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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등재 앞둔 반구대, 사라질 위기에!

세계적으로 드문 유산 훼손 방치...몇 천년 역사 사라질 판

등록|2010.06.02 10:04 수정|2010.06.02 10:04
대한민국 울산광역시(과거의 울주군) 대곡리에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는 알려진 바 대로 1971년 12월 25일 성탄절날 발견되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일이라 세상이 떠들썩하게 즐거워하던 날, 대한민국 경남의 한 골짜기에서도 인류가 영원히 누릴 문화유적이 발견된 셈이라 우연하다고 하기엔 남다른 이유가 있을 법한 일이었습니다.

이 암각화는 대곡리 암각화로도 불리고, 반구대 암각화라고도 불리지만 후자가 더 유명합니다. 사실 '반구대'라는 명칭은 포은 정몽주와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고려말의 지조 높은 선비 정몽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만, 그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자객에게 피살당한 사실은 유명하나 이 울주, 더 정확히 말하면 언양까지 귀양왔다는 사실은 그다지 유명한 사실은 아닙니다. 포은 정몽주가 1376년 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반구대가 있는 곳 근처입니다.

그의 귀양살이는 1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 이처럼 깊은 산골에 나라에 이름을 울리던 인물이 들어오게 되자 경상도의 유생들은 꽤 흥분하여 그를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 정몽주는 작은 서당을 열어 이웃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유생들과 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 장소가 지금도 서재 형태로 남아 있는데, 그 이름이 '집청정(集淸亭)'이며 암각화를 만나기 직전 굽잇길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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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청정을 옆에서 본 장면입니다.)

정몽주가 귀양왔던 인연은 이 고장을 영남의 명승으로 만들었습니다. 실제 이 대곡천 주변은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먼 옛날 융기했거나 깎여 형성되었을 바위 절벽 아래로 대곡천이 휘감아 흐르며 그 유속을 잠시 늦추기에 개울 양 옆으로 너럭바위들이 널려있어 옛사람들이 풍류를 즐겼음직한 곳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반구대'입니다. 따라서 반구대는 대곡리 암각화가 있는 바위를 포함한 너럭바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한제국 말기 일본의 강요로 억지로 맺은 불평등한 조약에 분개하여 자결한 문인 송병선 (宋秉璿, 1836~1905)의 <연재집(淵齋集)>을 보면 이곳의 아름다움을 통도사와 함께 나란히 언급한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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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대곡천 가 구릉입니다. 집청정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목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가 지은 시로, 반구대를 소재로 한 것이 있습니다.

맑은 강 오랜 고을 앞을 거침없이 흐르니                     澄江一道古城前
그 강 위로 반구대가 솟아 만 겹 이내 사이에 있구나!  臺出澄江萬疊烟
반구대가 있어 작은 마을 이름이 되었고,                     賴有盤龜名小縣
연꽃 닯은 벼랑에는 그림들도 전한다네!                      蓮花十丈畫圖傳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卷1

이 시는 영남의 명승지 여덟 곳을 각각 칠언 절구 한 수씩 지어 병풍을 만든 것 가운데 언양 반구대를 읊은 것으로 마지막 여덟 번째 시입니다. 이 시에서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마지막 "그림들도 전한다"고 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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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를 건너편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사실, 반구대 주변에는 여러 문인, 풍류객들이 다녀가면서 바위에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 많습니다. 이는 오랜 전통이며 그렇게 새긴 글씨를 특히 각석서라고 하며 경우에 따라 매우 중요한 문화사 자료로 요긴한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글씨를 들먹이지 않고 '그림'을 말했습니다. 그 그림이란 더 연구해 보아야 하겠지만, 반구대 암각화를 가리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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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반구대 암각화)

사도세자가 바위에 새긴 글씨보다 그림을 언급한 것이 더 특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이것 한 가지는 사실로 보입니다. 18세기 사람들은 이곳 반구대를 생각할 때 어느 한 부분만 떼어내어 생각한 것이 아니라 대곡천, 바위절벽, 그 위에 새긴 글씨, 정몽주의 집청정, 그리고 <반구대 암각화> 모두를 하나의 유기적 실체로 여긴 사실입니다.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의 가치는 암각화 내용이나 새김, 혹은 갈아내는 기법을 포함하는 회화적 기법은 물론이요 반구대 일대의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에 그 무게중심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그 자리는 신석기 혹은 청동기 시대에 살았던 이들이 선택한 자리입니다. 그들은 태양의 위치, 강물의 흐름, 그리고 바위의 상태를 살핀 다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는 이후 우리 모두가 집을 짓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가게를 내거나, 사람이 죽어 묻어야 할 때 자리를 고르는 행위와 맥이 닿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삶의 현장이라는 말이지요.

