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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42회)

봉황촉(鳳凰燭) 살인사건 <2>

등록|2010.05.28 10:27 수정|2010.05.28 10:27
"하오나 마마."
"사암, 저들이 기득권을 버리지 않겠다면 과인도 맞설 수밖에 없네. 그게 어려움을 가져올 지라도 이 나라 조선의 백성과 왕실을 위하는 일이면 밀고 나갈 것이네. 저들이 사람 죽이는 걸 우습게 생각해 왈자패를 모아 추하고 더러운 짓을 자행하는 바 과인은 그들의 치부를 밝은 곳에 드러내 사절(士節)의 귀감을 삼을 것이네. 수하를 죽이는 일이 몸에 배, 왕실을 여염집처럼 여긴다면 나 역시 그들처럼 대해줄 것이네. 사암에게 백성들의 동향을 살피게 한 것은 나의 뜻이 거기 있기 때문이었네."

"전하, 저들 벽파와 맞부딪치는 건 위험하옵니다. 4백년 동안 이 땅에 터를 내린 뿌리가 단단하오니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기보다···."

"아니오 사암, 돌이켜보면 민간이나 궁중난동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소. 과인이 보위에 오른 초기에도 있었고 문인방을 비롯해 문양호 사건 역시 넓게는 공맹을 따르는 자의 소행임을 알아야 하네. 과인이 그대를 부른 건 4백년이나 부(富)와 권세를 누린 저들 사대부의 썩고 상한 곳을 징치하려는 것이니 과인의 뜻을 받들어 저들의 움직임을 살펴주기 바라네."
"삼가 명을 따르겠나이다."

규장각을 물러나온 정약용은 안국방(安國坊) 쪽으로 길을 잡았다. 한양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사산(四山) 밑'이라 하면 양반들의 거주지였다. 낙산 밑의 동촌과 서소문 내외인 서촌, 남산 아래인 남촌, 북악산 밑인 북촌. 특히 이곳은 양반의 핵인 노론이 많이 살았다. 종운가를 가로질러 안국방에 이르자 낯선 사내가 따라붙었다. 그는 걸음을 빨리 해 정약용 곁을 따르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인은 상감의 친위부대 장용위에 근무하라는 칙명을 받은 민치록(閔稚麓)입니다. 노론의 표적을 피하려 전하께옵서 파적위(破敵衛)에서 소인을 뽑아 장용위 근무를 명 받았으나 정식 임명장을 받기 전이므로 소인을 장용사(壯勇使)라 부릅니다. 나으리께서도 소인을 그리부르시옵소서. 장용위는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후 일곱 해 만에 만든 것으로 겉으론 전하를 시역하려든 무리들에 대한 방비에 역점을 두나 은밀히 하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은 벽파(僻派)의 기득권을 없애려 움직이는 것으로, 그들의 교묘한 치적쌓기와 방탕한 행위를 찾아 나섰습니다. 전하께서 사도세자 묘역을 수원으로 옮긴 것도 그 일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장차 그곳에 천도하실 모양이오니 한양에 터를 내린 사대부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아 나으릴 시중들기 위해 학문과 의술에 뛰어난 서과를 추려 뽑았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나으리 가까이서 봉행하라는 명을 받았나이다."

"따르게. 양사(兩司) 근무를 명 받았으면 일단 사헌부로 들어가세. 서과가 다녀올 동안 내금위장(內禁衛將)의 검시기록부터 살피는 게 좋겠네."

그 시각, 서과는 무악재를 올라서고 있었다.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 봉원동 일대에 걸쳐있는 고개다. 이 고개를 길마재라고 하는 건 산의 모양이 길마처럼 생겼기 때문에 한자로 안산(鞍山)이라 쓴다.

이 고개 등성이의 휘늘어진 팽나무에 걸린 여인의 몸은 불어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때마침 무악재 너머 집을 찾아가는 서과는 으스스한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렸을 적부터 이 고개를 넘을 때면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것은 땅이름으로 분당(分黨)을 예언했다는 조선 명종 때의 유명한 풍수가 남사고(南師古)에 대한 기억이었다.

