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생활하는 내 대학생 아이들이 지난 주말 또 집에 왔다. 이번에 아이들이 집에 온 것은 특별한 뜻이 있어서였다.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모시고 23일(일요일) 낮에 덕산온천으로 목욕을 가기로 예정된 일 때문이었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 생활을 합해 입원 6개월 만에 다시 걷게 되신 노친, 그리하여 지난 9일 소변주머니를 떼어내고, 9일과 10일 연 이틀 외식을 하셨던 노친을 모시고 이번에는 덕산온천을 가는 가족목욕행사를 계획했다. 노인을 부축해 드리고 또 목욕 수발을 하려면 아무래도 손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중요한 일이었다.
노친을 승합차에 태워드리고 내려드리고 하려면 남자 두어 명 손이 필요할 것 같고, 목욕 수발을 하려면 여자 손들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아서, 딸아이와 아들 녀석도 내려오게 하고, 또 안산에서 사는 누이동생 모녀도 내려오게 했다. 그렇게 해서 자못 거창한 가족 행사가 되었다.
비가 내려서 어려움이 있었지만(날씨가 고 노무현 대통령 1주기 추모제와 콘서트를 방해하는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우리 가족은 실로 오랜만에 노친을 모시고 덕산온천 목욕행사를 가졌고,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도 함께 했다. 식사 전/후 기도를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영혼을 위한 기도도 했고, 그 기도에 한 마음으로 동참해주는 노친과 가족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도 가졌다.
덕산온천을 가고 오는 차 안에서, 또 식사 자리에서 가슴 아프면서도 재미있는 얘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천안함 이야기,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 4대강 사업과 천주교 '생명미사' 이야기 등등…. 우리가 오늘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 속에 살고 있음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내 나이 세대
내 청년 시절에는 유신독재와 광주살인정권의 폭압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절절히 체감하며 살아야 했다.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유래한 '시대의 아픔'이라는 말은 늘 내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같은 통증이기도 했다.
내 주변에 말이 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늘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나는 그때 기성세대 중에서도 50-60대 이상 세대들 앞에서 숨 막힐 듯한 이질감과 단절감을 감내했고, 마침내는 이상한 경멸감과 증오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술을 마시면 밤거리에서도 운동권 노래를 즐겨 불렀고, "저 꽉 막히고 비루한 50-60대들이 빨리빨리 사라져야 이 나라가 산다"는 극단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50-60대들이 사라지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 자연적으로 민주화가 달성되고 시민정신이 자리 잡게 될 것으로 생각했으니….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 내가 어느덧 50대 시절을 사는구나 했더니 또 어느새 60대 시절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내 생활 주변에서, 또 조중동 독자들 앞에서 내 젊은 시절의 50-60대들을 쉽게 보곤 한다. 청년 시절 내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던 50-60대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여기저기에 널리거나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다.
내 나이 세대들은 젊은 세대들 앞에서 부분적으로는 부끄러운 모습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내가 청년 시절에 50-60대들을 바라보았던 것과 똑같은 눈으로 오늘의 50-60대들을 바라볼지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미안해지는 마음도 크다. 오죽하면 선거 국면에서 '盧風과 老風의 대결'이라는 말도 나왔겠는가.
간혹 나를 전혀 모르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다 보면 나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눈빛들을 느끼기도 한다. 그 경이로운 눈빛들 속에는 고마움도 담뿍 어려 있다. 그것을 보게 되면 나는 더욱 부끄럽고 미안하다. 열린사회, 변화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있어서는, 비율적으로 내 나이 세대들은 전반적으로 부끄러운 세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불효'도 고백하게 되고
언젠가 한 번은 아이들에게 내 '불효'를 고백한 적이 있었다. 나는 오늘 주변으로부터 '효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살아계신 노모께만 효자인 것이 아니라 예전에 작고하신 선친께도 효자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
천주교 신자로서 선친의 생신과 기일, 또 설과 추석명절, 11월 '위령의 달'에 선친의 영혼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일 년에 몇 번씩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일 외로, 나는 과거 선친께 특별한 일을 해드렸다.