실제로 <반구대 암각화>는 기념적이거나 기원, 주술적 의도를 담은 그림일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그 장소는 제의를 지내거나 엄숙한 의례를 여는 장소, 때로는 열정적인 축제를 펼친 무대가 되는 셈입니다. 흔히 말하는 원시종합예술의 무대가 되는 곳이니, 그 종합적 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 장소는 선사시대 한국인들의 예술이 펼쳐지던 무대로서 가치를 양보할 수 없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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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천은 말없이 흐르지만 이 아름다운 곳에 반구대도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현재, <반구대 암각화>가 사라질 위기에 있습니다. 모래가 눌려 만들어진 바윗돌이니 물에 약한 바위재질일텐데 해마다 몇 달씩 물에 잠겨 불려졌다가 겨울이면 말랐다가 하는 변화를 수십 년째 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쇠도 '피로 파괴'가 있다고 하는데 이 바위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암각화가 사라지면 우리는 선사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물려준 삶의 현장을 잃어버리는 셈입니다. 그들이 고르고 골라 엄숙하고 신성한 현장으로 만들어 대를 이어 물려주었던 그곳을 우리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없게 됩니다. 후손들은 책으로 본 그곳이 어쩌다 사라지게 되었느냐고 우리에게 물을 수 밖에 없을 터인데, 과연 우리는 무슨 말로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이는 단지 우리의 무안함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천 년 문화민족이라 자부하는 우리에게 순식간에 수천 년 역사를 잃어버리게 되는, 참혹한 수치를 안기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반구대 암각화> 근처에 전시관을 잘 지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모형'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실 가치를 비교할 수도 없는 가방 하나도 '진짜'와 '짝퉁'을 구별하고 차별합니다. '모형'은 '짝퉁'일 뿐입니다. 전시장은 암각화를 정밀하게 재생하여 실제 크기대로 걸어 놓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느낄 수 있는 그 현장의 느낌은 '절대' 전해주지 못합니다.

이는 제가 직접 가서 느낀 것입니다. 어릴 때 곤충 표본과 실제 살아있는 곤충의 차이라면 설명이 가능할까요? 그러므로 전시관의 암각화 모형으로 만족하라면 이는 너무나 후안무치하고 무지하며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요구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요구할 자격은 없습니다. 따라서 <반구대 암각화>는 그 자리에 제대로 있어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저나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자손들이 우리처럼 직접 그 장소에서 보고 느껴야 합니다.

비단, 이 암각화가 우리나라 그림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제쳐두더라도(그렇다고 해서 그 회화사적 의미가 적은 것은 아닙니다. 이 암각화가 없다면 우리 그림의 역사는 수천 년을 내려와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유서깊은 문화민족을 자부하는 우리에겐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겠지요), 선사시대 조상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 '가치', '참됨'이 오롯이 들어가 있는 이 아름다운 암각화를 그냥 무너지게 두고 볼 일일까요? 그런 '문화적 가치'가 과연 정치적 욕망에 희생되어도 좋을까요?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남에게 미룰 일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반구대 암각화>를 살리는 일은 단순히 바위그림 하나를 현상유지시키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우리 문화의 깊은 연원을 무지로 메우는 것을 막는, 가치있는 일입니다. 누구 개인, 소수의 집단을 위한 일도 아닙니다. 나와 여러분, 피아 없이 모두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평화를 실현하는 첫걸음이요, 김구 선생께서 생전에 강조하셨던 '문화강국'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벌써 10년입니다. 물질적 강국이 언제까지 세계를 이끌 수 있을까요? 60년 전에 김구 선생은 우리나라의 앞길은 '문화'에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혜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혜안을 증명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반구대 암각화>를 살리는 것이 그분의 혜안은 물론이요 우리의 앞날이 물질에 이끌리지 않고 수준높은 문화로 세계를 리드해 가려는 원대한 포부를 실천하는 첫걸음임을 당당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반구대 암각화>를 살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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