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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예가 아닙니다" 시간강사 자살에 부쳐

[보따리강사 이야기 29] 유서에 담긴 그들의 처절한 현실

등록|2010.05.28 12:43 수정|2010.05.28 16:17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자였습니다. 사는 것이 고난의 연속이었기에 언젠가 교수가 되는 그날에 당신에게 모든 걸 용서받고, 빌면서 '이젠 당신과 함께 합시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미안해요."

전국 6만여 대학 시간강사들에게 날아든 참담한 비보가 그들의 암울한 처지를 더욱 무겁고 어둡게 한다. 교수 임용과정에서 잇달아 탈락한 10년차 동료 강사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과 함께 "채용 비리를 수사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발생한 때문이다.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비정규교수(영문과)로 근무해 온 서아무개(45) 강사가 지난 25일 오후 자신의 집에서 연탄불을 피워놓고 비정규교수로서의 힘겨운 삶을 마감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가족들의 슬픔과 비통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클 것이다. 그동안 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십 년 간 함께 인내하면서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가족들의 슬픔과 아픔 앞에 고인 또한 편하게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강사님들 힘내십시오, 그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 27일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조선대학교 분회는 '비정규교수 서아무개 강사의 자살에 대한 입장'이란 성명을 통해 시간강사 제도 철폐와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했다. ⓒ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조선대분회


전국 각 대학의 시간강사들도 큰 슬픔에 잠겨있다. 아직 한 학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 앞에 할 말을 잃고 있다. 고인이 죽음 앞에 남긴 유서에 담긴 내용은 그동안 수십 년 동안 반복돼 왔던 무거운 동병상련의 아픔이기 때문에 더욱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고인은 그동안 남편과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한 용서와 함께 애틋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유서에 남기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아내에게는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그러나 산다는 핑계로 남편 역할을 하지 못했어, 사랑해, 더 이상 내 힘으로는 이 현실을 견뎌낼 수가 없었어"라며, 아들과 딸에게는 "정말로 사랑한다, 너희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너무 착한 너희들이었기에 감사하면서 살았는데, 이런 비극이 오는구나, 그러나 힘내라"란 말을 남겼다.

고인은 또 전국의 시간강사들에게도 "힘내십시오, 그날이 오지 않겠습니까"라며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고 떠났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님께' 보내달라는 유서도 남겼다.

"교수 자리가 3억 원 이라는군요, 두 번 제의 받았지만..."

▲ 대학 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는 국회 앞에서 “대학 강사들의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며 수년 간 투쟁을 벌이고 있다. ⓒ 대학 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


"한국 사회는 썩었습니다. '교육(敎育)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지 않았습니까? 교수 한 마리(자리)가 1억5000만, 3억 원이라는군요. 저는 두 번 제의 받았습니다. 대략 2년 전 전남의 모 대학 '6000만 원', 두 달 전 경기도 모 대학 '1억 원'이더군요. 썩었습니다. 수사 의뢰합니다. 강사들 그대로 두시면 안 됩니다. 21세기형 사회입니다. 동기 부여하십시오. 누구든 교수는 될 수 없습니다."

고인은 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과 지도교수를 위해 그동안 무려 54편의 논문을 썼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고인은 "그럼에도 (교수님이) 내쫓으려 하신다"면서 "제자로서 (교수를)받들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세상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고 적었다.

한국 대학사회에 내재돼 온 고질적인 병폐를 지적한 것이다. 고인은 "교수님과 함께 쓴 논문이 대략 25편, 교수님 제자를 위해 박사 논문 1편, 한국학술진흥재단 논문 1편, 석사 논문 4편, 학술진흥재단 발표 논문 4편을 썼다"면서 "같이 쓴 논문 54편 모두 제가 쓴 논문으로, 교수님은 이름만 들어갔다"고 유서에 남겼다.

