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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 속 고독한 왕자의 우울한 최후

[리뷰] 매튜본의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

등록|2010.05.27 10:57 수정|2010.05.28 09:04

남성 백조들의 군무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장면, 프티파의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는 가녀린 여성 백조들이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를 보이는데 반해 매튜 본의 남성 백조들은 힘차고 강인한 남성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 LG아트센터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처음 보면서 공연 내내 머릿속엔 두개의 다른 작품이 떠올랐다. 하나는 매튜 본이 댄스 뮤지컬<백조의 호수>를 초연하기 딱 2년 전인 1993년에 첫 선을 보인 보리스 에이프만의 발레 <차이코프스키:삶과 죽음의 미스터리>이고 또 하나는 연출 안무가 수잔 스트로만과 극작가 존 와이드만이 1999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시작한 댄스 뮤지컬 <컨택트>였다.

두 작품 모두 올해 초에 각각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과 LG아트센터에서 상연되었는데 어느 작품이 더하다 덜하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매튜 본이 이 작품을 만들기 전 보리스 에이프만의 발레에서 힌트를 얻었을 수 있고, 마찬가지로 수잔 스트로만이 매튜 본에 영향을 받아 <컨택트>를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발레 <차이코프스키:삶과 죽음의 미스터리>에서는 실제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비관, 고독감 속에 우울한 죽음 속으로 빠져드는 내용인데, 매튜 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왕자와 남성 백조간의 동성애 장면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어 스쳐갔다.

또한 뮤지컬 <컨택트>의 경우 세개의 에피소드 중 특히 세번째인 Contact 에서 어느 정도 성공할 만큼 성공한 남자임에도 불구, 현대인의 질병 중 하나인 고독감으로 인해 무기력해진채 결국 자살을 시도하다 노란 드레스 여인의 환상 속으로 빠져든다는 내용인데, 역시 매튜본의 작품 속에서 왕자가 고독 속에 백조의 환상으로 빠져드는 장면과 닮아 있다.

매튜 본은 고전발레로 너무나 유명한 <백조의 호수>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진실된 사랑'을 '인정 받지 못한 자의 고독'으로 완벽하게 바꾸어 놓았고, 원작의 가녀린 여성 백조들을 근육질 남성 백조 떼로 대체하는 파격을 행사 하였지만 결코 원작 자체의 비극적 서사 구조를 거의 깨트리지 않은채 완벽하게 다른 새로운 작품으로 재창조 해냈다.

1895년 초연되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차이코프스키 곡, 프티파 안무의 <백조의 호수>는 순수하고도 진실된 사랑, 그리고 사랑을 시험하는 강력한 악의 힘이라는 너무나 기본적이고도 오페라적 감성에 충실한 탓에 언제나 클래식하게만 다가오는 반면, 매튜본이 재해석한 이 작품에서는 특히 왕자의 고독에 주목,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느끼는 현대인들의 고독감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굉장히 현대적으로 느껴졌다.

이 작품 속에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품속에서 궁궐 속 마마보이로 자라 가녀린 심성을 가진 왕자가 겪게 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성장통, 동성애, 고독감과 좌절 등이 골고루 버무러져 등장한다. 프티파의 원작 속에 나오는 왕자 역시 여리고 약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리 세밀하게 묘사되지 못하는 반면 연극적 요소가 한층 강화된 이 작품에서 왕자는 더욱 심층적으로 그려져 극의 밀도를 더했다.

왕자의 꿈 속에 나타난 백조왕자는 꿈 속에서 백조를 본다. 근육질의 늠름한 남성 백조는 왕자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향이다. 나약한 자신이지만 이처럼 강인한 모습으로 탈바꿈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 LG아트센터


왕자의 아침 기상아침에 일어난 왕자의 하루 일상은 시종들과 시녀들의 온갖 수발로 부터 시작된다. ⓒ LG아트센터


왕비와 왕자왕자는 마마보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왕비의 품에서 자랐지만 왕비 역시 제대로 된 어머니 역할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마보이는 더 고독하다. ⓒ LG아트센터


자신의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할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어머니 역할을 잘 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 왕비가 굳고 강인한 심성의 남자로 키우지 못한 탓에 왕자는 이미 결혼할 나이가 된 어른이 되어서도 궁정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가지 못한다. 모두가 여전히 그를 아직 아이로만 보는 상황.

이미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꿰차지도 못한 채 겉돌기만 하던 왕자는 자신의 개인비서로부터 천박한 여성을 소개받아 농락 당하기도 하고 또 궁정 무도회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춤을 추는 낯선 남자를 질투하며 싸우다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왕자, 심한 고독감과 우울 속에 빠진 왕자는 결국 자살을 결심하고 공원의 호수로 달려가게 되는데 이 때 호수 위 한 무리의 백조 떼 속에서 자신이 꿈 속에서 만나왔던 자신의 이상향으로서의 강인한 남성성을 가진 한 마리 백조를 발견하게 된다.

