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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와 나무꾼으로 숨어 살았다고?

[남도여행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 ⑥ 해남 녹우당 2

등록|2010.06.25 14:07 수정|2010.06.25 14:07
녹우당 옛터

▲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 이상기


고산 유물전시관을 나오면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마을의 상징으로 녹우당과 역사를 같이 해왔다고 한다. 녹우당은 해남윤씨 입향조인 윤효정(1476-1543)이 삼산벌의 덕음산 아래 연동에 자리 잡고 세운 집으로 약 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은행나무 잎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마치 비가 오는 것 같아 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집 뒤의 대나무 숲과 덕음산 비자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한 줄기 시원한 비 같아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전자가 좀 더 사실적인 이야기라면, 후자는 좀 더 철학적인 스토리텔링이다.

▲ 녹우당 사랑채 ⓒ 이상기


녹우당은 ㄷ자형의 안채에 ㅡ자형의 사랑채가 붙어있는 ㅁ자형의 집이다. 사랑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간채를 지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문간채에는 하인이, 사랑채에는 바깥주인이, 안채에는 안주인이 살았다. 바깥채에 딸린 문으로 들어가니 녹우당과 윤형식이라는 문패가 보인다. 윤형식 씨는 고산 윤선도의 14대 종손으로 20여년 전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다.

사랑채는 봉당과 툇마루 그리고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은 툇마루가 있는 공간과 없는 공간 두 부분으로 나뉜다. 툇마루가 있는 공간의 문 위 서까래 아래에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다. 가운데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운업(芸業)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 녹우당 현판 ⓒ 이상기

▲ 운업 현판 ⓒ 이상기


녹우당이라는 현판은 동국진체의 창시자 옥동 이서(李漵: 1662-1723)가 썼다. 첫눈에 자획이 굵으면서도 웅혼한 느낌이 든다. 그는 왕희지체를 토대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필결(筆訣)>에서 "글씨는 심법(心法)을 궁구해야지 자획(字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말은 서예가 글자체의 모방이 아니라 마음공부라는 뜻이다.

이런 옥동이 공재와 교유하게 된 것은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에서다. 옥동은 이곳 해남에 살고 있는 공재에게 자신의 필법을 전해주었고, 이것은 다시 원교 이광사에게 전해져 동국진체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옥동 이서는 여흥이씨로 찰방을 지냈으나 이후 명리를 버리고 초양에 묻혀 학문과 서예에 전념했다. 옥동은 <성호사설>을 쓴 이익(李瀷: 1681-1763)의 배다른 형이다.

운업은 '꽃 성할' 운과 '씩씩할' 업이 합쳐진 글자로 공부하는 일을 의미한다. '공부를 소홀히 하지마라'는 녹우당 주인의 경책으로 여겨진다. 또 하나의 현판은 정관(靜觀)이다. '고요하게 바라보라'는 뜻으로, 내면의 성찰을 강조한 문구다. 이것은 원교 이광사가 썼다고 한다.

▲ 정관 현판 ⓒ 이상기

▲ 시판 ⓒ 이상기


이들 현판 외에 나산(懶山) 윤성호가 쓴 시판이 하나 걸려 있다. 내용을 보니 어초은 이후 면면히 이어지는 녹우당 옛터의 전통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선비의 모습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시는 임자년 꽃피는 날에 쓴 것으로 되어있다.

연은 이 땅에서 나 한 뿌리로 이어지고 蓮生此地一根連
봄바람 불고 꽃피고 열매 맺는 일 수없이 지나갔네. 幾到春風花樹前
솔과 잣나무는 산에서 자라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노니 松柏在山魚在沼
물고기 잡고 나무하던 옛 터전 끝없이 이어지리.漁樵古蹟盡然然

어초은-고산-공재로 이어지는 해남윤씨 가계

▲ 고산 사당 ⓒ 이상기


녹우당 안채는 살림공간이라 들어갈 수가 없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정원과 툇마루가 조금 보인다. 녹우당을 나와 우리는 고산 사당과 어초은 사당을 지나 윤효정의 묘로 향한다. 고산사당과 어초은 사당은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사당은 사자들의 신주를 모셔 놓은 곳이기 때문에 대부분 제례 때만 개방을 한다.

그러면 어초은 윤효정과 고산 윤선도 그리고 공재 윤두서의 가계는 어떻게 될까? 간단히 얘기하면 어초은의 현손(4대손)이 고산이고, 고산의 증손(3대손)이 공재이다. 해남윤씨 가문은 어초은 윤효정 때 이곳 연동에 터를 잡은 이후 고산과 공재를 거치면서 이 지역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 어초은 사당 ⓒ 이상기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은 원래 강진군 도암면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호에서 보듯이 고기나 잡고 나무나 하며 지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 해남의 학자 금남 최부(1454∼1504)에게 글을 배우며 해남지역을 드나들게 되었다.

