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이한 군인들,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다
[베트남 자전거 기행 ④] 남부 : 나짱에서 호치민
나짱을 출발하여 한 20여 km 가니 동보 계곡(Suoi Dong Bo)이 있는 꺼우힌 산(Nui Cau Hin)이 왼쪽으로 보인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우리 군대가 베트콩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우리 일행은 1965년 청룡부대가 상륙하여 주둔하고 이어 백마부대와 제2해병여단이 상륙한 항구도시 깜란(Cam Ranh)에 도착해 길가 카페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보아온 카페 중에 분위기가 제일 좋았고 커피 맛도 일품이었지만 커피 값은 가장 쌌다.
사고가 난 줄 알다
길가 노점에 야자열매가 보여 야자수를 마시며 쉬려고 멈추었다. 곧이어 다른 두 사람도 도착해 셋이 함께 있고 나머지 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미리 도착한 세 사람이 남은 한 사람이 오는지 지켜보고 있었고 자전거도 바깥에 잘 보이도록 서 있었으므로 절대 지나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는지 한 사람이 찾으러 나섰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찾으러 나선다는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한 나는 주변에 있는 오토바이를 수소문해 뒤에 타고 찾으러 나섰다.
점점 멀리 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 곳까지 거의 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되돌아오다 만난 경찰에게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려 했다. 통했는지 몰라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저 멀리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함께 간 베트남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오토바이를 다시 몰았다.
되돌아왔더니 그 베트남인은 찾으러 더 안 가느냐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쉬고 있던 곳에는 하나만 남고 다른 일행은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벌써 지나갔다는 전화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판랑(Phan Rang)까지 쫓아갔다.
판랑은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의 제2해병여단 제2대대가 미군이 건설하고 있는 비행장 경계에 투입되었던 지역이고, 1965년 11월에는 인근 까두산(Nui Ca Du)에서 전투도 했던 곳이다.
판랑 린선사 사건
1969년 10월 14일 남부 해안가에 있는 판랑 지역의 절 린선(Linh Son)사에서 한국군 한명이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하여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AFP 통신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고, 이어서 달아나는 여자 보살에게도 총을 쏜 후 시체를 모두 불태웠다. 마을에서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이 시신탈취에 대한 불안으로 시신을 인근 절로 옮겼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판랑 지역 전 학교가 휴학을 결의하고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12일이 지나서 시신을 화장할 수 있었고 절은 폐허가 되었다. 1998년에 새로 지어진 이 절에는 당시 죽음을 당한 스님들의 유골이 모셔진 3층탑이 있다고 한다.
피리 소리에 모여든 베트남 여인들
판랑을 지나니 흔히 보이던 길가에 민가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허허벌판이 계속된다. 작은 관목이 간간이 눈에 띄는 것이 사막임에 틀림없었다. 까나(Ca Na)로 들어서니 젓갈 냄새가 풍겨왔다. 마치 우리나라 충남의 강경 젓갈시장에 들어서면 나는 그 냄새와 비슷하다. 생선을 발효시킨 생선소스로 느억맘(nuoc mam)이라 한다.
끊임없이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해안가에 이르니 칵산(kach san, 호텔)이 나타났다. 이곳엔 여러 채의 방갈로가 해안가에 붙어있다. 통나무로 된 방갈로에는 침대가 둘 그리고 욕실이 있었다. 시설은 낡았으나 문만 열면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호텔서 운영하는 식당도 바닷가에 거의 붙어있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우리 전통피리를 꺼내 그동안 준비했던 우리의 아리랑처럼 많이 알려진 베트남의 민요를 불렀다. 식당서 일하던 여인들이 가까이 오며 따라 부르기도 하며 좋아한다.
외국어 교육 대신 그림을 배우자
매번 숙소에 갈 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전혀 영어를 하지 못하니 의사 전달하기 매우 어려웠다. 몸짓으로도 안 되자 다행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있어 그림으로 의사를 전달하니 알아듣는다. 세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을 세탁기 그림을 그려서 보여 주었다. 식당에서 맥주를 마실 때 땅콩이 필요하면 땅콩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땅콩을 따뜻하게 볶아서 갖고 온다. 물론 추가 비용은 내야 한다.
