, 나이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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