이때 윤효정의 총명함이 알려졌고, 해남의 향족인 초계정씨 가문에서 그를 사위로 삼았다.
윤효정은 처가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아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윤구, 윤행, 윤복)을 문과에 급제시켜 정치적인 기반까지 마련하게 된다. 이때부터 해남윤씨 가문은 전라도의 명문 사대부 가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어 윤구의 아들인 윤의중이 문과에 급제 예조판서와 좌참찬에 이르렀다. 윤의중은 윤선도의 할아버지이다.

▲ 고산 윤선도 유적지 표지석 ⓒ 이상기


이러한 해남윤씨의 가풍과 전통은 고산 윤선도에 이르러 정치적, 학문적, 문학적으로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고산 윤선도는 시·서·화에 능한 대표적인 문사였으며, 이러한 전통은 이후 해남윤씨 가문에 면면히 이어진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공재 윤두서이다. 고산의 가계는 윤선도-윤예미-윤이후로 이어진다.

윤이후는 문과에 급제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공재는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인 윤이석에게 양자를 가 윤선도가의 종손이 되었다. 그는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시·서·화에 몰두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그는 또한 경제, 천문, 지리, 의학, 음악, 금석학, 병법 등 실사구시의 학문을 연구하여 후대 실학이 형성되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비자나무숲

▲ 어초은 윤효정의 묘 ⓒ 이상기


사당을 지나면 동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덕음산으로 오를 수 있다. 마을 뒤 덕음산 자락에는 어초은과 그의 부인 초계정씨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는 꽤나 오래돼 보이는 문인석과 촛대석이 한 쌍씩 있고, 세운 지 오래지 않은 상석과 장명등이 보인다. 물론 상석 뒤 무덤 앞에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것 역시 최근에 세웠다.

무덤을 지나 다시 오른쪽으로 산을 오르면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나온다. 이 숲은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어초은의 유지를 받들어 만들었다고 하니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 중 비자나무는 약 400그루로 생태학적인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 녹우당 뒷산의 비자나무숲 ⓒ 이상기


비자나무는 남부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늘푸른 바늘잎나무다. 겉보기에는 주목과 비슷하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어린 가지는 녹색이며 털이 없다. 잎의 앞면은 짙은 녹색이고, 뒷면에는 흰색의 줄이 두 개 잎을 따라 나 있다. 암수 딴그루로 암꽃은 새로 나온 가지 끝부분에서 피어난다.

추원당과 녹차밭

▲ 어초은공파 재실 추원당 ⓒ 이상기


비자나무숲을 내려와 마을 뒤로 돌아가면 거의 끝에 추원당(追遠堂)이 있다. 추원당은 어초은공파의 재실로, 1935년 당시 종손이던 윤정현의 발의로 세워졌다. 재실이란 제사에 참반하는 제관과 후손들이 모여 회의도 하고 잠도 자는 장소이다.

추원당은 근대건축으로 녹우당 사랑채를 많이 모방한 느낌이다. 비교적 넓은 안마당과 정원, 그 위로 봉당과 툇마루가 있어 사대부가의 재실로는 제격이다. 건물 한 가운데 문 위에 추원당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여기서 추원이란 '조상의 덕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후학인 이수형(李壽馨)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 마루에는 주련이 여럿 걸려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다음 두 문구다. '선생의 가풍은 산고수장이니, 연꽃봉우리 이곳에 숨어 고기 잡고 나무하며 산다네.(先生之風山高水長 蓮峯是處隱於漁樵)' 어초은 공의 삶의 방식을 잘 나타내준 시구이다. 물론 어초은공이 정말 그런 삶을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가풍이 해남윤씨 가문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은 사실이다.

▲ 녹우당 차밭 ⓒ 이상기


추원당을 지나 마을로 내려오면서 보니 밭에서 두 부부가 녹차를 따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차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찻잎을 따 맛을 보여준다. 약간 쌉싸름하면서도 새순의 연한 맛이 은은하게 우러난다. 녹우당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빠져 잠깐 나는 이곳 해남이 차(茶)의 성지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해남이 차의 성지가 된 것은 초의선사 때문이다. 초의선사는 대흥사의 13대 종사로 두륜산 일지암에서 차문화를 중흥시켰을 뿐 아니라 차의 성전인 <동다송>과 <다신전>을 지었다. 이러한 차문화의 전통은 현재 해남다인회가 잇고 있다. 이들은 1992년부터 초의문화제를 열어 초의선사의 다도를 계승하고 또 선양하고 있다. 현재 해남다인회 회장은 이곳 녹우당 주인인 윤형식씨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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