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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족'으로 몰렸던 '친노'의 화려한 부활

안희정·이광재·김두관 당선... "독선적 국정운영에 대한 심판"

등록|2010.06.03 08:01 수정|2010.06.03 08:03

▲ '폐족'으로 몰렸던 '친노'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왼쪽부터 이번 6.2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안희정 충남지사 후보, 이광재 강원지사 후보, 김두관 경남지사 후보. ⓒ 유성호


"친노는 폐족입니다.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2007년 12월 26일)

"이번 선거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이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복권이며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2010년 6월 2일)

안희정 충남지사 당선자의 말은 친노 세력의 '화려한 부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2007년 대선 참패 후 스스로를 조상이 큰 죄를 지어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폐족'이라 자책했지만, 2년 6개월 뒤 6·2 지방선거에서 '노무현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명박 정부 심판을 내걸고 출사표를 던진 이광재(강원지사)·김두관(경남지사) 당선자 역시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일궈내며 친노 세력의 정치적 복권을 알렸다. 한명숙(서울시장)·유시민(경기지사)·김정길(부산시장) 후보 역시 크게 선전했다는 평가다.

친노 세력의 대약진을 두고 "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이겼다"는 평가가 많다. "이명박 정부 탄생의 1등 공신"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던 친노 세력이 이명박 정부 심판의 선봉에 서며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역사 뒤편으로 퇴장하는 듯했던 친노 세력

친노 세력은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키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을 이끌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후 집값 폭등 등 잇단 실정으로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친노 세력의 짧았던 봄날은 빠르게 지나갔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당하는 등 이후 선거에서 전패를 기록하더니, 결국 2007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가 무려 531만 표 차이로 대패하며 정권을 내줬다. 안희정 당선자는 당시 "친노 세력은 대선 참패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밝혔다. 

이후 친노 세력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급기야 2008년 4월 총선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됐다. 참여정부에서 환경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친노 세력의 '맏언니'로 통했던 한명숙 후보 역시 낙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내 마음대로 차기를 지명하라면 한명숙"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당내 입지는 축소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좌희정' 안희정 당선자와 '우광재' 이광재 당선자 역시 대선 패배 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안 당선자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1등 공신이면서도 참여 정부 기간 아무런 공직도 맡지 못하고 감옥에 가더니, 18대 총선에서는 전과자 공천심사 배제 원칙에 따라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안 당선자는 당시 공천 배제를 받아들이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회환과 고통을 느꼈다"며 "환향녀가 조선에 돌아올 때 홍제천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것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했다는 옛날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열리길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불과 38세의 나이에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역임하고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하며 '살아남은 친노'로 불렸던 이광재 당선자는 2009년 3월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됐고, 결국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대선 직후 통합민주당을 탈당한 유시민 후보는 18대 총선에서 대구에 출마해 장렬히 산화했다. 참여정부 첫 행정자치부 장관 출신으로 지역주의 타파 시도로 '리틀 노무현'이라 불린 김두관 당선자 역시 낙선을 피하지 못했다. 친노 세력은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을 준비하는 듯했다.

친노 세력의 화려한 부활... 차세대 정치인으로 발돋움

▲ 야권단일후보인 유시민 국민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와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1일 오전 서울과 경기도가 접해 있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지하철 1호선 석수역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며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권우성


하지만 2009년 5월 검찰의 강압 수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서거하면서 친노 세력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당시 국민장 일주일 동안 전국 각지 분향소에 500만여 명의 추모객이 방문하는 등 추모 열기가 달아올랐다.

특히, 언론·인권 탄압, 세종시 수정안 추진, 4대강 사업 강행, 남북 전쟁 대결 국면 초래 등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으로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으로 바뀌면서 친노 세력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선거를 앞두고 한명숙 후보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수사·기소 등 이명박 정부의 친노 세력 옥죄기와 '노풍'을 삼킬 것으로 예상된 '북풍'의 영향 탓에 친노 세력의 고전이 예상됐지만, 결국 막판 대역전극을 이뤄내며 정치적 복권을 얻어냈다.

친노 세력의 약진은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 실정에 따른 노풍의 영향이 컸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은 "노풍이 생각보다 미풍이었다고 하는데, 노풍은 밑바닥 기저에 깔려 있었다"며 "티 나지는 않았지만 밑바닥 조류를 바꿨다, 1년 전 투표로 복수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은 조용히 그 약속을 지켰다"고 밝혔다.

한명숙 후보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민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고, 안희정 당선자 역시 "이명박 정권의 퇴행적 독선적 국정운영에 대한 심판"이라며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재평가와 복권의 의미도 있다"고 강조했다.

한 때 폐족으로 물렸던 친노 세력. 이들은 이번 선거 승리를 통해 향후 차세대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펼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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