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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44회)

성균관 살인사건 <1>

등록|2010.06.04 08:51 수정|2010.06.04 09:01
성균관은 인재양성을 위한 유학교육기관으로 그 기원은 주(周)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엔 천자의 도읍에 설치한 벽옹(辟雍)이나 제후의 도시에 설치한 반궁(泮宮)제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선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이나 신라의 국학(國學), 고구려의 태학(太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최고학부 이름으로 '성균(成均)'이라 했는데 이것은 고려 충렬왕 24년(1298)에 국자감을 개칭한 성균감(成均監)을 고쳐 부른데서 유래하나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관이라 다시 고쳐 부르며 유학 교육을 전담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왕조의 한양천도(漢陽遷都)에 따라 새로운 도읍지가 정해지고 동북부인 숭교방(崇敎坊)에 터가 정해져 태조 4년 공사가 진행돼 세 해 만에 완성됐다. 존경각(尊經閣)이란 도서관이 지어졌으며 반궁제(泮宮制)의 필수요소인 반수(泮水)는 성종 9년(1478)에 만들어졌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나라를 연 초기엔 150인이었으나 세종 11년(1429)엔 200명으로 늘어났으며 학생의 반은 상재생(上齋生), 반은 기재생(寄齋生) 또는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여 어린 학생들을 선발했다.

기재생은 사학생도로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해 입학한 승보기재(升補寄齋)와 조상이나 부친의 공적을 등에 업은 문음기재(門蔭寄齋) 등이 있다. 성균관은 관리후보생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니만큼 그 자격은 양반 사대부 집안의 자녀에 국한돼 있었다.

성균관에 들어온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로 나눠 기숙하며 아침 저녁 식사 때마다 식당에 비치된 명부에 서명한다. 이것이 원점(圓點)으로 계산하는 근거가 되는 데 아침 저녁 두 번 식당에 들어가 서명해야 1점을 받고 300점을 취득한 자 중 통산 300일 이상 기숙하며 공부한 유생에게 관시(館試)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진다.

성균관 유생들은 학령(學令)을 적용받는다. 이것은 성균관의 학칙으로 그 정신은 주자학에 있으나 윤리적 기초는 소학정신이다.

학령의 주요내용은 첫째, 경서시험과 제술시험을 실시해 그 성적을 연말에 종합해 식년시(式年試)에 참작한다. 둘째, 도가나 불교, 백가자집(百家子集)을 읽거나 고담이론(高談異論)을 좋아하는 자는 벌한다. 셋째, 조정을 비방하는 자, 스승과 나이 많이 먹은 자를 모욕하는 자, 권세에 아부하는 자, 주색(酒色)을 말하는 자는 벌한다.

넷째, 오륜(五倫)을 범하는 자, 절개를 굽힌 자, 교만한 자, 스스로 자랑하는 자, 사치한 자,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로 남의 환심을 사려는 자는 재(齋)에서 쫓아낸다.

다섯째, 강경시험(講經試驗)의 점수는 대통(大通) · 통(通) · 약통(略通) · 조통(粗通)으로 나누며 그 이하는 벌한다.

여섯째, 매월 8일과 23일은 정기휴일로 세탁하거나 부모를 찾아뵙는 여가를 준다.
일곱째, 해마다 품행이 방정하고 시무(時務)에 밝은 유생 한 두 사람을 천거해 서용한다.
유생들이 재학하는 동안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은 동 · 서재였으므로 그들은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통해 회장을 뽑아 장의(掌議)라 했다.

정조가 보위에 오른 후 서출의 생원이나 진사도 입학했는데 이들을 남헌(南軒)이라 했으며 그들은 양반이 아닌 남반(南班)이었다. 쉬는 날이 오면 유생들은 재회를 이끄는 장의의 안내로 주시관(主試官)이나 대사성 대감을 찾아뵙는 게 일반적인 일이어서 오늘도 예외없이 대사성 김은기(金殷寄) 대감 댁에 모인 것이다.

시회(詩會)는 한창이었다. 성균관의 호랑이 김은기 대감의 사랑채엔 때마침 내리는 겨울비에 묘탕(妙蕩)을 끓여 술잔을 들이키며 껄껄거렸다.

