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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용 골은 고3 아들도 튀어나오게 한다

고3 아들 녀석과 함께 본 '아르헨티나전' 경기

등록|2010.06.19 12:18 수정|2010.06.19 12:18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다. 아르헨티나와 경기가 있었던 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응원단의 수가 200만이 넘을 거란 보도가 있을 정도니 밀려드는 월드컵 홍수로 온 세상 사람들이 익사 직전이다.

미처 주문량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치킨과 맥주로 재미를 톡톡히 보는 사람들은 잠시 쉴 틈 없이 일해야 하고, 축구 보는 재미에 푹 빠진 사람들은 우리나라 경기뿐 아니라 다른 나라 경기까지도 알뜰살뜰 챙겨 보다가 월드컵 폐인이 되어 정작 일터에서는 제 역할 못하기 일쑤다.

아르헨티나와 경기가 있던 날, 인근 고등학교에서는 야간자율학습도 하지 않고 고3 아이들까지 다 귀가 시켰다. 수능 수험생이라 할지라도 세계 최강 아르헨티나를 그리스 경기처럼 화끈하게 이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힘 실어주기 위해 '대~한민국' 함성에 동참하라는 뜻이었을까.

덕분에 일찍 집에 온 고3 아들 녀석은 TV 앞에 앉질 않았다. 날씨 덥다고 선풍기 챙겨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가 문 닫아 걸고 공부를 시작했다. 아내는 아들 녀석 공부에 방해되면 안 된다고 TV 볼륨 최대로 낮추었다. 중년 나이가 되어 듣는 게 예전과 같지 않아 답답하지만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는 나도 아나운서와 해설위원의 목소리가 모기소리처럼 앵앵대는 TV 앞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첫 골 허용박주영의 발 맞고 들어가는 골 ⓒ FIFA 홈페이지


공부하는 아들 녀석을 위하겠다는 아내의 생각은 경기 시작 얼마 되지 않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한여름 더위에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놓고 경기를 시청하는 아파트 주민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탄식에 아들 녀석은 제 방에 틀어박혀서도 경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 두 번째 골을 먹은 후 아들 녀석은 방을 나와 TV 앞에 앉았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5분만 보고 갈 거라며 선수를 치더니, 아르헨티나는 역시 강한 팀이고 메시의 드리블은 따를 선수가 없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아들 녀석 옆에 앉자마자 모기소리로 앵앵대는 TV 볼륨부터 높였다. 그제야 차범근 해설위원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5분 정도 지나자 아들 녀석이 진짜로 방으로 들어갔다. 두 골을 먹은 후에도 무기력한 경기 가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 표정으로. 전반이 끝나기 직전 이청용이 넣은 골에 온 아파트 사람들이 한꺼번에 지르는 환호성 소리를 듣고 아들 녀석은 다시 뛰쳐나왔다. 그리고 후반이 끝날 때가지 TV 앞 제 자리를 굳게 지켰다.

후반 초반 활기찬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들뜬 표정으로 한 골 더 넣어 무승부를 만들면 16강 진출이 가능하다며 열심히 응원했다. 박지성의 패스를 받은 염기훈의 슛이 빗나가자 방바닥을 두드리며 아쉬워했다.

아르헨티나의 세 번째 골이 터지고, 네 번째 골마저 들어가자 아들 녀석의 말이 달라졌다. 무승부를 만들어 쉽게 16강에 진출한다는 기대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고, 남은 경기에서 어떤 결과를 얻어야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매일 참고서와 문제지에만 파묻혀 사는 놈이 어느새 그리 많은 정보를 얻었는지 차범근 해설위원의 해설보다 아들 녀석의 얘기가 더 귀에 쏙쏙 들어올 정도였다.

경기가 끝나고 아들 녀석은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갔다. 고3 아들 녀석과 함께 앉아 밥 먹는 시간조차 많지 않았던 터에, 곁에 함께 앉아 TV를 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월드컵의 덕이다.

함께 앉아 축구 경기를 보며 아들 녀석이 예전보다 더 자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자책골을 넣은 박주영을 향해 온갖 안 좋은 소리 다 쏟아 부었을 텐데, 박주영은  잘못이 없다며 감싸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월드컵 열기가 얼마나 이어질까. 나이지리아 전을 끝으로 잦아들고 말까. 아니면 16강까지 이어질까. 쉽게 점치기 어렵지만, 우리 선수들이 마지막 경기를 할 때까지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처럼 따뜻한 격려를 해주어야지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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