"나는 당신의 노예가 아닙니다. 부끄럽습니다. 학자로서의 인생을 살려고 했던 결과가 이 지경으로 추락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나는 스트레스성 자살입니다"란 고인의 유서 내용에 많은 강사들이 분개하고 있다.

27일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조선대학교 분회는 '비정규교수 서아무개 강사의 자살에 대한 입장'이란 성명을 통해 "고인은 유서에서 열악한 강사생활로 가족의 삶을 힘들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교수가 되면 시간강사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교수 채용을 조건으로 금품을 요구하는 대학사회 현실에 절망하였고, 또한 고인은 스승에게 수많은 논문을 헌상하고 주종관계의 모욕을 참았으나 돌아온 것은 배신뿐이었음을 고백하였다"고 전제했다.

이어 "제자를 종처럼 부려먹고 끝내 내치려는 못된 스승이 한없이 원망스러웠고 교수의 꿈을 돈으로 뭉개는 부패한 한국사회가 증오스럽다고 한탄하고 있다"면서 "고인은 끝으로 이런 자신의 한스러움을 노조가 대신 풀어달라고 당부하고, 전국의 시간강사들에게 좋은 날이 올 때까지 힘을 내라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다"고 덧붙였다.

"수많은 강사 죽인 시간강사제도 철폐하고 교원지위 회복할 것"

▲ 지난 5월 14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은 교육과학기술부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천대하는 교과부 장관 각성하라"며 "비정규직 착취 제도의 원형인 대학시간강사제도를 철폐하라"고 촉구했다. ⓒ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조선대학교 비정규교수노조는 "고인의 유서를 읽으면서 대학사회의 야만적 행동에 짓눌린 고인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지 못한데 대하여 송구스런 마음을 표하면서 몇 가지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내용을 대학과 교육당국에 요구했다.

▲첫째, 조선대학교 내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현수막을 게시하여 고인을 추모할 것 ▲둘째, 고인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 모교수, 논문대필 관련 등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대학과 비정규교수노조가 공동으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할 것 ▲셋째,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고인이 제기한 문제들을 밝히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유족과 상의하여 진행할 것 ▲넷째, 고인을 비롯한 수많은 대학강사를 죽인 시간강사제도를 철폐하고 교원지위를 회복할 것을 국회와 정부, 관련 사회단체에 요구한다 ▲다섯째, 부패하고 몰염치한 일부 교수들의 자성을 촉구하고 대학의 잘못된 연구 문화와 강사임용제도의 개선을 대학과 교육당국에 요구한다.

이로써 1988년 이후 9명의 강사가 교수임용 비리와 불합리한 강사제도, 이로 인한 생활고 등과 투쟁하다 끝내 자살했다. 이들은 유서에서 대부분 "노예 같은 강사의 신분과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했다. 그럼에도 대학들은 본체만체 할 뿐, 겉으론 진리, 정의, 자유, 창의, 사랑, 봉사 등을 표방하면서 속으론 돈, 성적, 학점, 건물, 상업, 경쟁 등에만 몰두하고 있다.

시간강사들은 대학 전체 강의의 55%가량을 담당하고 있다. 똑같은 강의를 하는데도 시간당 강의료는 평균 3만5000원 정도로 전임교수 임금의 10~20% 수준이다. 몇 개 대학을 빼고는 4대 보험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고도 전임교수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다하며 수모를 겪고, 언제 밥줄이 끊길지 모르는 고용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이에 한국비정규교수노조와 대학 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는 각 대학과 정당사무실 앞에서 또는 국회 앞에서 "대학 강사들의 교원지위 회복"을 요구하며 수년 간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1977년 지식인을 탄압하며 강사의 제한된 전임교수 승진이라는 병목을 통해 강사, 학생, 대학을 통제하는 완벽한 우민정책은 여전히 작동한다"며 "고등교육법 개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또는 1000일이 다되도록 국회 앞에 천막을 펴놓고 투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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