유고 동화집 두 권과 유고 시집 한 권을 만들어 드린 일이다. 유고 동화집 한 권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올해 충청남도에서 '충남문학사'라는 방대한 책을 만드는데, 내 선친은 시 부문과 동화 부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선친과 관련된 일을 할 때마다 선친에 대한 내 효심은 선친 생전의 '불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선친과 나 사이에는 종종 언쟁이 빚어지곤 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때문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수시로 우리 부자 사이에 끼어들어 논쟁을 유발시키곤 했다.
1972년 '시월유신' 국민투표 때 최초의 언쟁이 벌어졌다. 선친은 유신헌법이야말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통일로 가는 길이라며 나와 누이동생에게 찬표를 던지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나와 누이동생은 거부했다. 과감히 반대를 선택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찬성 97%, 반대 3%였는데, 그 3% 안에 나와 누이동생이 속하게 되었다.
5공 시절 한 번은 '광주' 이야기 때문에 선친과 심한 언쟁이 벌어졌다.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무참하게 희생된 억울한 현실에 내가 분노를 표하자 선친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동서고금 어디를 보더라도 한 인물이 정권을 잡으려면 그런 살상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라는 말씀이었다.
선친의 그런 태연자약한 태도 때문에 나는 더욱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친과의 언쟁 때문에 더더욱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여러 날 불면증으로 고생을 해야 했고, 부자 사이에 형성된 뻑뻑한 기류 때문에 모친은 늘 노심초사해야 했다.
한번은 사촌형님 한 분이 오셔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어쩌다가 광주 얘기가 나왔다.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말이 내 입에서 나왔을 때 사촌 형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기헐 것 읎어. 육이오 때는 더 많이 죽었어."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득한 심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와 형님께는 죄송스런 말이지만 빨리빨리 세월이 갔으면 해요. 빨리빨리 세월이 가서 세대교체라도 되어야 내가 제대로 숨을 쉬며 살 것 같아요."
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에 관해 좋은 말만 하다가 부자간에 종종 언쟁도 벌어진 사실, 내 불효를 고백할 때는 선친께도 죄송스러웠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아비가 살아왔던 그 어려웠던 시절을 실감시키자니 그런 얘기까지 하게 되었지만, 정말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서 갖게 되는 행복감과 미안함
젊은 시절의 나에 비하면, 내 아이들은 적이 행복할 것 같다.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대화가 참으로 원활하다. 생각이 통하고 가치관이 일치한다. 선친과 나 사이에 있었던 언쟁이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없다.
우선 그 사실이 고맙다. 나도 다행이고, 아이들에게도 다행한 일일 것이다. 더욱 고마운 것은 아이들이 '정의'에 민감한 심성을 지니고 아빠의 뜻에 잘 따라준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나를 따라 지지난해와 지난해 '오체투지 순례기도'에도 여러 번 참여했고, '용산미사'에도 꽤 많이 참례했다. 오체투지 순례기도와 용산미사에 거듭거듭 가족이 함께 참례한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컴퓨터 사용법도 가르쳐 주고, 사이버 세상도 여러 곳 안내를 해주었다. 지금도 수시로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해 준다. 할머니와 덕산온천 가족목욕 행사를 갖기 위해 엊그제 주말에 내려왔을 때는 딸아이가 색다른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 직후 우리 친구들 사이에 화제가 된 게 뭔지 아세요? 볼펜과 갖가지 펜을 만드는 모나미 회사 아시죠? 모나미 회사가 문을 닫게 생겼다는 거예요. 바닷물 속에서 쌍끌이 어선 그물로 건져 올렸다는 어뢰 잔해에 새겨진 '1번'이라는 글자 보셨죠? 어뢰가 폭발했는데도, 또 오랫동안 바닷물 속에 있었는데도 전혀 손상되지 않고 말짱하잖아요.
