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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45회)

성균관 살인사건 <2>

등록|2010.06.08 10:21 수정|2010.06.09 11:22
"그러리다."
"그럼 향갑을 받으시지요. 아직 시간이 멀었으니 쇤네가 얘기 한 토막 해드리겠습니다. 우리 아가씨 얘깁니다."

중년 여인은 김은기 대감 댁을 향해 가며 입을 열었다. 가다가 쉬고 또 얘기를 나누며 길을 갔다.

"우리 아가씨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건 좋질 않다고 어떤 점쟁이가 말렸습니다만, 마음씨 고운 도련님 앞이니 얘길 해야겠습니다. 우리 아가씨가 태어난 그날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많았답니다. 오던 비가 그치고 동쪽 하늘에 무지개가 떴으니까요. 아가씨 부모님께선 여자 팔자가 셀 징조로 걱정이셨지만, 어느 날 집을 찾아온 노스님은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가씨는 나이 든 분에게 시집갔다가 두 번째로 만나는 사람과 일생을 함께하면 남자는 승승장구해 정승판서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요. 더군다나 우리 아가씨가 신기한 물건을 가지고 태어나신 걸 어찌 알았는지 모르지만요."

그 얘길 들으니 귀가 솔깃해졌다. 태어날 때 무언가를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는 게 있을 수 있느냐였다.

"아니, 벌거숭이 몸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 뭔가를 가지고 나왔습니까?"

여인의 얘긴 천연덕스럽게 이어졌다.

"그럼요, 우리 아가씬 귀하디 귀한 옥구(玉鉤)를 가지고 태어났답니다. 옥은 나쁜 기운을 없애주고 좋은 기운 몰아주는 상서로운 물건이죠. 그런 물건이 아가씨가 태어날 때부터 몸에 있었으니 얼마나 상서로웠겠어요. 용모 또한 빼어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금방까지 화기를 띠던 중년 여인의 표정이 시들해졌다. 그토록 영명하고 총기 있는 아가씨인데 왜 신랑댁에서 혼례는 안 된다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움을 보였다.

"사람이란 게 그렇답니다. 아무리 세상살이에 자신 있다 해도 운명적으로 거역하는 관계가 사주에 나타난답니다. 그래서 정화 아가씨의 사주(四柱)를 놓고 시구문 옆에 사는 점쟁이가 그런 얘길 한거죠. 좋지 않은 기운이 틈 타고 있으니 형상이 거북일 닮은 자에게  일신을 의탁하는 게 좋다고요. 그런데도 아가씨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답답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쇤네가 도련님께 긴소리 짧은 소리 해가며 부탁드리는 것이지요."

이런 저런 사연을 듣다보니 이석원의 마음에 화르르 불길이 일어났다. 과연 정화 아가씨는 어떤 모습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비가 사납지 않고 추적추적 내렸지만 시야를 흐릴 정도는 아니었다. 사전에 집안 구조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뒷담을 넘어 여인이 가리켜준 별당 앞으로 다가갔다. 여인의 말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정화 아가씬 무척 담대하답니다. 일기가 고르지 않은 밤이라도 술시(戌時) 어림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니 불이 꺼졌다 하여 이상히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아가씨께 이 물건을 주고 나오실 동안 제가 담 밖에 기다리겠습니다.'

이석원은 문 앞에 이르러 큼큼대며 방안 기척을 살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방문을 밀어보았더니 열렸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자세를 낮추며 속삭이듯 불렀다.

"아가씨, 유모 심부름 왔습니다."

더듬거리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갔다. 서너 걸음 걷자 섬찟한 느낌이 전해지며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피냄새였다. 엉거주춤 물러서는 그의 몸이 문지방에 걸리며 우당탕탕 소릴 내며 넘어졌다. 집안을 돌아보던 횃불 든 사내가 몸채 쪽에서 달려왔다. 정자관을 쓴 이도 있었다. 이집 주인 김은기였다. 덩치 좋은 하인들이 손에 몽둥이를 든 채 곁을 따랐다. 이윽고 불을 밝힌 방안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피는 군데군데 떨어진 채, 반라의 몸으로 목이 졸려 죽은 건 정화 아가씨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서 관아에 연락하라!"

급보를 받고 현장에 나타난 정약용에게 김대감이 반색했다.

"자넨 정수찬 아닌가?"
"그렇습니다."

"허어, 이 무슨 일인가. 내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잠시 들어가 계십시오. 시생이 주위를 둘러보겠습니다."

