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한 여승과 어울리지 않은 조우
[역사소설 민회빈강37] 의심을 풀지 못하는 군주
▲ 홍화문창경궁의 정문이다 ⓒ 이정근
빈양문에 국청장이 설치되었다. 동궐에는 홍화문을 비롯한 많은 문이 있지만 궁궐 안과 밖을 확연하게 구분 짓는 문이 빈양문이다. 임금이 가는 곳이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사관도 빈양문을 넘지 못했으며 실록의 임금동정 서두에 임금이 보여(步輿)를 타고 빈양문으로 나가 명정전 밖에서 연(輦)을 타고 능행길에 올랐다'라고 시작한다. 임금의 공식 행차의 시작점이자 종점이 빈양문이다.
명정전 바로 뒤쪽에 있는 빈양문을 통과하면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등 왕과 왕비, 후궁의 공간이 있고 시문을 즐길 수 있는 함인정이 있으며 숲이 울창한 후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밖으로는 공식행사가 펼쳐지는 명정전과 편전으로 사용하는 문정전, 왕의 사랑방이라 할 수 있는 숭문당이 있다.
인조가 빈양문에 국청장을 마련한 데는 이유가 있다. 궁 내부의 일이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내명부의 일이지만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공개한다는 뜻이다. 친국이 실시되었다. 최복을 갖춰 입은 임금이 자리를 잡고 대소신료와 삼성 장관이 입시했다. 내사옥에서 고문당하여 정강이뼈가 으스러져 걷지도 못하는 혜영이 업혀 나왔다. 머리를 빡빡 깎은 여승이 임금의 친국을 받는 일은 최근에 없던 일이다.
▲ 빈양문천랑으로 명정전과 연결되어 있다 ⓒ 이정근
"어디에 있는 승니(僧尼)냐?"
"철원 보개산에 있습니다."
익선관을 쓴 임금과 삭발한 여승. 뭔가 어울리지 않은 조우가 시작되었다.
"법명이 무엇이냐?"
"혜영입니다."
"강씨를 어떻게 알았느냐?"
"세자저하의 완쾌를 비는 불사를 드리려고 저희 암자를 찾아주시어 알게 되었습니다."
가시밭길에서도 살아서 돌아온 소현세자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귀국 2개월 만에 쓰러졌다.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 33세의 젊은 장정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사경을 헤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8년간의 볼모생활을 의연하게 견뎌 온 세자가 진정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은 심양에서 북경 가는 길이었다.
패주하는 명나라 군을 뒤쫓는 청나라 군과 동행한 세자는 낯선 풍토에 시달려야 했고 보급사정이 좋지 않아 직접 식사를 해결해야 했으며 패잔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자금성에 입성한 청나라 황제가 귀국을 허락하여 북경에서 다시 한성으로 수 천리 머나먼 여정을 건강하게 버텨온 세자가 쓰러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세자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병명은 학질이라 하지만 모기가 매개하는 학질이 2월에 발병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아비가 몸져 누웠지만 세자빈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인의 장막 속에 가려진 세자는 세자빈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어의가 있었지만 소의 조씨의 사주를 받은 이형익이 세자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세자빈은 보이지 않은 힘에 빌어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 때 찾은 곳이 신통한 효험을 보인다는 보개산 약사암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만났느냐?"
"서너 번 만나 뵈었습니다."
"강씨가 찾아 왔더냐?"
"소승이 궁궐로 찾아뵈었..."
말끝을 잇지 못한 혜영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이 년이 어느 안전이라고 그러느냐?"
도사가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혜영의 눈에는 그 눈이 보이지 않았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비몽사몽간을 헤매던 혜영이 침을 흘리며 고개를 떨어드렸다. 형리들이 달려들어 고개를 바로 세웠으나 다시 무너졌다. 물을 끼얹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혜영이 깨어났다.
거짓이면 여기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지나해 섣달, 궐에 들어왔을 때, 강씨에게 받은 것이 무엇이냐?"
"보자기에 싼 상자였습니다."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
"아기 시체가 들어 있었습니다."
"참이냐?"
"네."
"거짓이면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네."
"다시 한 번 묻겠다.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
"아기 시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들어 있었느냐?"
"아기 시체의 가슴에 복원용왕수신 애련제도(伏願龍王水神 哀憐濟度)라는 글씨가 있었고 붉은 비단으로 만든 조그만 주머니에 나비 모양을 새긴 패옥(佩玉)이 있었습니다. 이밖에 다른 물건은 없었습니다."
"아기 시체를 어떻게 하였느냐?"
"처음에는 무슨 물건인지 몰라 말 등에 싣고 가다 양주에서 펼쳐보니 갓난아기의 시체가 있기에 한탄강에 던졌습니다."
"강씨가 물에 던져 달라고 하였느냐?"
"네, 깊은 강물에 던져 달라고 하~였~..."
말을 더듬거리던 혜영의 종아리에서 불그스레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혜영이 혈뇨를 방뇨한 것이다.
"이봐라, 이 죄인을 데리고 양주에 나가 시신을 찾아오도록 하라."
국청이 종결되었다. 인조는 양화당으로 들어가고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대소신료들이 수근 거렸다.
"사산한 것이 틀림 없구만."
"살아 나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정잡배나 할 짓입니다."
"시신을 찾으러 나간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 시신을 찾아오면 내손에 장을 지지겠수."
살아 나갔을 것이라는 의심을 풀지 못하는 인조
이튿날, 의금부 낭관이 혜영을 데리고 양주 한탄강 지류에 나갔다.
"어디에 버렸느냐?"
"시체를 던져버린 곳은 양주가 아니고 여기에서 1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포천에서 한탄강으로 흘러 들어오는 시내가 있습니다. 그곳에 버렸습니다."
금부랑이 양주·마전·적성·연천 네 고을의 수령들과 함께 장정과 어부 70여 명을 동원하여 투망으로 걸러내게 하는 한편, 사람들로 하여금 어깨동무하며 목이 닿는 곳까지 들어가게 해보는 등 여러 방법을 강구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금부랑이 돌아와 보고했다.
"죄인이 시신을 버렸다고 하는 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인조가 충청감사 임담에게 지시했다.
"바닷가 어부 중에 물질에 능한 자를 징발하여 급히 역마로 올려 보내라."
충청감사가 보낸 어부들을 양주에 보내 샅샅이 찾아보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처음에는 대탄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시내에 던졌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찾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마음이 간사하다. 죄인이 바른 말 할 때까지 추문토록 하라."
인조는 세자빈이 아들을 낳아 밖으로 빼돌렸다는 의심을 풀지 못했다. 어디엔가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계속된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모두 으스러진 혜영에게 신장(訊杖)이 가해졌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형신을 받던 혜영이 끝내 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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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輦)-임금이 타는 수레
승니(僧尼)-승려
천랑(穿廊)-벽채가 없는 곁채. 벽채 없는 행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