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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5월 '교사도 아니면서 전교조 모임에 참석하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전교조 선생님들께 감사하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 글은 <오마이뉴스>에 '버금' 기사로 올라 꽤 많은 분들이 읽었고, 독자들의 찬반 댓글도 수십 개나 달렸지요.
그때로부터 그새 5년이 흘렀습니다. 세월 빠름도 새삼스럽게 아연한 느낌을 주고, 5년 전의 글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작은 경이감을 안겨주기도 하는군요.
2005년, 그때로부터 5년 만에 전교조 교사들의 모임에 다시 참석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전교조 교사인 아내가 태안 읍내 초등학교 전교조 선생님들의 모임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면서 나도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교조 선생님들의 일치된 뜻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얼마 전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의 전교조교사 명단공개 이후 전교조에 관한 말들이 분분하고, 수구 세력들이 전교조를 주요 표적으로 삼아 험악한 말들도 많이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전보다 수효도 많이 줄고,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을 겪는 분위기라고 했습니다. 또 지방선거가 임박해서 긴장감도 크고 하니, 지역 유지로서 전교조 모임에 참석하여 교사들에게 격려를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나로서는 고맙고도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나를 초대해준 것도 고맙고, 내가 참석하는 것이 큰 힘이 되지는 않겠지만 의기소침해 있는 교사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적이 뜻있는 일일 터였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1일 오후 6시 읍내의 한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15명가량 모여 있었습니다. 읍내 4개 초등학교에 전교조 선생님들은 도합 40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중에서 15명 정도가 참석했으니, 거기에서도 의기소침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또 선생님들 중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이들도 있어서, 아이들부터 밥을 먹인 다음 모든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놀아주는 일을 전담하는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가운데 자리에 앉았고, 또 잠시 일어서서 '격려사'라는 이름의 인사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인사말을 시작하면서 우선 내 아내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아내는 과거 '교총' 소속이었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내가 먼저 전교조에 대한 정보를 주었습니다. 현직 교사인 아내보다 교사도 아닌 내가 더 전교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덕이었습니다. 아내는 내 얘기를 충분히 이해하며 공감했고, 내 권유를 받아들여 전교조 교사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권유에 따라 전교조 교사가 된 아내, 이제 지역에서는 가장 연장자 급이 되어 후배 교사들에게 이런저런 힘이 되어주고 있는 아내는 진정 내게 고마운 반려였습니다. 아내에게 먼저 감사를 표한 다음에는 모든 전교조 선생님들에 대한 내 애정과 존경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저 일제로부터 내려오는 유습이 있습니다. 옳음과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이념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경직된 사고방식도 있습니다. 또 수십 년 동안 피 흘리고 땀 흘리며 발전시켜온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지향들을 마구 훼손하고 후퇴시키는 지리멸렬한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의 존립은 여전히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참교육의 가치 지표는 왜곡되고 폄훼되고 부정되기 일쑤입니다. 그에 따라 전교조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능히 각오하고 감수하며 전교조 교사로 존재하는 선생님들을 보면 나는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전교조 선생님들에게는 '개척'과 '수난'이라는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장엄한 의미가 결부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분들을 애정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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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6시, 나는 또 그 음식점을 갔습니다. 읍내 2개 중학교와 2개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1일 저녁 초등학교 선생님들 모임에 참석한 사실을 알게 된 중등부 회장 교사가 나를 정식으로 초대해주신 덕분입니다.