베트남에선 맥주를 주문하면 대부분 차갑지 않은 그대로 가져온다. 대신 맥주에 얼음을 타서 먹는다. 처음은 이상했지만 여러 번 반복하니 그것도 괜찮았다. 냉장고는 북쪽으로 갈수록 거의 없고 남부에 가서나 볼 수 있었다. 이때는 찬 맥주를 내오는 경우도 많았다.
음식점에서 물수건을 내올 때, 주문도 하지 않은 땅콩 같은 것을 음식 나오기 전에 내올 때 그것을 먹으면 값을 치러야 한다. 야속하기도 했지만 음식 낭비를 하지 않으니 바람직하게 생각되었다.
환상적인 조개구이 맛
이제는 완전히 남부에 접어들었다. 날씨도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다. 까나를 출발하니 어제처럼 사막이 이어진다. 가끔 도로는 소떼에 의해 점령되기도 한다. 23km 정도 가니 멀리 풍력발전기 5기가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완만하면서도 매우 지루한 언덕을 올라가니 바로 눈앞에 이 발전기가 보인다. 그 너머로 바다가 끝없이 펼쳐있다.
판티엣(Phan Thiet)에 도착하였다. 판티엣은 생선소스인 느억맘의 베트남 제일의 생산지이다. 저녁에는 산책하다 길가에서 조개구이를 먹었다. 베트남에서 먹었던 그 어느 음식보다 가장 맛있었다. 그러나 길에서 먹은 것치곤 가격이 비교적 비쌌다.
동쪽 해안을 따라가는 길은 끝나고 판티엣부터는 내륙으로 들어선다. 판티엣에서 롱칸(Long Khanh)으로 가는 길은 전체적으로 내리막이 이어져 자전거 타기가 쉬웠다. 해먹에 누워 쉬면서 흔들흔들 거리니 살살 잠이 오기도 하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저렴한 식대
롱칸에 들어서니 커다란 성당이 나타나 도시가 매우 커 보였다. 그러나 도심을 한 바퀴 둘러봐도 숙소가 보이질 않는다. 도심을 떠나 호치민 방향으로 가니 외곽 길가에 나응이(nha nghi, 민박집)가 보였다. 주인은 숙박비를 터무니없이 많이 불렀지만 우리는 또 반으로 깎았다.
혼자서 자전거 여행 중이던 태평양의 조그만 섬 바베이도스 출신의 사진작가가 우리와 같은 숙소에 묵었다. 그는 우리와 반대로 호치민에서 하노이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숙소 주변에 식당이 없어서 주인 딸에게 물어 택시를 불러 타고 나갔다. 그녀도 한국어를 조금하기에 물어보니 그도 역시 한국에 연수를 다녀왔다고 한다. 식당은 주변에서 아주 좋은 것이었다.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넷이서 맥주를 포함해 잘 먹었음에도 식대는 우리 돈으로 4만원 정도 나왔을 뿐이다.
1798km를 달려 호치민 통일궁에 도착하다
이번 여행에서 자전거를 타는 마지막 날이다. 롱칸에서 호치민까지는 아주 완만하지만 거의 내리막이다. 도로는 호치민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복잡해져간다. 거대한 교통물결이 호치민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다.
당시 사이공이라 불렸던 호치민에는 주월한국군사령부와 해군수송전대인 백구부대 그리고 공군지원단인 은마부대가 한국군이 철수하는 1973년까지 주둔했다.
드디어 호치민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고 사이공 강이 나타났다. 시내로 들어서니 탈것들이 모두 뒤엉켜 복잡하게 돌아간다. 목적지인 통일궁(Reunification Conference Hall)의 이정표를 찾아야 하기에 도저히 한 눈 팔 사이가 없다. 호치민의 중심부로 들어서니 일방통행이 눈에 많이 띈다.