예로부터 어진 선비가 많이 살기로 이름난 건청동은 단종 대왕 때 김종서, 세조 대왕 때 정인지와 양성지, 명종 대왕 때의 노수신, 선조 대왕 때 유성룡을 비롯해 이순신, 원균과 같은 인물이 배출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평소 김은기는 자신이 건천동에 살고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했으나 요즘들어 시들해진 것은 연초를 전후로 일어난 심상치 않은 살인사건 때문이었다.

이날 모인 사람 가운데 멀리 청나라를 다녀온 이상원(李象垣)이란 유생의 흥미있는 견문록이 흥미를 끌었다.

"되놈의 나라에 갔다가 희한한 책을 여각에서 봤지 뭡니까. 제목이 <철경록(輟耕錄)>인데 책 내용은 이해가 가는 것이었어요. '사람의 집에 이거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간도(姦盜)를 불러들인다'는데 그게 되놈의 나라나 조선이나 어쩌면 똑같이 흥미를 끄는지요."

"간도라? 허허 그게 뭔가?"
"해서, 시생이 책을 살폈더니 바로 삼고육파(三姑六婆)가 아닙니까?"

처음 듣는 얘기지만 흥미가 일어나 누군가 황급히 물었다.
"삼고육파가 뭔가?"

뒷얘기에 뜸을 들이던 이상원은 그것들을 천천히 읊어냈다. 삼고란 여승인 니고, 여도사인 도고 그리고 점쟁이 여자 괘고였다. 육파는 방물장수인 아파, 중매쟁이 매파, 무당인 사파, 뚜쟁이 여편네인 건파, 여의사인 약파, 산파인 온파였다. 그것들을 열거해 놓고 이상원은 나름대로 뒤적거렸다.

"성균관 유생으로 고담이론을 들추는 건 학령에 위배되는 것이지만 시생은 서출이니 남반(南班)이 아닙니까. 그렇다보니 백가자집을 다뤄도 될 것으로 봅니다."

"어허, 누가 뭐랬는가. 어서 얘기나 해보게."
"그러지요. <철경록>의 저자가 집안을 소란스럽게 하는 분란의 싹으로 삼고육파의 아홉 가질 분류했습니다만, 가만 들여다보면 이 사람들은 세상의 온갖 쓴맛을 다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 아홉 가지 분류 안에 도사와 승려를 집어넣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일까요?"

그에 대한 답변은 역시 젊은 선비 오경하의 몫이었다. 그가 말했다.
"중원에선 일찍부터 바람과 물결을 남녀의 대비로 놓고 그걸 다스릴 사람은 도사와 승려라고 믿었기 때문 아니오?"

아닌 게 아니라 호색문학에는 남녀의 성적인 접촉을 낭성(浪聲)이라 했다. 물결이 출렁댄다는 뜻이다. 사람이나 짐승이 출렁대는 건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며, '바람났다'는 말은 여인이 흥분됐거나 그런 상태에서 즐겁게 내지르는 비명이란 설명이다.

"그러므로 낭(浪)은 짐승의 교미를, 바람(風)은 방사를 뜻하지요."

모두들 낄낄대고 웃어댈 때 김은기 대감 역시 자신의 사위로 점찍은 오경하의 농질을 예사롭지 않게 지켜보았다. 어디 그뿐인가. 아무리 고관대작이 있는 자리라 해도 양반이 아닌 남반(南班)으로 저렇듯 호기롭게 얘길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사내라면 저만한 배포는 있어야 했다. 그러한 느낌을 이상원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노대감의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슬쩍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이다.

그가 서출인데도 이런 자릴 낄 수 있었던 건 청나라를 오가며 심심찮게 진귀한 물건을 가져온 데다 낯선 이국의 정서를 은근슬쩍 풀어헤치는 염담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시생이 본 성의학(性醫學) 고전엔 '거북이 머리'니 '큰 구렁이'를 '밀운(密雲) 속의 용'으로 풀어헤칩니다. 거북이 머리나 큰 구렁이는 여러분들이 여러 번 들은 것이고 여기에선 '밀운 속의 용'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밀운은 여인의 질 내부를 감싸는 성스러운 계곡의 주름무늬를 뜻합니다. 그런 이유로 사내가 힘있게 여인의 몸에 진입하는 것을 중원의 호색문학에선 용이 여의주를 무는 모습으로 풀이합니다."

이제 첫걸음을 뗐는 데도 좌중은 낯이 상기된 채 가라앉았다. 그가 이런 얘길 할 때는 어떤 처방이 반드시 따랐기에 유생들은 이런 얘길 할 때는 얌전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귀는 항상 열어 두었었다.