중등 선생님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읍내 학교들에 전교조 선생님들이 한때는 50명도 넘었는데 많이 줄어 현재는 30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일부 학교 교장들이 신규 교사들에게 전교조 가입을 차단하고 교총으로 유도하는 사례도 있어 회원이 쉽게 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0여 명이 참석했는데,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온 선생님들이 있어 여교사 한 분은 밖에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전담해야 했습니다. 나는 또 가운데 자리에 앉는 대접을 받았고, '지역의 어른'이라는 과분한 호칭도 들었고, 인사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6·2 지방선거'가 종료된 시점이라 중등부 선생님들의 모임 자리에는 긴장감 대신 활기가 넘쳐흘렀습니다. 아쉬움 속의 승리감을 반추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나는 개표방송을 보느라 꼬박 밤을 새우고 또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는 이상한 체력 현상을 자랑(?)하면서 1991년 여름의 '서남중사태'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태안군 남면지서장의 안보강연 내용이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88년)'과 '남북한통일방한(89년)' 내용과 너무 많이 달라서 그 부분에 대해 서남중학교의 한 교사가 지서장에게 질의를 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 서남중사태였습니다. 거의 모든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가 교실로 난입하기도 하고, '의식화 교사' 처벌을 요구하는 전무후무한 집단행동을 벌였습니다. 그 집단행동을 일으키고 진두지휘한 사람들은 보수단체 간부직을 맡고 있는 지역 유지들이었지요.
나는 일주일 정도 지속된 그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매일같이 현장에 가서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교사들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때 나는 군중심리의 무서움을 체감했지요. 집단적 몰이성과 오랜 세월 응고되어 온 이념적 관성의 두꺼운 벽을 가슴 시리게 확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뭔가를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선 당시 중학생이었던 자녀들이 자라면서 자기 부모들의 그런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명확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서남중학교의 학예발표회에서는 과거 학부모들이 크게 문제 삼았던 '남누리 북누리 온누리 하나 된 우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서남중사태가 마무리되었을 때 해당 교사들을 태안 읍내로 초대하여 막걸리 잔을 나눈 적이 있었지요. 그때의 막걸리 맛이 얼마나 슬프고도 좋았는지…. 그때의 그 막걸리 맛이 그립습니다. 그때 큰 고생을 겪었던 다섯 분의 선생님들은 지금 어디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혹 교단을 떠난 분은 없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1991년의 서남중사태을 소개한 끝에 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전교조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들이 많습니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저술 활동이 왕성한 유명 문인 한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최근 젊은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일으킨 여성들은 인터넷 상에서 개똥녀, 루저녀, 막말녀, 발길질녀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 젊은 여성들의 소행을 전교조와 연결 짓는 시각이 그분 글 중에 있었습니다. 우리 교육이 잘못된 탓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 잘못된 교육에 전교조를 끌어들이는 것이었지요. 우리나라 전체 교원 수가 4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중에 전교조 교사는 7만 명입니다. 그 7만 명이 40만 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시각이 가능한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교조를 바라보는 오해의 시선들 속에는 고의적인 음해와 악의적인 모략도 있다는 사실을 늘 유념하면서, 이런저런 공작들에 말려들지 않도록 전교조 교사들 모두 바른 품행에 더욱 신경을 쓰고, 참 교육의 실체를 잘 구현해 나가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 후 전교조 교사들의 모임 자리에서 재미있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한 젊은 여교사는 여고 시절 전교조 교사였던 담임선생님에게서 인격적으로 배운 것이 많고 감명을 많이 받아 그 기억 때문에 전교조에 가입했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또 한 명의 젊은 여교사는 대학 시절 민주화라는 화두를 놓고 열심히 토론도 하고 학보사 기자로 뛰었던 그 기질을 유지하고 싶어 전교조에 가입했노라고 했습니다.
민주주의 실현과 참교육․참생명에 대한 투철한 의식 공유가 좋고, 그 가치 지표를 향해 자신도 함께 나아가고 있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예전처럼 호탕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 잔치를 벌일 수 없는 내 건강 사정은 미안하고도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예전에 전교조 행사와 관련하여 시 한 편을 지었던 일을 기억해내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컴퓨터에서 그 시를 불러내어 읽어보았습니다. 2005년 11월 전교조 태안지회가 연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를 축하하며 지은 시였습니다. 5년 전의 그 시를 오늘 여기에 소개해 봅니다.
