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솔직한 광부들의 입으로 예술의 가치를 묻다

[인터뷰] 연극 <광부화가들>의 라이언 역 맡은 배우 권해효

등록|2010.05.28 19:35 수정|2010.05.28 19:36
play

연극 <광부화가들>의 라이언 역 권해효 인터뷰 ⓒ 문성식


"개념 배우란 말도 있던데 이런 건 좀 불편한 말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공간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지향점을 드러내는 이런 것을 '개념'이라고 해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마치 개념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리니까요.(웃음) 그냥, 그런 면에서 참 우리가 후진적이란 거죠."

연극 <광부화가들>에 '라이언역'으로 출연중인 배우 권해효씨는 일부에서 그를 '소셜테이너(Socialtainer)'라고 부른다고 얘기해주자, "좀 이상한 조어이고 동의하기도 어렵죠"라고 잘라 말했다.

최근 커피당 모임을 제안하는 등 활발한 사회참여로 주목을 받은 그가 이번에 선택한 작품은 <광부화가들>. <광부화가들>은 2007년 영국 뉴캐슬 라이브 시어터에서 세계 초연된 작품인데 <빌리 엘리어트>란 영화와 뮤지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 있는 리 홀(Lee Hall)의 최근작이다.

<광부화가들>의 배경은 1934년 영국, 120만명의 광부들이 모여 사는 광산촌 애싱턴이다. 이 연극은 애싱턴 우드혼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이 그곳을 찾은 강사 로버트 라이언의 미술 강좌를 통해 직접 그림을 그리고 배우게 되면서 일어난 실화를 극화시킨 것이다.

권해효씨는 이 작품에서 광부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는 강사 라이언역을 맡았다. 지난 17일 오후 명동예술극장에서 권해효씨를 만나 연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다음은 권해효씨와의 인터뷰 전문.

에든버러 대학 작업실, 올리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라이언라이언은 올리버에게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으로 들어가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라이언에게 세상을 바꾸어 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을 하고 있는 라이언 자신은 과거에 광부화가들을 통해 얻어진 에든버러 대학 교수자리를 영위하고 있다. 진실과 위선이 동시에 나타나는 묘한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 (재)명동예술극장


- <광후화가들>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연출자와 인연이 있었어요. 인연은 길지만 이상우 연출과의 작업은 18년만이에요. 그동안 몇 번 작업할 기회가 있었지만 같이 한 적은 없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오랜만에 그런 제안이 기뻤어요. 시나리오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1930년대 영국에 실제 있었던 일이고 광부들이 그림을 그려서 영국 현대 화단에 던진 메시지가 컸던 그런 이야기다, 그것만 들었는데요.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어떤 배역일지도 몰랐고, 광부 중의 한 명이거니 생각했었습니다. 주변에서 좋은 작품이니 꼭 해보라고 권하기에(뛰어들게 됐죠)..."

- 미술을 소재로 한 연극인데요. 한 매체에 A+학점 받은 미술 교양과목 리포트를 대신 써준 적이 있다고 했다고 들었어요.
"네, 재수시절에(웃음) 여자친구 리포트를 대신 써 준 기억이 있는데 뭐 그런 거죠. 무슨 미술 (관련된)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고요. 실제 그 당시에 봤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무슨 독일 현대 미술 관련된 것 같아요. 그걸 보고 쓴 거였는데 저 역시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는데, 느낌에 대한 이해, 그런 걸 썼던 기억은 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우리 작품에도 '누구나 그림은 그릴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하지만 정작 아이들 키우는 과정에서 보면 애들이 미술이란 것에 대해 수업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림을 얼마나 자유롭게 그리는 줄 몰라요. 거침없이 그리죠. 그것이 수업이 되고 혹은 틀에 묶인 순간부터 아이들은 그림을 완성해 내는 것 자체를 굉장히 힘들어 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미술 교육이 있는데, 그 많은 대부분의 미술교육이라는 게 학교에서 요구하는 정답을 가르치는 방식이에요. 그 아이가 보이면 되는데, 그 아이는 다 빼 버리고 그런 걸(정답을) 자꾸 교육을 시키니까... 그건 미술이 아닌 거죠."