<···한양의 동쪽에 낙산(駱山)이 있고 서쪽에 안산이 있다. 이것은 말과 안장이 같이 있지 않고 서로 대치돼 있는 형국으로  조정의 신하가 당파를 지어 동과 서로 나뉘는걸 말한다. 동쪽 낙산의 낙(駱)은 각마(各馬)니 곧 갈라지고, 서쪽 안산의 안(鞍)은 혁안(革安)이니 혁명을 일으킨 후 서인은 안정된다.>

결과는 어찌 됐는가? 남사고의 풀이대로 나라는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으며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뒤 정권을 잡았다.

동인이라 한 것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집이 건천동에 있기 때문이고, 서인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집이 도성 서쪽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이곳 무악재는 조선 성종 때 명나라 사신이 고개를 넘은 뒤, '하늘이 천 길의 한 관문을 지어 한 군사가 1천의 군사를 당할 만하다'고 칭송했던 요새였다.

서과가 고개 위에 올라섰을 때 눈에 들어온 건 좌우로 흔들리는 여인의 몸이었다. 서둘러 달려갔으나 나무 위로 오르기엔 시간이 늦은 것 같아 단검을 뽑아 날렸다. 목을 매단 끈이 끊어지고 여인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검지를 목 언저리에 대자 기척이 있다. 아직은 기맥이 모두 끊긴 게 아니어서 들쳐 업고 고갯길을 뛰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겨울로 접어드는 차가운 날씨가 오히려 도움이 됐다. 한약방이란 간판은 고개를 중간쯤 내려왔을 때에야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 같은 간판과 사람의 왕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한약방 문을 두드린 건 이곳이 아니면 반 시각은 뛰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뉘시오?"

의원은 일흔은 돼 보였다.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이런 시각에 찾아온 손님을 즐겨 맞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검시기록을 꺼내는 서과를 향해 한 마디 충고했다.

"죽은 자의 몸을 원했으면 목을 매단 그 자리에서 할 일이지 예까지 뛰어온 건 뭣 때문이오. 살기를 바라는 게요, 아님 죽기를 원하시오?"

묻고 있었지만 노인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서과가 굳이 검시기록을 작성할 필요없이 노인은 여인의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소견을 내놓았다.

"사람을 죽이려면 제대로 죽여야지 이게 뭔가. 자액(自縊) 흉낼 냈지만 엉성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천지의 모습을 본받고 형체를 품부(稟賦)받아 아끼지 않은 이가 없거늘 수(壽)를 다하지 못하고 비명횡사하면 그 얼마나 한이 되리."

노인은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서과는 흠칫 놀라 한걸음 물러났다. 자신은 이 처자가 세상살이를 비관하든 뭐든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여겼는데 노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초검이든 복검이든 죽은 자의 몸을 놓고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따질 때엔 가장 분명한 선택을 하게 된다. 선택한 그 방법이 옳지 않을 경우 죽은 자는 원한을 품게 된다는 잔 생각에 젖어 있는데 노인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누군가 목을 조르고 죽은 것으로 판단해 목을 매달았네. 목에 두른 올가미 끝이 칼끝에 스쳐가며 잘라진 것으로 보면 자넨 관원이 분명해 보이오만?"

"그렇습니다, 노인장. 전 사헌부에 소속된 다모(茶母)입니다. 고개를 넘다 팽나무에 걸린 주검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외로 저었다. 누워있는 여자, 목을 매단 이 여자는 죽어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의원이 병자를 보면 살려야 할지, 죽여야 할 건지를 판단하는 게 명의(名醫)네. 되는 대로 사람을 살리고 멋대로 약재를 남용해 사람을 죽이는 건 돌팔이지만, 적어도 이 길에 들어와 사람을 살리고자 생각했다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야 하고, 살고자 몸부림치는 자는 죽여야 하네."

노인은 휘둥그레 눈을 뜬 서과를 보며 빙그레 웃는 낯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안심하시게. 이 여인은 죽은 듯 보이나 죽은 게 아니라 인후를 졸려 혼절했을 뿐이네. 한숨 자고 나면 무슨 얘긴들 들을 수 있을 게야."