용은 신령한 동물이다. 어지간한 일엔 화를 내지 않지만 사납게 치달아오르면 불길을 마구 토해낸다. 왤까? 누군가가 자고 있는 용의 수염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내의 역린(逆鱗)이란 게 뭘까요? 재물이나 관직일까요? 아닙니다. 가끔은 그런 분도 있겠지만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용이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을 자는 용. 그것을 깨워야 가정이 화평하고 나라가 평안해 집니다. 안 그렇습니까?"

용을 깨우는 건 여러 의미가 있다. 강정(强精)에 효험있는 술을 마시거나 기력을 돋을 수 있는 약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린 한 사람이 불쑥 엉뚱한 소릴 하거나 강정주 얘기로 돌아서면 분위기는 한층 눅눅한 상태로 젖어들기 마련이어서 한겨울 사랑방의 한담(閑談)으로 격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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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엔 앙상한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석원은 거리의 앙상한 가지들을 눈여겨보며 문득 감회에 빠져들었다. 예닐곱 때였을 것이다. 항상 병상에 누운 어머니는 자신이 서당에서 돌아올 때 쯤이면 아픈 몸을 이끌고 연못가에 나와 있었다. 사시절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어머니를 맞이한 건 연꽃이었다.

"너는 연꽃 같은 처녀에게 장가들어라. 그런 여인은 상대를 지치게 하지 않는다. 일년 사시절 한 번도 같은 모양이 아니나 그렇다고 모습을 달리해 사람을 맞지도 않는다. 좋은 것과 싫은 게 분명하지만 연꽃은 사람을 기다리고 그 사람을 위해 갖가지 모습으로 맞지 않더냐."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던 어머니의 병환은, 아버지가 첩실을 집안으로 들이면서 급속도로 악화됐다. 배가 다른 동생과 세 살 터울인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시련이었다.

마음의 쓸쓸함을 심호흡으로 추스르며 적이 한숨을 몰아쉬며 어머니의 쓸쓸한 모습을 되새길 때였다. 차가운 바람을 비집으며 중년 여인이 다가왔다.

"저기 도련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흔이 넘어 뵈는 여인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말문을 열었다.
"저는 김은기 대감의 따님 정화(貞和) 아가씨와 혼담이 오고가는 오경하 선비님의 유모랍니다. 어릴 때부터 젖어미로서 키워왔기에 도련님의 심성은 쇤네가 잘 알지요. 더구나 도련님은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으니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다 가끔 그 댁에 들려 아가씨도 몇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혼담이 오고 갔는데 갑자기 우리 도련님 댁에서 혼례를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그러니 도련님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요?"
"도련님께 한 가지 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술시(戌時)가 지나면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갈 것이니 뒷담을 넘어 별당으로 들어가 아가씨께 이 함(函)을 건네주면 됩니다. 도련님, 어려운 일인지는 알지만 이곳에 묘방이 있습니다. 그리 해주시면 향갑(香匣)을 사례로 드리겠습니다."

중년 여인이 건넨 향갑(香匣)은 한 눈에 봐도 진기하게 치장된데다 뿜어나오는 향기가 아련히 코끝을 자극했다. 뜨거운 바람이 마음속을 몰아갔다. 그렇잖아도 일주일 후면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忌日)이다. 무덤 앞에 이런 고급 향을 피운다면 그 얼마나 정겨워하실까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더구나 지금은 급한 일도 없었다.

"도련님, 그리 해주시겠습니까?"

[주]
∎반궁(泮宮) ; 조선시대 때 성균관과 문묘를 함께 이르는 말
∎반수(泮水) ; 泮水는 泮宮의 물이다. 諸侯의 學宮과 鄕射의 學宮을 泮宮이라 이르는데, 그 동서와 남방에 물이 있어서 형상이 半璧과 같으니, 그 辟廱에 반이 되므로 泮水라 하고 궁의 이름까지 삼은 것이다.
∎묘탕(妙蕩) ; 해물탕
∎건천동(乾川洞) ; 고지도에 나타난 건천동(乾川洞)은 낙산 밑, 삼청동입구, 남산밑 인현동의 셋이다. 마른내길이라 하면 을지로 3가를 가리킨다.
∎옥구(玉鉤) ; 옥으로 된 장신구. 보통 부부생활에 요긴하게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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