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 체벌'·'말죽거리 잔혹사' 사라진다
[바로 이 맛! 투표하면 바뀐다③] '진보벨트' 지역에 학생인권조례 제정 '청신호'
시위대가 아닌 지방자체단체의 공무원이 4대강을 마구 파헤치는 굴착기 앞을 가로막습니다. 인천 계양산에는 골프공 대신 맹꽁이와 반딧불이 넘쳐납니다. 서울광장에서는 시민들이 마음 놓고 촛불을 들고, 콘서트를 열고, 추모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눈칫밥'이 아닌 친환경 급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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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이 '즐거운 상상'의 끝은 어디일까요? 6.2 지방선거로 한나라당이 독점했던 지방권력의 절반 이상이 교체되면서 사회 곳곳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투표가 내가 사는 동네를 그리고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 <오마이뉴스>가 미리 짚어봤습니다. [편집자말]
지난 달 18일 서울 A 중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10일, 알몸 체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A 중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해당 교실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점심시간임에도 담임교사가 반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반 학생들은 뛰어노느라 정신없는데도 이 반만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착석해 있었다. 1~3학년이 쏟아져 나와 부딪히는 사고가 날 수 있다며 담임교사가 운동장에 나가는 것을 금지해서다. 대신 학생들은 등교하자마자 풀었던 문제 중 틀린 문제를 다시 풀고 있었다.
▲ 매질을 해도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은 공부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고, 매질을 하지 않아도 공부할 아이들은 공부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매질은 필요 없습니다. (사진은 영화 <말죽거리잔혹사>의 체벌 모습.) ⓒ CJ엔터테인먼트
이아무개(14)군은 "중간고사 성적이 1학년 반 중 꼴찌로 나온 후부터 담임 선생님이 문제 풀기를 시켰다"며 "중간고사가 끝난 후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달 18일에 있었던 체벌에 대해 묻자 이군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친구가 상의를 벗고 있으니 민망했다"라고 답했다.
A 중학교 교사 김종현(가명)씨는 알몸체벌에 대해 "아무리 남학교라지만 너무나도 수치감을 주는 체벌"이라며 "한 학부모가 교육청에 민원을 올렸지만 학교 윗선에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해명자료만 받고 더 이상의 제재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민원이 들어오면 학교 측은 교육청과 말을 섞어 무마 시키기 급급하다"며 "이런 문제는 교육 전체의 구조, 조직 아래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교사 개개인의 인성의 문제보다 과도한 체벌을 묵인하는 잘못된 구조 자체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김씨는 담임 교사의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교육할 때 아이들의 창의력이 키워지겠냐"며 답답해했다. 인권교육센터 '들'의 배경내 활동가는 "A학교 사례는 체벌에 의한 학생 인권 침해뿐 아니라 경쟁교육에 의해 말살되는 학생 인권 문제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 한 교육청에 올라온 민원글이다. 해당글은 현재 비공개 상태다. ⓒ 이주연
"학생인권조례안 마련됐다면 사망·알몸 체벌은 없었을 것"
체벌, 강제 교육 등에 의한 학생인권 침해가 A학교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경기도 안산의 B초등학교는 일제고사에 대비해 0교시 수업을 하고 엎드려뻗쳐 체벌을 가하며 공부를 시켜 논란이 됐다. 체벌로 인해 학생이 사망하기도 했다. 지난 1일 경기도 김포의 C고등학교 여학생은 지각을 이유로 지도교사로부터 앉았다 일어서기 기합을 받던 중 의식을 잃어 결국 이튿날 사망했다.
이에 대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공현 활동가는 "학생인권조례안이 이전부터 마련됐다면 학생이 사망하는 등의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초안을 만든 연구팀에 소속됐던 공현 활동가는 "인권조례가 제정되면 학생들이 인권침해 상황을 겪었을 때 기댈 근거가 마련되어 쉽게 문제제기가 가능하다"며 "이를 통해 학생, 교사들이 '학생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결국 학교 전반의 인식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학생인권조례안은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정책 중 하나로 체벌금지, 두발 길이 규제 금지, 정규교과 외 교육활동 강제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만일 조항을 어겼을 시 구제기관이 해당 학교에 시정권고를 내릴 수 있고 이 권고를 무시할 경우 교장 등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교육청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안이 폐기된 까닭
▲ 등교를 서두르고 있는 고등학생들, 과도한 체벌과 강제교육으로 아이들의 인권이 멍들고 있다. ⓒ 이주연
교육위원 임기가 세 달 남아 그 안에 1차례 임시 회의를 할 수 있지만 회기 일정이 이틀에 불과해 다양한 논의가 필요한 조례안 처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례안은 7월 이후 다시 입법예고 등의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그만큼 조례안 처리가 뒤로 미뤄진 것.