권해효리홀 원작 연극 <광부화가들>에서 라이언 역할을 맡고 있는 배우 권해효 ⓒ 문성식

- 그림 감상이나 구매 취미를 가지고 있나요?
"기회가 있으면 (미술관에)들어가 보는데요. 그게 몸에 배어야 하는데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까지 구매한 작품이 세 작품인데, 사진 한 작품 하고 평양 갔을 때 평양의 화가들이 그린 작품 하나 하고 그리고 시민 사회단체들을 위한 경매 행사에서 구매한 것인데, 다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정작 그림을 구매하려고 마음을 먹을 때, 아시잖아요? 지난 수년간 한국에서의 그림 시장이란 게 어떻게 대변되고 있는지. (그림이) 재테크 수단이나 경제적인 것들로만 인식돼서 왠지 구매한다는 행위 그 자체가 괜히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때론 이상한 거부감이 들 때가 있죠. 그리고 잘 모르겠어요. 자기가 맘에 드는 그림 사는 건 참 좋은데 그래도 참 이해가 안 가는 건 도대체 이 거대한 미술 시장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생각해 보면 좀... (웃음)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해요."

- 권해효씨는 이 연극이 꼭 미술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이 연극을 미술에 대한 걸로 보셔도 좋고요, 그런데 얼마 전 이 작품을 제일 먼저 한국에 소개하려고 애썼던 사람이고 실제로 리홀, 이 작가와 잘 아는 한 번역가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리홀의 표현에 의하면 이 작품은 지난 13년 동안 실정을 거듭했던 영국 노동당에 대한 통렬한 질타라는 거죠."

- 관객들이 이 연극에서 관심 있게 봐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나요?
"우리는 이 작품은 한국화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한국적으로 각색한다든지, 관객들에게 정서적으로 좀 더 편하게 다가가게 만들겠다든지 그런 접근을 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만들었어요)... 왜냐하면 좋은 작품은 좋은 작품 그 자체로 빛이 있으니까요.

어느 작품이든지 간에 시간과 공간 뛰어 넘어서 관객들에게 주는 공감대가 있을 거라 믿고 있는 그대로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는 선입견들에선 좀 벗어났으면 합니다. '광부가 무슨 양복을 입고 나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서양이니까, 그 사람들에겐 그냥 그게 옷인 거죠. 서구사회가 지금까지 오는 과정에 있어서 문화 복지라든지 민주시민들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쟁취한 게 아니고 끝없이 자기 교육과 혁신, 토론, 투쟁, 이런 것들이 계속 이어진 결과란 것을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이 작품이 실제 있었던 인물과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마음대로 각색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감동 중에 하나는 바로 실제의 인물들의 실제 작품을 우리가 감상할 수 있다는 거거든요. 그런 만큼 그런 한국적으로 각색하기 이런 거는 하지 않았습니다."

TATE 갤러리를 방문한 광부화가들광부화가들이 테이트 갤러리를 방문해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엔 광부들이 양복을 쫙 빼입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서양 사람인 그들에겐 그냥 일상복일 수 있다. ⓒ (재)명동예술극장


- 관객들이 보기에 이 작품은 특히 어떤 면이 더욱 매력적이라 느낄까요?
"이 작품은 특별히 어떤 특권층들을 꼬집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해왔던 우리 개개인 삶의 대한 질문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1장에서 라이언과 광부들이 처음 만나서 수업 내내 나눴던 대화들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한국 미술시장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우린 미술관이나 사진전을 보러 가서 솔직하게 '저게 왜 저런데'라고 묻고 싶었던 것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연극 속 광부들의 입을 통해서 하나 하나 통렬하게 물어보는 거죠. 저는 그런 것들이 관객들에게 쾌감처럼 다가올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작품 속에 미술에 대한 우리의 태도, 바라보는 방법, 우리가 즐기는 법, 이런 것에 대한 꼭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어떤 태도여야 될까에 대한 질문과 답에 포커스를 맞추면 굉장히 즐거운 관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 중에 하나는 무엇보다 이 공연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거죠. 중요한 건 노동자 그룹의 화가들이 어려운 시간 속에서 자기네 현실을 그리기도 하고 현실을 뛰어 넘는 꿈을 그리기도 하면서 매순간 작품을 완성시켜 나간다는 거죠. 70년 전의 화가들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배우 권해효를 소셜테이너(Socialtainer)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던데요?
"글쎄 모르겠습니다. 뭐 개념 배우란 말도 있던데 이런 건 좀 불편한 말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공간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지향점을 드러내는 이런 것을 개념이라고 해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마치 개념이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리니까요. (웃음) 그냥, 그런 면에서 참 우리가 후진적이란 거죠."