검시기록을 작성하기 전인데다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으므로 일단 집안사람들 얘기부터 들었다.

"이곳을 별당이라 들었습니다만, 하루 종일 사람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곳 아닙니까?"
"성품이 차분한 아이라 그렇게 지내는 걸 좋아했어요. 이런 말 하기엔 쑥스럽지만 정화는 비 내리는 밤이나 눈 내리는 겨울밤엔 잠을 자지 않고 경색(景色)에 취하는 걸 좋아했어요."

관원들에게 주위를 지키게 하고 사랑채로 안내돼 상황을 전해 들었다. 저녁이 오기 전까지 이곳에선 시회가 왁자하게 열렸었다. 젊은 선비들의 용출하는 시구를 듣는 것만으로 값어치가 충분한 하루였는데, 집안에 피 뿌리는 일이 일어났으니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이보시게 정수찬, 평생을 살아오며 남에게 해 끼친 일이 없는데 무슨 연유로 이런 사단이 일어나는 지 알수 없네. 나는 선대왕 때나 지금이나 당쟁의 실마리를 제공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네. 임오년 그 난리에도 병을 핑계 삼아 두문불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네. 벽파든 시파든 당쟁에 휘말려 은원을 쌓지 않았다니까. 그런데 이같은 일이 생겼으니 철없는 유생의 춘정탓이라? 어허, 딸아일 살해한 범인을 잡아 광에 가뒀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네만···, 이렇듯 자네가 왔으니 사실을 명명백백 밝혀주게."
"일단 주검부터 살피겠습니다. 자세한 얘긴 그때 가서 듣겠습니다."

정약용이 별당으로 나가자 뒤늦게 당도한 서과가 검험을 시작했다. 익숙하게 영초를 바르고 다시 감초 즙으로 닦아내 상흔을 살폈다. 군데군데 멍 자국과 상흔이 나타났다.

"상처는 가슴 부위와 목에 있습니다. 상흔 어귀의 피육은 피가 있기 마련인데 그게 보이지 않고, 내막(內膜)이 뚫리고 살이 벌어졌습니다."

"허면?"
"도검의 상처는 나중에 베인 듯 싶습니다."

김은기 대감이 놀라 부르짖었다.
"나중이라니?"

이번엔 정약용이 물었다.
"언제인가?"

"사훕(死後)니다."
"죽은 뒤?"

서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부분을 가리켰다. 상처 부위였다. 한눈에 사인으로 지목되는 그곳은 가만가만 누르자 맑은 물이 나왔다. 주변 역시 건조하고 피가 없었다. 이것은 죽은 후 칼에 베인 상흔이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뭔가?"
"목뼈인 듯 싶습니다. 식도를 강하게 압박해 부러뜨렸습니다. 호흡 곤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은 강간치사(强姦致死) 때 나타나는 현상이긴 합니다. 그렇다 해도 이상합니다. 이곳은 외진 데다 낮에도 사람 왕래가 많지 않고, 집안 식구들 역시 발걸음이 뜸한 곳입니다. 그런 곳에 따님을 홀로 머물게 한다는 것은···."

"김대감 여식이라면 그만한 배포는 있어야겠지. 조금 전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구먼. 살아 있을 때라면 날마다 얼굴을 마주할 수 있으나 이미 세상을 버렸으니 죽은 이의 얼굴은 보기 싫으니 한시라도 빨리 옮겨가는 게 좋겠네."

"그렇잖아도 관아에서 주검을 실어갈 수레를 보냈습니다. 비가  뜸해지면 옮겨 싣겠지요."
"검시기록을 작성하게. 주검이 놓인 장소며 사인이 되는 곳의 위치는 빼놓지 말고 그려 넣게. 조금 전 감초 즙으로 닦은 주검에 난 상흔 길이와 너비, 깊이를 영조척으로 측정하고 그것이 기울어졌는지 반듯한 지를 살피게."

김은기가 이상하다는 듯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 사람 정수찬!"

"말씀하십시오."
"내 딸아이에게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따님은 목 뼈가 부러져 사망했습니다."
"허어, 이런 낭패가 있나. 딸아이 방을 들어온 유생 놈이 보따릴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 칼이 있었네."

"칼이라니오?"
"사랑채로 가세. 그곳에 흉기가 있으니!"