공현 활동가는 "13명의 교육위원 중 2명만이 찬성 입장을 밝힌 상황이어서 통과 안 될 것이라 예상했다"며 "위원들이 부담을 피하기 위해 조례안 심의를 보류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11명의 교육위원은 왜 반대한 걸까. 조돈창 경기도 교육위원은 10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인권은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 지성인이 된 후 찾으면 된다"며 "학생들을 위한 조례를 만들어서 인권을 존중한다는 것은 공부하는 학생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반대 위원 11명 중 조 위원을 포함한 7명은 6·2 지방선거 교육의원직에 출마했다(교육의원은 기존 교육위원이 하던 역할의 대부분을 수행하지만 교육청이 아닌 도의회 소속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교육의원을 선거로 선출했다). 하지만 그 중 단 한 명 강관희 위원만이 당선됐다. 조례안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 강 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오마이뉴스>임을 밝히자 그는 "얘기 안 할게요, 끊으세요"라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시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강 위원의 견해는 다른 매체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9일 강 위원은 <메디컬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두발자유와 복장자유에 대해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나 또한 그들의 입장과 같다"며 학생인권조례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했다.
지방선거, 학생인권조례를 되살리다
이러한 반대 의견에 밀려 조례안은 폐기될 운명이지만, 앞날마저 캄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희망적이다. 지방선거 덕분이다.
지방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학생인권조례안 추진 의사를 누누히 강조했다. 또한 조례안 처리를 담당할 교육의원 7명 중 4명이 진보성향으로 꼽히고 있다. 교육의원 7명과 함께 경기도의원 6명이 경기도교육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체제라 조례안 제정은 더욱 힘을 받을 수 있다. 위원회로 배석되는 도의원 수가 각 정당의 의석수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즉, 6·2 지방선거 결과 민주당 의원이 전체 경기도의원 의석수의 63%를 차지했기에, 교육위에서 활동하는 의원 중 절반 이상이 민주당 의원으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진보성향 교육의원 4명, 민주당 의원 3명 이상을 합치면 적어도 7명 이상으로 전체 교육위원회 13명의 과반수다.
초기부터 조례안을 찬성했던 교육위원이자 이번에 교육의원으로도 당선된 최창의 당선자가 "새로운 위원회가 구성되면 조례안 처리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낙관한 이유다. 이처럼 지방선거가 이끌어낼 또 하나의 변화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꼽을 수 있는 상황이다.
학생인권조례안은 서울에서도 추진될 예정이다. 곽노현 서울교육감 당선자는 선거 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경기 학생인권조례안을 만든 책임자가 나였고 거기엔 나의 철학과 정신이 담겨 있다"며 "서울도 비슷한 내용을 추진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곽 당선자가 추진할 조례안을 통과시키는 몫은 서울시의회 소속 교육위원회에 있다. 이 교육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될 서울교육의원 8명 중 3명이 진보성향으로 꼽힌다. 나머지 5명 중 1명만이 보수 진영에서 배출한 교육의원이다. 김형태 서울교육의원 당선자는 "학생인권조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며 "교육위원회에 들어오는 시의원 중 다수가 민주당 의원이 될 텐데, 교육 측면에서 민주당과 진보 교육감·교육의원 공약이 유사했기에 조례안 추진은 순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조례안은 진보 교육감이 당선된 전남·전북·강원·광주 지역에서도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해당지역 교육감들은 이미 지난 달 10일 학생인권조례안을 추진하겠다고 시민단체와 정책협약을 맺은 바 있다.
학생인권조례안 제정 청신호에 학생들 "환영"
▲ 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2010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종합 공청회'에서 참석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으로부터 조례 제정의 취지에 대한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 유성호
A중학교 3학년 전아무개(16)군은 "두발 길이 규제를 안 했으면 좋겠다"며 "머리가 짧으면 오히려 신경 쓰여서 공부에 방해된다"고 말했다. 서울 D고등학교 2학년 구명회군(18)은 "학생 체벌이 너무 심해 선생님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고, 무릎으로 복부를 맞았다"며 "체벌을 막을 수 있는 조례안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의견은 학생들과는 사뭇 달랐다. 경기도 E고등학교 서아무개 교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도 있는데 그런 아이들에 대한 관리는 학교에 미루면서 학생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하면 힘들다"며 "체벌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A 중학교의 박아무개 교사는 "체벌을 금지하면 대드는 아이들을 다룰 방법이 없다"며 "현재 교사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는데 학생 위상만 높인다면 선생님들이 너무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수원시 매현중학교 3학년 김성호군은 선생님들의 이 같은 우려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진군은 "어느 상황에서도 체벌은 안 된다"며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반문했다. 선생님의 권위 상실에 대해서도 "학생을 선생님의 아래로 보기 때문에 그러한 우려가 나오는 것"이라며 "학생에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게 하는 것은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창구를 마련해 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공현 활동가도 "교사들은 학생인권조례를 위협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생활 지도 등 불필요한 부분이 줄어들어 오히려 교사들의 업무가 경감된다"며 인권조례가 학생뿐 아니라 교사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임을 강조했다.
아무튼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학생들에 대한 생활지도 교사의 폭력이 난무했던 <말죽거리 잔혹사>가 앞으로는 비디오-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무용담'으로 남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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