마침내 통일궁에 도착하였다. 통일궁은 남베트남 정권 시절인 1966년에 지은 대통령 관저이다. 1975년 4월 30일 해방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옴으로써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베트남은 통일되었다. 지금은 일반에 공개되어 그 탱크를 포함하여 당시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있다.
하노이부터 호치민까지 공식적인 1690km 거리를 중간 중간 도시를 들락날락하며 현재까지 16일간 총 1798km를 달렸다. 하루 최대 172km에서 최소 70km 그리고 매일 평균 112km씩 달리며 마침내 베트남 남북 종단을 이루었다.
사고가 난 줄 알다
점점 멀리 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 곳까지 거의 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되돌아오다 만난 경찰에게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려 했다. 통했는지 몰라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저 멀리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함께 간 베트남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는 알았다는 듯이 오토바이를 다시 몰았다.
되돌아왔더니 그 베트남인은 찾으러 더 안 가느냐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쉬고 있던 곳에는 하나만 남고 다른 일행은 없었다.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벌써 지나갔다는 전화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판랑(Phan Rang)까지 쫓아갔다.
판랑은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의 제2해병여단 제2대대가 미군이 건설하고 있는 비행장 경계에 투입되었던 지역이고, 1965년 11월에는 인근 까두산(Nui Ca Du)에서 전투도 했던 곳이다.
판랑 린선사 사건
1969년 10월 14일 남부 해안가에 있는 판랑 지역의 절 린선(Linh Son)사에서 한국군 한명이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하여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AFP 통신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고, 이어서 달아나는 여자 보살에게도 총을 쏜 후 시체를 모두 불태웠다. 마을에서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이 시신탈취에 대한 불안으로 시신을 인근 절로 옮겼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판랑 지역 전 학교가 휴학을 결의하고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12일이 지나서 시신을 화장할 수 있었고 절은 폐허가 되었다. 1998년에 새로 지어진 이 절에는 당시 죽음을 당한 스님들의 유골이 모셔진 3층탑이 있다고 한다.
피리 소리에 모여든 베트남 여인들
판랑을 지나니 흔히 보이던 길가에 민가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허허벌판이 계속된다. 작은 관목이 간간이 눈에 띄는 것이 사막임에 틀림없었다. 까나(Ca Na)로 들어서니 젓갈 냄새가 풍겨왔다. 마치 우리나라 충남의 강경 젓갈시장에 들어서면 나는 그 냄새와 비슷하다. 생선을 발효시킨 생선소스로 느억맘(nuoc mam)이라 한다.
끊임없이 풍기는 냄새를 맡으며 해안가에 이르니 칵산(kach san, 호텔)이 나타났다. 이곳엔 여러 채의 방갈로가 해안가에 붙어있다. 통나무로 된 방갈로에는 침대가 둘 그리고 욕실이 있었다. 시설은 낡았으나 문만 열면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호텔서 운영하는 식당도 바닷가에 거의 붙어있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우리 전통피리를 꺼내 그동안 준비했던 우리의 아리랑처럼 많이 알려진 베트남의 민요를 불렀다. 식당서 일하던 여인들이 가까이 오며 따라 부르기도 하며 좋아한다.
▲ 피리 소리에 모여든 베트남 여인들 ⓒ 이규봉
외국어 교육 대신 그림을 배우자
매번 숙소에 갈 때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전혀 영어를 하지 못하니 의사 전달하기 매우 어려웠다. 몸짓으로도 안 되자 다행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있어 그림으로 의사를 전달하니 알아듣는다. 세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을 세탁기 그림을 그려서 보여 주었다. 식당에서 맥주를 마실 때 땅콩이 필요하면 땅콩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땅콩을 따뜻하게 볶아서 갖고 온다. 물론 추가 비용은 내야 한다.
베트남에선 맥주를 주문하면 대부분 차갑지 않은 그대로 가져온다. 대신 맥주에 얼음을 타서 먹는다. 처음은 이상했지만 여러 번 반복하니 그것도 괜찮았다. 냉장고는 북쪽으로 갈수록 거의 없고 남부에 가서나 볼 수 있었다. 이때는 찬 맥주를 내오는 경우도 많았다.