나는 안다, 손뼉의 의미를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를 축하하며
나는 안다
'참'이 무엇인지를
참되게 알려는 것이 참이고
참됨을 분별하려는 것이 참이고
참되게 살려는 것이 참임을
그리하여 나는 안다
참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참을 실천하는 것이 참이라는 것을
교육이라는 말의 뜻만을 알고 살았던 시절
교육이라는 숭고한 말 위에
참이라는 말이 얹어져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신선한 충격을 뿌리며
힘차게 언어의 창공으로 솟고라지고
마침내 무한한 생명력으로 존재하게 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참교육 시대
나는 안다
참교육이 실은 참사랑이라는 것을
참되고 바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뜨겁고도 절절한 몸짓이라는 것을
저 암울했던 독재 시절
저 일제로부터 이어져 온
온갖 불합리한 비교육적 폐습 속에서
참교육이라는 뜨거운 가치 지표가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역사 발전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추동해 온 사실을
나는 안다
참교육을 향한 신념으로
역사 창조의 격랑을 일으키고
그 격랑 안에 고난과 희생의 실체들을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아로새긴
그 눈물겨울 역사를
그리하여 나는 안다
그로 말미암아 오늘
진정한 민주주의로부터 가능한
인간주의, 공동체주의, 생태주의라는
생동감 있는 언어의 실체들이
우리의 교단에서 다양하고 조화롭게
역동적으로 꽃피어나고 있음을
더불어 나는 안다
교육혁신의 대명제 안에서
오늘도 창조적인 다양한 시도와
활기찬 교육 실천들이
우리의 교단을 가멸게 하고 있음을
또 그것의 한 실체가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라는 이름으로
우리 고장에서 열린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안다
우리 고장의 많은 뜻 있는 이들이
현장 교사와 학부모들이
함께 기뻐하며 박수로 축복한다는 것을
더불어 힘차게 손뼉 치는 내 두 손 마디마디에
뜨거운 애정과 성원이 가득하다는 것을!
(2005년 11월 24일 오후 태안중학교에서 개최된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의 '개회식 및 문화행사' 시간에 직접 낭송)
지난 2005년 5월 '교사도 아니면서 전교조 모임에 참석하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전교조 선생님들께 감사하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 글은 <오마이뉴스>에 '버금' 기사로 올라 꽤 많은 분들이 읽었고, 독자들의 찬반 댓글도 수십 개나 달렸지요.
2005년, 그때로부터 5년 만에 전교조 교사들의 모임에 다시 참석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전교조 교사인 아내가 태안 읍내 초등학교 전교조 선생님들의 모임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면서 나도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교조 선생님들의 일치된 뜻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 태안중학교 교장실에서2005년 11월 24일 전교조 행사 관계로 태안중학교 교장실을 찾았다. 당시 교장이었던 안홍렬 시인과 함께. ⓒ 지요하
얼마 전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의 전교조교사 명단공개 이후 전교조에 관한 말들이 분분하고, 수구 세력들이 전교조를 주요 표적으로 삼아 험악한 말들도 많이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전보다 수효도 많이 줄고,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을 겪는 분위기라고 했습니다. 또 지방선거가 임박해서 긴장감도 크고 하니, 지역 유지로서 전교조 모임에 참석하여 교사들에게 격려를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나로서는 고맙고도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이 나를 초대해준 것도 고맙고, 내가 참석하는 것이 큰 힘이 되지는 않겠지만 의기소침해 있는 교사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적이 뜻있는 일일 터였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1일 오후 6시 읍내의 한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15명가량 모여 있었습니다. 읍내 4개 초등학교에 전교조 선생님들은 도합 40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중에서 15명 정도가 참석했으니, 거기에서도 의기소침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또 선생님들 중에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이들도 있어서, 아이들부터 밥을 먹인 다음 모든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서 놀아주는 일을 전담하는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가운데 자리에 앉았고, 또 잠시 일어서서 '격려사'라는 이름의 인사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인사말을 시작하면서 우선 내 아내에게 감사하였습니다.
아내는 과거 '교총' 소속이었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내가 먼저 전교조에 대한 정보를 주었습니다. 현직 교사인 아내보다 교사도 아닌 내가 더 전교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덕이었습니다. 아내는 내 얘기를 충분히 이해하며 공감했고, 내 권유를 받아들여 전교조 교사가 되었습니다.