보통 유성 매직펜으로 쓴 게 아니래요. 어떤 상황에서도 글씨가 지워지지 않는 세계 최첨단 유성 매직펜을 북한이 개발했다는 거예요. 이번 천안함 사건으로 그 유성 매직펜의 성능이 확인되어서 곧 세계 시장에 수출될 거래요. 그러면 결국 한국 모나미 회사는 문을 닫게 될 거라는 거죠."
그 얘기를 듣고 우리 가족은 많이 웃었다. 그 유성 매직펜이 국내 시장에도 깔리면 우선적으로 구입하자는 말도 나왔다. 아이들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오가며 전파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 기발하고도 예리해서 놀랍기도 한 내용들이었다. 풍자와 위트, 해학 등을 포괄하는 패러디 능력이 요즘 젊은이들의 장기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 아이들은 야구에 관심이 많다. 서울에서 종종 야구장에도 가는 모양이다. 한번은 TV로 야구를 보는 딸아이에게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저 야구경기장에 가득 찬 관중들을 보면 암울한 생각도 든다. 현 정부가 무리하게 드라이브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저 관중들, 스포츠에 대한 과도한 열기에도 있을 것 같고…."
그러자 딸아이는 태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80년대 90년대 관중들이 아니에요. 저 관중들도 알 건 다 알아요. 현실 상황에서 겪는 스트레스 때문에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 말에 아들 녀석도 동조했다. 나는 새롭게 희망을 안는 기분이었다. 미래에는 분명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한 오늘의 요철은 잠시의 과정일 뿐이었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 당장만 보면서 오늘의 권세가 천년만년 이어질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일 따름이었다.
아이들이 다시금 고맙고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열린사회, 바른 세상과 관련하는 가치관을 안고 참되게 살아가는 일에는 얼마나 큰 고뇌와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따른 것인가. 그것의 기초를 놓아준 아비로서는 아이들이 가엾게 느껴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일 터였다.
하지만 굳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사람의 힘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힘으로 일하며 살아간다. 참된 삶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그 힘과 그 길이 내 아이들을 잘 이끌어 줄 것이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 생활을 합해 입원 6개월 만에 다시 걷게 되신 노친, 그리하여 지난 9일 소변주머니를 떼어내고, 9일과 10일 연 이틀 외식을 하셨던 노친을 모시고 이번에는 덕산온천을 가는 가족목욕행사를 계획했다. 노인을 부축해 드리고 또 목욕 수발을 하려면 아무래도 손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중요한 일이었다.
비가 내려서 어려움이 있었지만(날씨가 고 노무현 대통령 1주기 추모제와 콘서트를 방해하는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우리 가족은 실로 오랜만에 노친을 모시고 덕산온천 목욕행사를 가졌고,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도 함께 했다. 식사 전/후 기도를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영혼을 위한 기도도 했고, 그 기도에 한 마음으로 동참해주는 노친과 가족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도 가졌다.
덕산온천을 가고 오는 차 안에서, 또 식사 자리에서 가슴 아프면서도 재미있는 얘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천안함 이야기,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 4대강 사업과 천주교 '생명미사' 이야기 등등…. 우리가 오늘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 속에 살고 있음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 대학교/고등학교 입학기념2006년 2월, 내 아이들의 대학교/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찍은 가족 사진이다. 딸아이는 올해 4학년이고(교생 실습 관계로 1학기 휴학했다), 아들 녀석은 대학 2학년이다. ⓒ 지요하
부끄러운 내 나이 세대
내 청년 시절에는 유신독재와 광주살인정권의 폭압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절절히 체감하며 살아야 했다.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유래한 '시대의 아픔'이라는 말은 늘 내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같은 통증이기도 했다.