음식점에서 물수건을 내올 때, 주문도 하지 않은 땅콩 같은 것을 음식 나오기 전에 내올 때 그것을 먹으면 값을 치러야 한다. 야속하기도 했지만 음식 낭비를 하지 않으니 바람직하게 생각되었다.
환상적인 조개구이 맛
이제는 완전히 남부에 접어들었다. 날씨도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다. 까나를 출발하니 어제처럼 사막이 이어진다. 가끔 도로는 소떼에 의해 점령되기도 한다. 23km 정도 가니 멀리 풍력발전기 5기가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완만하면서도 매우 지루한 언덕을 올라가니 바로 눈앞에 이 발전기가 보인다. 그 너머로 바다가 끝없이 펼쳐있다.
판티엣(Phan Thiet)에 도착하였다. 판티엣은 생선소스인 느억맘의 베트남 제일의 생산지이다. 저녁에는 산책하다 길가에서 조개구이를 먹었다. 베트남에서 먹었던 그 어느 음식보다 가장 맛있었다. 그러나 길에서 먹은 것치곤 가격이 비교적 비쌌다.
동쪽 해안을 따라가는 길은 끝나고 판티엣부터는 내륙으로 들어선다. 판티엣에서 롱칸(Long Khanh)으로 가는 길은 전체적으로 내리막이 이어져 자전거 타기가 쉬웠다. 해먹에 누워 쉬면서 흔들흔들 거리니 살살 잠이 오기도 하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 해먹 위에서 휴식을 취하다. ⓒ 이규봉
저렴한 식대
롱칸에 들어서니 커다란 성당이 나타나 도시가 매우 커 보였다. 그러나 도심을 한 바퀴 둘러봐도 숙소가 보이질 않는다. 도심을 떠나 호치민 방향으로 가니 외곽 길가에 나응이(nha nghi, 민박집)가 보였다. 주인은 숙박비를 터무니없이 많이 불렀지만 우리는 또 반으로 깎았다.
혼자서 자전거 여행 중이던 태평양의 조그만 섬 바베이도스 출신의 사진작가가 우리와 같은 숙소에 묵었다. 그는 우리와 반대로 호치민에서 하노이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숙소 주변에 식당이 없어서 주인 딸에게 물어 택시를 불러 타고 나갔다. 그녀도 한국어를 조금하기에 물어보니 그도 역시 한국에 연수를 다녀왔다고 한다. 식당은 주변에서 아주 좋은 것이었다.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넷이서 맥주를 포함해 잘 먹었음에도 식대는 우리 돈으로 4만원 정도 나왔을 뿐이다.
1798km를 달려 호치민 통일궁에 도착하다
이번 여행에서 자전거를 타는 마지막 날이다. 롱칸에서 호치민까지는 아주 완만하지만 거의 내리막이다. 도로는 호치민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복잡해져간다. 거대한 교통물결이 호치민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다.
당시 사이공이라 불렸던 호치민에는 주월한국군사령부와 해군수송전대인 백구부대 그리고 공군지원단인 은마부대가 한국군이 철수하는 1973년까지 주둔했다.
드디어 호치민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고 사이공 강이 나타났다. 시내로 들어서니 탈것들이 모두 뒤엉켜 복잡하게 돌아간다. 목적지인 통일궁(Reunification Conference Hall)의 이정표를 찾아야 하기에 도저히 한 눈 팔 사이가 없다. 호치민의 중심부로 들어서니 일방통행이 눈에 많이 띈다.
마침내 통일궁에 도착하였다. 통일궁은 남베트남 정권 시절인 1966년에 지은 대통령 관저이다. 1975년 4월 30일 해방군이 탱크를 몰고 들어옴으로써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베트남은 통일되었다. 지금은 일반에 공개되어 그 탱크를 포함하여 당시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있다.
하노이부터 호치민까지 공식적인 1690km 거리를 중간 중간 도시를 들락날락하며 현재까지 16일간 총 1798km를 달렸다. 하루 최대 172km에서 최소 70km 그리고 매일 평균 112km씩 달리며 마침내 베트남 남북 종단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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