남편의 권유에 따라 전교조 교사가 된 아내, 이제 지역에서는 가장 연장자 급이 되어 후배 교사들에게 이런저런 힘이 되어주고 있는 아내는 진정 내게 고마운 반려였습니다. 아내에게 먼저 감사를 표한 다음에는 모든 전교조 선생님들에 대한 내 애정과 존경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저 일제로부터 내려오는 유습이 있습니다. 옳음과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이념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경직된 사고방식도 있습니다. 또 수십 년 동안 피 흘리고 땀 흘리며 발전시켜온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지향들을 마구 훼손하고 후퇴시키는 지리멸렬한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교조의 존립은 여전히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참교육의 가치 지표는 왜곡되고 폄훼되고 부정되기 일쑤입니다. 그에 따라 전교조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능히 각오하고 감수하며 전교조 교사로 존재하는 선생님들을 보면 나는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전교조 선생님들에게는 '개척'과 '수난'이라는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희생'이라는 장엄한 의미가 결부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분들을 애정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3일 오후 6시, 나는 또 그 음식점을 갔습니다. 읍내 2개 중학교와 2개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1일 저녁 초등학교 선생님들 모임에 참석한 사실을 알게 된 중등부 회장 교사가 나를 정식으로 초대해주신 덕분입니다.
중등 선생님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읍내 학교들에 전교조 선생님들이 한때는 50명도 넘었는데 많이 줄어 현재는 30명 정도라고 했습니다. 일부 학교 교장들이 신규 교사들에게 전교조 가입을 차단하고 교총으로 유도하는 사례도 있어 회원이 쉽게 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0여 명이 참석했는데,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온 선생님들이 있어 여교사 한 분은 밖에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전담해야 했습니다. 나는 또 가운데 자리에 앉는 대접을 받았고, '지역의 어른'이라는 과분한 호칭도 들었고, 인사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전교조 행사2005년 11월 24일 태안중학교에서 열렸던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발표회'의 한 장면이다. ⓒ 지요하
'6·2 지방선거'가 종료된 시점이라 중등부 선생님들의 모임 자리에는 긴장감 대신 활기가 넘쳐흘렀습니다. 아쉬움 속의 승리감을 반추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나는 개표방송을 보느라 꼬박 밤을 새우고 또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는 이상한 체력 현상을 자랑(?)하면서 1991년 여름의 '서남중사태'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태안군 남면지서장의 안보강연 내용이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88년)'과 '남북한통일방한(89년)' 내용과 너무 많이 달라서 그 부분에 대해 서남중학교의 한 교사가 지서장에게 질의를 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 서남중사태였습니다. 거의 모든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가 교실로 난입하기도 하고, '의식화 교사' 처벌을 요구하는 전무후무한 집단행동을 벌였습니다. 그 집단행동을 일으키고 진두지휘한 사람들은 보수단체 간부직을 맡고 있는 지역 유지들이었지요.
나는 일주일 정도 지속된 그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매일같이 현장에 가서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교사들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때 나는 군중심리의 무서움을 체감했지요. 집단적 몰이성과 오랜 세월 응고되어 온 이념적 관성의 두꺼운 벽을 가슴 시리게 확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뭔가를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선 당시 중학생이었던 자녀들이 자라면서 자기 부모들의 그런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명확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서남중학교의 학예발표회에서는 과거 학부모들이 크게 문제 삼았던 '남누리 북누리 온누리 하나 된 우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서남중사태가 마무리되었을 때 해당 교사들을 태안 읍내로 초대하여 막걸리 잔을 나눈 적이 있었지요. 그때의 막걸리 맛이 얼마나 슬프고도 좋았는지…. 그때의 그 막걸리 맛이 그립습니다. 그때 큰 고생을 겪었던 다섯 분의 선생님들은 지금 어디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혹 교단을 떠난 분은 없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1991년의 서남중사태을 소개한 끝에 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전교조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들이 많습니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저술 활동이 왕성한 유명 문인 한 분의 글을 읽었습니다. 최근 젊은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일으킨 여성들은 인터넷 상에서 개똥녀, 루저녀, 막말녀, 발길질녀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 젊은 여성들의 소행을 전교조와 연결 짓는 시각이 그분 글 중에 있었습니다. 우리 교육이 잘못된 탓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 잘못된 교육에 전교조를 끌어들이는 것이었지요. 우리나라 전체 교원 수가 4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중에 전교조 교사는 7만 명입니다. 그 7만 명이 40만 명을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시각이 가능한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교조를 바라보는 오해의 시선들 속에는 고의적인 음해와 악의적인 모략도 있다는 사실을 늘 유념하면서, 이런저런 공작들에 말려들지 않도록 전교조 교사들 모두 바른 품행에 더욱 신경을 쓰고, 참 교육의 실체를 잘 구현해 나가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 후 전교조 교사들의 모임 자리에서 재미있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한 젊은 여교사는 여고 시절 전교조 교사였던 담임선생님에게서 인격적으로 배운 것이 많고 감명을 많이 받아 그 기억 때문에 전교조에 가입했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또 한 명의 젊은 여교사는 대학 시절 민주화라는 화두를 놓고 열심히 토론도 하고 학보사 기자로 뛰었던 그 기질을 유지하고 싶어 전교조에 가입했노라고 했습니다.