왕자는 이 백조로부터 위안을 얻어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이후 궁정 무도회에서 망신을 당하고 쫓겨나 침대 위에 누운 왕자는 끝내 자신의 고독감을 못 견디고 죽음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

극중극 오페라 장면왕자의 개인 비서가 소개하여 만나게 된 왕자의 여자 친구는 오페라 공연을 보는 내내 천박한 매너를 드러내어 왕자와 왕비를 당혹하게 만든다. 개인 비서가 왕자에게 이런 여자친구를 소개해 준 것은 왕자를 제치고 왕좌를 차지하고자 하는 야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LG아트센터


뒷골목의 바 장면술에 취해 길을 헤매던 왕자는 우연히 뒷골목의 바에 들어가 자신의 여자친구 역시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절망 속에 빠져든다. 이후 왕자는 자살을 하기 위해 호수로 향하게 된다. ⓒ LG아트센터


실제 작품 속에서는 왕자가 인정 받지 못하는 상황, 궁정 내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상황들을 왕자의 개인 비서가 꾸미는 흉계들로 묘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 발레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조와 흑조가 같은 대상의 다른 이면임을 보여 주는 것을 통해 왕자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이상향으로서의 남성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왕자의 고독감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꼭 왕자가 살고 있는 구중 궁궐 속,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궁정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오늘 날 물질 만능의 상업 자본주의 체계 하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개체화, 수단화 되어 마치 기계 부품처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가졌을 인간 본연의 고독감이 맥락적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호수 위 백조들의 군무 장면깃털바지를 입은 늠름한 근육질의 남성 백조들이 군무를 힘차게 추고 있는 것을 왕자가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다. 고전 발레에서 튀튀를 입은 가녀린 몸매의 여성 백조들의 우아한 군무와 상당히 대조적이지만 이 작품에서도 역시 백미로 꼽히는 장면이다. ⓒ LG아트센터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 중 호수 위의 백조들지난 3월 25일 유니버설 발레단의 프레스 리허설 장면.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중 남성 군무 장면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 문성식


백조와 왕자의 만남어느 누구에게도 인정 받지 못하고 궁정 내에서 겉돌기만 하는 왕자. 고독감에 못이겨 호수로 달려가 자살을 하려던 왕자는 자신이 꿈 속에서 만나던 이상향의 백조를 발견하고서 다시 삶의 희망을 되찾게 된다. ⓒ LG아트센터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보고서 남성 백조를 채택한 발상의 전환, 역발상의 창의성에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이 작품이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게 된 것은 단지 그것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발상이란게 비록 참신할 수는 있어도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게 되면 소용이 없다.

근육질의 남성 백조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 백조가 오늘날 외모 지상주의 시대 여성의 이상향이라면 단단하고 우람한 근육을 가진 힘찬 남성 백조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고 또 인정받으려 노력하는 남성들의 이상향인 동시에, 또한 이에 도달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실패자들에게는 심한 모멸감을 주기도 하는 존재라는 것을 흑조와 백조의 양면성 비유를 통해 꽤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이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매우 큰 장점이라 할 것이다.

정신병동에 갇힌 왕자궁정파티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쫓겨난 왕자는 마치 정신병동 같은 곳으로 보내 지는데 의사와 간호사들이 펼치는 실루엣 극은 마치 왕자에게 이들이 심각한 심리적 압박을 주는 것처럼 보여진다. ⓒ LG아트센터


백조떼로부터 위협 당하는 왕자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운 왕자에게 호수 위의 그 백조떼들이 나타나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실재 장면이라기 보다는 왕자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게 맞지 않을까 싶다. ⓒ LG아트센터


이상향 백조의 출현다시 자신의 침대로 돌아와 누운 왕자에게 꿈 속에서 보았고 호수 위에서 자신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던 왕자의 이상향 백조가 나타난다. ⓒ LG아트센터


피날레호수 위의 백조떼가 나타나 왕자와 이상향 백조를 위협한다. 이상향 백조는 왕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만 죽어가는 백조를 보며 결국 왕자 자신도 죽음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 LG아트센터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 중 피날레지난 3월 25일 유니버설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프레스 리허설 장면 중 피날레.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와 마찬가지로 결말은 비극적이다. ⓒ 문성식


이 작품 역시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와 마찬가지로 호수위의 백조들이 군무를 추는 장면과 마지막 피날레 장면이 주요한 볼거리다. 비록 발레 무용이 꽤 많이 사용되긴 하였지만 정확히 발레라고 할 수가 없는 댄스 뮤지컬 장르이기에 고전 발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홀한 파드되 pas de deux나 서른 두바퀴 푸에테 fouette 같은 장면은 기대할 수 없다.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 중 왕자와 백조의 파드되지난 3월 25일 유니버설 발레단의 프레스 리허설 장면 중 왕자와 백조의 파드되. 매튜 본의 작품에서는 아예 이런 파드되가 없거나 상당히 간략하게 되어 있다. ⓒ 문성식


오히려 관능적인 뮤지컬 댄스라든지 몸짓을 통한 연극적 묘사가 발레동작과 어떻게 잘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는지 살펴 볼만 하다. 이 작품은 쟝르적으론 참 애매모호하다. 세밀한 심리 묘사라는 측면에서 연극을 닮았는가 하면 무대라든지 실루엣 극 등 전반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뮤지컬에 가깝다. 물론 노래는 한 곡도 없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작품을 댄스 뮤지컬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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