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 평전가장 아끼는 책 '1번' 전태일 평전 ⓒ 김동환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지독한 가난, 이로부터 발생하는 고난과 체념은 소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 땅엔 가난을 대물림 받고 자란 이들이 너무나 많다. 개천에서 용나기 어려운 사회 구조 속에서, 삶 그 자체가 너무나도 버거운 이들 앞에 던져줄 수 있는 메시지가 너무나 제한되어 있고, 지독한 현실 앞에서 눈앞에 놓여있는 것은 소주 한잔뿐이다.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힘내라는 말,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말이 무기력함을 드러낸다면, 재빨리 1968년의 프랑스 학생시위를 예로 들어본다. 문제는 사회변혁이라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자는 훈수가 예의 철이 들지 않은 못난 놈으로 비칠 때 우리는 역시 술잔을 비운다.
집에 돌아오는 어깨가 무거워지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겠지 하며, 그 희망의 근거를 찾는 일에 열중해본다. 기억력에 의존하기 힘들어 다시 찾은 동대문의 중고책방들에서도 요새는 대부분이 처세와 재테크로 이뤄진 책들이 수요가 많다고 한다. 그렇게 책방 앞을 서성이다 평화시장 앞의 청계천 다리에 와서 다시 전태일과 마주쳐야 했다. 영원한 '청년' 전태일, 그가 누구이기에.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준,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일깨워줬던 전태일은 경북 대구에서 지독한 가난 속에서 태어났다, 부친 전상수는 피복제조업계 노동자로 일했지만 벌이가 어렵고, 사업을 하면 잘 안 풀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채소행상으로 집안을 간신히 유지해나가는 정도였다. 아버지가 2년 남짓 모은 돈으로 재봉틀을 마련하자 전태일은 그제야 또래의 아이들답게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 다니며 짧은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다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전태일은 이후 편입했던 남대문국민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를 시작하였다. 이때가 12세다.
아버지가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울화병으로 폭음이 심해지고, 어머니마저 앓아눕게 되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전태일은 대구, 서울, 부산 등지에서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으로 돈을 벌었지만 기껏 15세도 안 된 전태일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애초에 무리가 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할 때 즈음 전태일은 학업을 하고 싶은 욕구로 인해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시련이란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재기가 실패하자 자신은 집을 떠난 어머니를 찾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태일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렇게 평화시장으로 오게 되었다. 삼일사에 시다로 취직한 전태일은 미싱일에도 경험이 있어 성실한 자세로 일을 해 인정받는 청년이 되어 직장을 옮겨 재단보조로 일을 하게 된다. 희망을 꿈꾸는 것도 잠시 거기서 그가 본 것은 처참한 노동환경과 착취당하는 어린 시다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화시장 전체에서 발생하는 노동 착취에 그는 비로소 억압받는 노동자의 처지에 눈을 뜬다.
전태일은 이러한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또 어린 시다들이 어깨를 펴고 일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재단사 모임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근로기준법 책을 읽으며 밤을 새는지 모르고 내일의 희망에 대해 꿈꿨다. 그렇게 그가 만든 모임 '바보회'는 평화시장 일대의 3만 근로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근로기준법에 대한 공부, 노동실태 조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를 만들 것을 목표로 평화시장에 뿌리내렸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그토록 친절하게 보이던 사장들이 냉소를 보이고, 노동자들은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쫓겨난 그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같은 활동을 하던 중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집회를 열기로 계획했다. 당연하게 지켜질 것으로 보이던 근로기준법이 사실은 종이 한 조각에 불과하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결국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1970년 11월 13일, 경비가 삼엄한 가운데서도 오후 1시에는 500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경찰과 경비원들의 감시 속에서 움츠러들었던 그들 앞에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나타났다. 손에 근로기준법을 쥔 채 불을 댕긴 그가 한 말은 매우 간단명료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는 온몸을 불사르며 그렇게 사랑하는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이별했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을 비록 다른 세상으로 보냈지만 아들의 첫 번째 가치는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지금까지 노동자들 곁에 남아있다. 전태일과 이소선 여사, 1968년 프랑스가 아니라 1970년의 한국, 그 안에서 용감히 살았던 청년 전태일은 매우 구체적인 우리의 희망이다.
청년 전태일의 삶이 가난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하여 주류 무대에 나섰다면 그는 과연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가정은 부질없는 것이지만 그런 사례를 보여줬던 이들이 지금은 일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며 군림하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가. 전태일은 삶 그 자체를 약자에게 바쳤다. 그렇게 타올랐던 불꽃은 세상을 너무나도 많이 바꿔놓았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 전태일의 삶에서 '바보회'를 만들어 싸웠던 장면, 노동운동의 조직화를 부각시켜봐야 하는 대목이다. 늘 대학생 친구가 필요했던 전태일, 근로기준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대학생을 찾고, 노동자들을 규합해 나가는 순간, 그는 이미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열매를 우리는 지금도 나누고 있다.
친구에게,
친구야, 우리 전태일과 친구가 되자.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 친구는 과연 나를 이제 철이 든 놈으로 생각할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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