내 주변에 말이 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늘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나는 그때 기성세대 중에서도 50-60대 이상 세대들 앞에서 숨 막힐 듯한 이질감과 단절감을 감내했고, 마침내는 이상한 경멸감과 증오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술을 마시면 밤거리에서도 운동권 노래를 즐겨 불렀고, "저 꽉 막히고 비루한 50-60대들이 빨리빨리 사라져야 이 나라가 산다"는 극단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50-60대들이 사라지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 자연적으로 민주화가 달성되고 시민정신이 자리 잡게 될 것으로 생각했으니….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 내가 어느덧 50대 시절을 사는구나 했더니 또 어느새 60대 시절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리고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내 생활 주변에서, 또 조중동 독자들 앞에서 내 젊은 시절의 50-60대들을 쉽게 보곤 한다. 청년 시절 내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던 50-60대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여기저기에 널리거나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다.
내 나이 세대들은 젊은 세대들 앞에서 부분적으로는 부끄러운 모습일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내가 청년 시절에 50-60대들을 바라보았던 것과 똑같은 눈으로 오늘의 50-60대들을 바라볼지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미안해지는 마음도 크다. 오죽하면 선거 국면에서 '盧風과 老風의 대결'이라는 말도 나왔겠는가.
간혹 나를 전혀 모르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다 보면 나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눈빛들을 느끼기도 한다. 그 경이로운 눈빛들 속에는 고마움도 담뿍 어려 있다. 그것을 보게 되면 나는 더욱 부끄럽고 미안하다. 열린사회, 변화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있어서는, 비율적으로 내 나이 세대들은 전반적으로 부끄러운 세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불효'도 고백하게 되고
언젠가 한 번은 아이들에게 내 '불효'를 고백한 적이 있었다. 나는 오늘 주변으로부터 '효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살아계신 노모께만 효자인 것이 아니라 예전에 작고하신 선친께도 효자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
천주교 신자로서 선친의 생신과 기일, 또 설과 추석명절, 11월 '위령의 달'에 선친의 영혼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일 년에 몇 번씩 위령미사를 봉헌하는 일 외로, 나는 과거 선친께 특별한 일을 해드렸다.
유고 동화집 두 권과 유고 시집 한 권을 만들어 드린 일이다. 유고 동화집 한 권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올해 충청남도에서 '충남문학사'라는 방대한 책을 만드는데, 내 선친은 시 부문과 동화 부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선친과 관련된 일을 할 때마다 선친에 대한 내 효심은 선친 생전의 '불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선친과 나 사이에는 종종 언쟁이 빚어지곤 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때문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수시로 우리 부자 사이에 끼어들어 논쟁을 유발시키곤 했다.
1972년 '시월유신' 국민투표 때 최초의 언쟁이 벌어졌다. 선친은 유신헌법이야말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통일로 가는 길이라며 나와 누이동생에게 찬표를 던지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나와 누이동생은 거부했다. 과감히 반대를 선택했다. 우리 고장에서는 찬성 97%, 반대 3%였는데, 그 3% 안에 나와 누이동생이 속하게 되었다.
5공 시절 한 번은 '광주' 이야기 때문에 선친과 심한 언쟁이 벌어졌다.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무참하게 희생된 억울한 현실에 내가 분노를 표하자 선친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동서고금 어디를 보더라도 한 인물이 정권을 잡으려면 그런 살상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라는 말씀이었다.
선친의 그런 태연자약한 태도 때문에 나는 더욱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친과의 언쟁 때문에 더더욱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여러 날 불면증으로 고생을 해야 했고, 부자 사이에 형성된 뻑뻑한 기류 때문에 모친은 늘 노심초사해야 했다.
한번은 사촌형님 한 분이 오셔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어쩌다가 광주 얘기가 나왔다.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말이 내 입에서 나왔을 때 사촌 형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기헐 것 읎어. 육이오 때는 더 많이 죽었어."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득한 심정으로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와 형님께는 죄송스런 말이지만 빨리빨리 세월이 갔으면 해요. 빨리빨리 세월이 가서 세대교체라도 되어야 내가 제대로 숨을 쉬며 살 것 같아요."