민주주의 실현과 참교육․참생명에 대한 투철한 의식 공유가 좋고, 그 가치 지표를 향해 자신도 함께 나아가고 있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예전처럼 호탕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 잔치를 벌일 수 없는 내 건강 사정은 미안하고도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예전에 전교조 행사와 관련하여 시 한 편을 지었던 일을 기억해내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컴퓨터에서 그 시를 불러내어 읽어보았습니다. 2005년 11월 전교조 태안지회가 연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를 축하하며 지은 시였습니다. 5년 전의 그 시를 오늘 여기에 소개해 봅니다.
▲ 측시 낭송2005년 11월 24일 태안중학교에서 열린 제1회'태안 참교육실천사례발표회' 기념식 자리에서 축시 낭송을 했다. 내가 보람된 일로 간직하고 있다. ⓒ 지요하
나는 안다, 손뼉의 의미를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를 축하하며
나는 안다
'참'이 무엇인지를
참되게 알려는 것이 참이고
참됨을 분별하려는 것이 참이고
참되게 살려는 것이 참임을
그리하여 나는 안다
참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참을 실천하는 것이 참이라는 것을
교육이라는 말의 뜻만을 알고 살았던 시절
교육이라는 숭고한 말 위에
참이라는 말이 얹어져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신선한 충격을 뿌리며
힘차게 언어의 창공으로 솟고라지고
마침내 무한한 생명력으로 존재하게 된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참교육 시대
나는 안다
참교육이 실은 참사랑이라는 것을
참되고 바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한
뜨겁고도 절절한 몸짓이라는 것을
저 암울했던 독재 시절
저 일제로부터 이어져 온
온갖 불합리한 비교육적 폐습 속에서
참교육이라는 뜨거운 가치 지표가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역사 발전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추동해 온 사실을
나는 안다
참교육을 향한 신념으로
역사 창조의 격랑을 일으키고
그 격랑 안에 고난과 희생의 실체들을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아로새긴
그 눈물겨울 역사를
그리하여 나는 안다
그로 말미암아 오늘
진정한 민주주의로부터 가능한
인간주의, 공동체주의, 생태주의라는
생동감 있는 언어의 실체들이
우리의 교단에서 다양하고 조화롭게
역동적으로 꽃피어나고 있음을
더불어 나는 안다
교육혁신의 대명제 안에서
오늘도 창조적인 다양한 시도와
활기찬 교육 실천들이
우리의 교단을 가멸게 하고 있음을
또 그것의 한 실체가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라는 이름으로
우리 고장에서 열린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안다
우리 고장의 많은 뜻 있는 이들이
현장 교사와 학부모들이
함께 기뻐하며 박수로 축복한다는 것을
더불어 힘차게 손뼉 치는 내 두 손 마디마디에
뜨거운 애정과 성원이 가득하다는 것을!
(2005년 11월 24일 오후 태안중학교에서 개최된 제1회 '태안 참교육실천사례 발표회'의 '개회식 및 문화행사' 시간에 직접 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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