- 소셜테이너란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좀 이상한 조어이고 동의하기도 어렵죠."

- 다른 분들이 일방적으로 사회적 활동을 하는 배우라고 규정을 지어버리는 게 거북하신 건가요?
"단어를 가지고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재미없는 일인 것 같고요. 이런 거라 생각하시면 되는데, 제 직업은 배우고요. 배우로 먹고 사는 사람인데,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구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직장 쉬는 날 지역 환경을 위해 참여를 해서 NGO 활동을 하는 그런 것과 별 차이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단지 이제 대중적으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이라는 약간의 차이 정도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참여 말이죠.

첫 미술전시회를 열게된 광부들광부화가 집단인 애싱턴 그룹은 드디어 첫 미술전시회를 열고 라이언이 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 (재)명동예술극장


슬라이드를 보며 첫 수업을 받는 광부들라이언의 첫 수업시간, 광부들에게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보여주며 설명을 하고 있지만 광부들은 대체 저 그림들의 의미가 뭐냐며 불만을 토로한다. ⓒ (재)명동예술극장


-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이 연극 거의 막바지 부분에 라이언이 올리버에게 하는 말이 실제 배우 권해효가 하는 말인 것처럼 들렸거든요.
"라이언의 말은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히 궤변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굉장히 자기 합리화를 위한 궤변인데, 어쩌면 그 대사들을 보면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 드실 수도 있죠.

제가 그런 말을 하죠.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총 동원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데 우리가 그걸 포기하고 가진 놈들이 주는 것을 받아먹으면서 살겠다? 끝이야! 왜? 인구의 4분의 3이 권리를 박탈당한 사회에 문화란 존재하지 않으니까!"란 말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여러분들에게 여러 의미로 들려오나 보더라고요. 저건 라이언이 한 말이 아니라 권해효가 한 말 같다라든지."

그날 저녁 공연 준비로 인해 권해효씨와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TV와 영화,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는 배우이면서 또한 사회적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는 권해효씨는 극 중에 나오는 계급간의 대립이라든지 영국 노동당의 실정을 통렬히 비판하는 대목, 광부화가들이 추구했던 사회 변혁의 꿈들, 그리고 미술시장의 과도한 상업성이 낳은 부조리 등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작품을 만들어 가는 배우나 연출가가 보는 극에 대한 생각은, 그 결과로 만들어진, 배우들이 만들어 낸 무대를 객석에서 보며 느끼는 생각과는 항상 약간씩의 차이가 있는 편이다. 특히 관객들은 관객수 만큼이나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고 이 <광부화가들> 역시 보는 사람의 개인적 체험이나 경험에 따라 달리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 속, 특히 1막에서 라이언과 광부들이 나누는 담론 속에 등장하는, 생각하기 따라서는 아주 평범해 보이는 단어들조차 아주 약간이라도 미학을 공부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겐 하나 하나가 다 무거운 의미를 지닌 텍스트로 다가올 수도 있다. 반면 평소 미술에 대해 일반적인 상식 차원에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겐 오히려 쉽고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극의 연출을 맡은 이상우 감독은 관객들이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재미있게 만들려 노력했다고 하지만 동시에 다큐멘터리적 극의 특성상 원작의 분위기를 최대한 유지하려 하였기 때문에 느껴지는 건조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차라리 광부들이 함경도나 강원도 방언이라도 감칠맛 나게 구사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약간은 들었다. 비록 미술 이야기라지만 남자들만 나왔으면 조금 더 건조해졌을 이 이야기에 헬렌 서덜랜드와 수잔이라는 두 여성이 등장하여 양념 에피소드를 보탠 점은 매우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영국하면 셰익스피어는 잘 떠오르는데 반해 그림 하면 딱히 떠올릴 만한 화가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막장 탄광 속 광부들이 그림을 배우고 생활 예술가로서 예술가 그룹을 형성하고, 또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예술 활동을 영위하며 그들의 이상을 꿈꾸었다는 흥미롭고 놀라운 이야기로 전 세계에 영국의 미술을 알린다는 점은 약간은 얄밉단 생각이 들 정도로 참신하고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