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에 관해 좋은 말만 하다가 부자간에 종종 언쟁도 벌어진 사실, 내 불효를 고백할 때는 선친께도 죄송스러웠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아비가 살아왔던 그 어려웠던 시절을 실감시키자니 그런 얘기까지 하게 되었지만, 정말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서 갖게 되는 행복감과 미안함
젊은 시절의 나에 비하면, 내 아이들은 적이 행복할 것 같다.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대화가 참으로 원활하다. 생각이 통하고 가치관이 일치한다. 선친과 나 사이에 있었던 언쟁이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없다.
우선 그 사실이 고맙다. 나도 다행이고, 아이들에게도 다행한 일일 것이다. 더욱 고마운 것은 아이들이 '정의'에 민감한 심성을 지니고 아빠의 뜻에 잘 따라준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나를 따라 지지난해와 지난해 '오체투지 순례기도'에도 여러 번 참여했고, '용산미사'에도 꽤 많이 참례했다. 오체투지 순례기도와 용산미사에 거듭거듭 가족이 함께 참례한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컴퓨터 사용법도 가르쳐 주고, 사이버 세상도 여러 곳 안내를 해주었다. 지금도 수시로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해 준다. 할머니와 덕산온천 가족목욕 행사를 갖기 위해 엊그제 주말에 내려왔을 때는 딸아이가 색다른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천안함 조사결과 발표 직후 우리 친구들 사이에 화제가 된 게 뭔지 아세요? 볼펜과 갖가지 펜을 만드는 모나미 회사 아시죠? 모나미 회사가 문을 닫게 생겼다는 거예요. 바닷물 속에서 쌍끌이 어선 그물로 건져 올렸다는 어뢰 잔해에 새겨진 '1번'이라는 글자 보셨죠? 어뢰가 폭발했는데도, 또 오랫동안 바닷물 속에 있었는데도 전혀 손상되지 않고 말짱하잖아요.
보통 유성 매직펜으로 쓴 게 아니래요. 어떤 상황에서도 글씨가 지워지지 않는 세계 최첨단 유성 매직펜을 북한이 개발했다는 거예요. 이번 천안함 사건으로 그 유성 매직펜의 성능이 확인되어서 곧 세계 시장에 수출될 거래요. 그러면 결국 한국 모나미 회사는 문을 닫게 될 거라는 거죠."
그 얘기를 듣고 우리 가족은 많이 웃었다. 그 유성 매직펜이 국내 시장에도 깔리면 우선적으로 구입하자는 말도 나왔다. 아이들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오가며 전파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 주었다. 기발하고도 예리해서 놀랍기도 한 내용들이었다. 풍자와 위트, 해학 등을 포괄하는 패러디 능력이 요즘 젊은이들의 장기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 아이들은 야구에 관심이 많다. 서울에서 종종 야구장에도 가는 모양이다. 한번은 TV로 야구를 보는 딸아이에게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저 야구경기장에 가득 찬 관중들을 보면 암울한 생각도 든다. 현 정부가 무리하게 드라이브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저 관중들, 스포츠에 대한 과도한 열기에도 있을 것 같고…."
그러자 딸아이는 태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80년대 90년대 관중들이 아니에요. 저 관중들도 알 건 다 알아요. 현실 상황에서 겪는 스트레스 때문에 야구장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 말에 아들 녀석도 동조했다. 나는 새롭게 희망을 안는 기분이었다. 미래에는 분명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한 오늘의 요철은 잠시의 과정일 뿐이었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 당장만 보면서 오늘의 권세가 천년만년 이어질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문제일 따름이었다.
아이들이 다시금 고맙고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열린사회, 바른 세상과 관련하는 가치관을 안고 참되게 살아가는 일에는 얼마나 큰 고뇌와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따른 것인가. 그것의 기초를 놓아준 아비로서는 아이들이 가엾게 느껴지는 것 또한 인지상정일 터였다.
하지만 굳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사람의 힘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힘으로 일하며 살아간다. 참된 삶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그 힘과 그 길이 내 아이들을 잘 이끌어 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