노인은 여인의 몸을 안으로 끌어들여 시술(施術)할 차비를 서둘렀다. 목을 매단 여인이 가슴에 온기가 남았다면 닭 벼슬의 피(鷄冠血)를 내어 입에 떨어뜨리고 윗옷을 벗겨 중완혈(中脘血)에 뜸을 뜬다. 한 장에 15분에서 30분 정도 크기의 뜸장 15매면 소생시킬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서과에게 한 마디 건넸다.

"닭 벼슬은 환자가 사내면 붉은 암탉을 쓰고 여자인 경운 붉은 장닭을 쓰네. 어찌됐건 이 처자는 다모(茶母)를 만나 살아났소이다."

노인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검시체식(檢屍體式)>엔 이런 경우 '조액(弔縊)'이라지만 본받을 만한 법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와 같은 시각, 반송장 하나가 망우리(忘憂里) 고개에 버려졌단 보고를 받고 사헌부에선 정약용을 파견했다. 그의 곁엔 신임 포교로 보이는 장용사가 따라붙었다. 사내를 대동하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산속의 날씨는 때마침 흩날리는 겨울비 속에 차갑게 달라 붙었다. 버려진 사내는 망우리 고개 초입에서 30여 미터 들어간 곳으로 그 자린 움푹 패어 있었다. 정약용은 즉시 검시기록을 작성했다.

"우리가 오기 전에 이 사낸 살아 있었을 것이다만, 지금은 명이 끊겼다. 이 사낸 행세께나 하는 집안의 사노(私奴)임이 분명하지만 손이 흐트러지고 눈이 열렸으니 분명 몽둥이로 맞아죽었다. 복부를 살펴라!"

"팽창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상처를 찾을 수 있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흔은 초겨울 날씨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흔이 푸르거나 붉은 빛이 열다섯 군데나 되니 이는 집단적으로 몰매를 당한 것이다. 머리나 옷가지가 흐트러진 걸 보면 주검은 구타를 당한 후 버려졌을 것이다."

즉시 갯버들 나무껍질을 덮어 위조된 상흔을 찾았으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주검은 몽둥이로 구타당했기에 가만가만 두드리면 상처는 피막이 분리돼 소리가 났다. 초(醋)를 뜨겁게 하여 몸에 덮자 잇단 상처가 나타났다.

사망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목뼈의 골절이었다. 겉옷과  머리카락에도 지푸라기가 묻어 있고, 어깨 어림의 살갗엔 일정한 무늬가 나타났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오랫동안 벌을 받을 때 나타난 상처흔(傷處痕)이었다.

닷새 만에 사헌부에 돌아온 서과는 지난해의 검시기록을 기록 보관실에서 찾아냈다. 북악산 자락에 사는 삼청동 김무학(金舞鶴) 선비의 검험기록이었다.

그의 집안은 유가(儒家)의 법통을 이어 받았으나 김무학의 부친 선일(仙佾)이 삼청관(三淸觀)이란 도관을 지었으므로 이곳에 들어오면 세 가지의 것이 맑아진다는 말이 떠돌았다. 산청(山淸) · 수청(水淸) · 인청(人淸)이 그것이다. 산이 맑고 물이 맑고, 사람이 맑으니 살기엔 더없이 좋다는 곳이다. 김무학은 이곳에 사는 선비지만 도가의 법술에도 뛰어나고 그곳에 사는 걸 크게 내세우며 자신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아하하하, 삼청동 골짜기는 그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도성 안에 이곳만큼 빼어난 곳은 없을 것이네. 삼청이 첫째고 둘째가 인왕이며 셋째가 쌍계 넷째가 백운이요 다섯째가 청학 아닌가. 나는 삼청에 사는 걸 크나큰 자부심으로 여긴다네."

김무학은 이렇게 말하면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잡혀간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삼청동에 대한 시를 음송했다.

삼청의 골짜기
그윽하고 넓은데
푸른 잔디 흰 돌 사이엔
맑은 시냇물만 흐르네

이처럼 호방한 김무학이 지난 해 초겨울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주]
∎사절(士節) ; 선비의 절개
∎파적위(破敵衛) : 조선시대 중앙군으로서 오위의 하나
∎양사(兩司) ; 사헌부와 홍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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