사랑채로 돌아온 김은기 대감이 꺼낸 든 건 은장도였다.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지만 은으로 꾸민 탓에 예사로운 건 아니었다. 피가 묻어 있는 칼날을 들여다보던 정약용은 좌우로 글자가 써 있는 걸 발견했다. 좌측엔 부(夫), 우측엔 시(示)였다.

"이 칼은 사헌부로 가져가야겠습니다."
"그리하게."

관원들과 사헌부로 돌아온 정약용은 해시(亥時)부터 범인에 대한 치죄를 시작됐다. 잔뜩 겁에 질린 이석원은 자신이 만난 중년 여인에 대해 털어놓았다.

"나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 여인이 선물로 향갑을 주고 함 안에 든 물건을 정화 아가씨께 주게 했다니까요. 그래서 난 뒷담을 넘어 별당에 간 거구···."

"들어가 보니 죽어 있더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함 속에 든 물건만 전해 달라기에 그런 것으로만 알았지요. 그런데 가서 보니 상황이 달라 있었어요. 김대감에게 보여줬듯 함 속엔 피 묻는 칼 한 자루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저는 모르는 일이고요."

집안사람들에게 붙들렸을 때, 어느 누구도 이석원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담장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년 여인이 있다고했지만, 그럴 때마다 김대감의 고함소리와 사나운 매질이 떨어졌었다.

"네 이놈! 담장 밖에 있는 계집은 또 누구냐? 선비된 자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할 일이로되 모른다고만 하니 될 법한 일이냐! 너 같이 파렴치한 위인은 사헌부 옥청이 아니라 이집 사옥에서 죽어나가리라!"

다행히 정약용 일행이 당도해 몽둥이 찜질은 멈췄지만, 그렇다 고 김대감의 분노가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이석원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결코 자신의 범행이 아니라했다. 이 일을 놓고 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약용은,

"여러분들도 보아 알겠지만, 간단하게 생각한 범행이 때론 깊은 수렁일 수 있네. 이번 일이 그렇다는 생각이 드네. 사람이 죽어 있는데 이석원을 보내 물건을 전달하게 하고···, 또 그 물건이라는 게 사람을 살해한 칼이란 점도 그것이네. 즉 피가 묻어있는 칼은 한눈에 이석원을 범인으로 몰고 가려는 잔재간이란 말이야. 살해된 정화 아가씨가 혼례를 앞둔 처녀임을 볼 때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자가 꾸민 일이라고 보기엔 당연하나 대사성 대감이 집은 성균관 유생들이 빈번히 오가다 보니 소문을 들을 수도 있잖은가."

겉으로 보기엔 정화 아가씨의 살해범으로 이석원을 몰아붙이기엔 합당한 조건이었다. 그를 이곳까지 안내한 중년여인이 있다고 하나 스스로 자신이라고 밝히며 나타나지 않은 이상 혐의는 지울 수 없었다.

정약용의 뇌리를 억누른 건 칼날에 쓰인 두 글자였다. 성균관의 수장 대사성 대감의 여식을 살해한 범인의 흉측한 경고 때문이었다. 그것은 상감의 마음을 못질하는 벽파의 계략으로 본 것이다. 칼날에 쓰인 글자는 이런 뜻을 담고 있었다.

부(夫)는 청부비거(靑蚨飛去) 인재토하(人在土下)로 풀어진다. 파란 강충이(靑蚨)가 날아갔으니(飛去) 재물이 없다는 뜻이고,  혼사에 나섰다면 가정을 꾸리기보다 재물에 욕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란 강충이에서 벌레가 날아가면 부(夫)만 남는데, 혼인을 하면 '흙(土) 아래 사람(人)이 있는' 불길한 모습이니 대사성 대감을 조롱하는 것이다. 시(示)는 훼기종묘(毁棄宗廟)로 풀 수 있으니 '가정과 나라를 욕되게 한다'는 뜻이다. '마루 종(宗)'에서 집(宀)을 깨뜨리면 시(示)가 남는 데 이것은 전하를 기망하는 것이 아닌가.

"저들은 전하의 치정에 맞서 싸우겠다는 것 아닌가! 4백년 동안 갈고 닦은 터전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정약용은 급히 필묵을 꺼내 전하께 심상치 않은 사건에 대해 글을 올렸다.

[주]
∎관시(館試) ; 성균관 유생에게만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준 문과 초시
∎도기(到記) ; 식당에 비치된 명부
∎해시(亥時) ; 저녁 10시경
∎강충이 ; 매미와 비슷하며 벼와 곡식의 진을 빨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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