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라
한국전쟁 60년 기념 사진집 <한국전쟁 Ⅰ, Ⅱ> 발간에 붙이는 글
▲ 서울시민들이 뗏목 부교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 피란을 가고 있다. 1951. 5. 29. 서울 ⓒ 눈빛출판사
역사는 내비게이션이다
불나방은 제 무리가 불에 덤벼들다가 타죽는 것을 빤히 보고도 저도 똑같은 짓을 하다가 같은 꼴을 당한다. 파리란 놈도 마찬가지다. 파리통에 제 동족이 새까맣게 빠져죽은 주검을 보고도 꾸역꾸역 한사코 그 통에 들어가 마침내 똑같은 처지가 된다. 이처럼 하등동물은 지혜나 학습이 없기 때문에 거듭 시행착오로 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러면 고등동물이라는 사람은 어떤가. 사람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전임 대통령이 무리한 장기 집권 끝에 비극을 당한 것을 보고도 자기만은 예외라고 후임 대통령이 같은 길을 거듭하다가 똑같은 비극을 맞았다. 또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 불법 정치자금이나 친인척 비리로 고개를 숙이며 대국민사과를 했다. 그런 것을 보고도 후임자들이 자기는 예외라고 각성하거나 조신치 않다가 똑같은 일을 거듭 반복하는 게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역사를 아끼고 사랑하며 올곧게 기록하여 쌓아가고 있다. 역사학자 김성식은 <내가 본 서양>에서"영국 사람은 역사를 아끼며, 프랑스 사람은 역사를 감상하고, 미국 사람은 역사를 쌓아간다"고 했다.
그들은 사소한 것이라도 역사가 있으면 이를 아끼고 그대로 본존하며 원형을 손상치 않고자 심지어는 건물의 먼지를 닦는 것조차도 주저한다고 한다. 그들은 설사 조상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를 일깨워주고 있다.
이웃 중국도 오랜 굴종의 역사에서 해방된 뒤, 온 나라 곳곳에 있는 역사의 현장에다 '물망국치(勿忘國恥,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자)''전사불망후사지사(前事不忘後事之師,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라는 글을 돌에 새겨놓고 백성들에게 지난 치욕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역사현장에서 만난 한 역사학자(연변대 박창욱 교수)는 "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자다"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역사를 모르는 이는 하등동물처럼 거듭 시행착오를 하거나 역사의 시계 침을 되돌려 놓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나라의 지도자가 역사를 모르는 것은 나라와 겨레를 나락에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비로소 바르고 슬기로운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역사는 도로 표지판이나 내비게이션, 곧 길 도우미와 같다. 우리가 도로 표지판도 내비게이션도 없이 고속으로 길을 달리면 얼마나 위험한가. 인생길도 이와 같다. 선진국 백성들이 굳이 역사를 아끼고 사랑하고 감상하고 쌓아가는 근본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전란 속의 소녀 1931. 3. 1. ⓒ 눈빛출판사
나라((NARA)에서 찾은 한국전쟁사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먼동과 함께 북위 38선에서 울려 퍼진 포성과 탱크의 캐터필러소리로 시작한 한국전쟁은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일직선 38선에서 구불구불한 새로운 원한의 휴전선으로 바뀐 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3년 남짓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끝나지 않은 전쟁' '잠시 쉬는 전쟁'으로 엉거주춤 막이 내렸다.
이 동족상잔의 참담한 전쟁으로 빚어진 피해는 피아 전사자 100만여 명, 부상자 300만여 명, 이산가족 1000만 명 이상을 양산했다. 그리고 그 포성이 멈추자 한반도 전역은 초토화로 도시와 마을은 온통 잿더미였다. 그리고 그새 60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때 혹독한 전쟁을 겪거나 길거리를 헤매던 전쟁고아들은 노인이 되거나 대부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일부 기성세대에게만 가물가물 남아 있을 뿐이다.
▲ 끝없이 이어지는 피란민 행렬. 191. 1. 5. ⓒ 눈빛출판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나는 여섯 살 난 소년이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길고도 무더웠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로 귀청이 멍멍했다. 논이나 밭, 들길에는 뽕나무 채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체들, 전투기들의 융단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이런 장면들이 또렷하게 또는 희미하게 여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2004년 2월 2일, 나는 국민성금(오마이뉴스 누리꾼들의 성금)으로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서 'Korea War' 파일을 들치다가 무릎을 쳤다. 거기에는 한국전쟁의 참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순간 나는 이 사진들을 모두 가져다가 우리나라 사람, 특히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은 허용되기에 재미 동포의 도움을 받으며 2004년 2월 4일부터 그해 3월 12일까지 40일간 수십만 매의 사진자료를 들춰 그 가운데 480여 매를 골라 입수해 왔다.
▲ 폭탄을 장진하고서 항공모함을 떠나 전투지역으로 날아가는 미해군기. 1951. 9. 4. ⓒ 눈빛출판사
귀국 후 나는 나라((NARA)에서 미처 들춰보지 못한 사진들이 눈에 어른거려, 이듬해인 2005년 11월 27일 다시 워싱턴 행 비행기에 올랐다. 1차 방미 때 곁에서 도와준 박유종 선생이 다시 소매를 걷어주었다. 그해 12월 10일까지 10여 일 동안 나라((NARA) 자료실을 뒤져 모두 770여 매의 한국전쟁 사진을 입수한 뒤 귀국했다.
그래도 나의 갈증은 풀리지 않아 2007년 2월 26일 다시 워싱턴으로 날아가 그해 3월 12일까지 2주 동안 많은 사진과 기록물들을 원 없이 보고 열심히 스캔하였다. 2007년 3월 6일에는 박유종 선생과 함께 버지니아 주 남쪽 항구도시 노폭(Norfolk)의 맥아더 기념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측이 대역전 전환점이 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전선 시찰, 그리고 만주 원자탄 투하 주장으로 마침내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지는" 장면까지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맥아더의 한국전쟁 관련사진들은 대한민국 역사의 귀중한 한 장면들이라 최대한 복사해 왔다.
▲ 파란민 행렬. 1950. 7. 경북 영덕 ⓒ 눈빛출판사
2007년 3월 8일부터는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의 도움으로 북한 측 노획물 180 파일 자료 상자를 검색할 수 있었다. 3차 작업 수확은 모두 496 컷으로 대부분 유엔군 측 종군기자들이 찍은 한국전쟁 사진들이지만 여기에는 유엔군들이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노획한 사진과 문서 파일도 50여 컷 담겨 있다.
나는 3차에 걸쳐 나라((NARA)에 드나든 총 60여 일 동안 사진자료실에서 마치 광맥을 찾는 탐사자로 날마다 눈에 핏발을 세우며 숱한 문서 상자를 훑었다. 영어에 어둔한 내가 감히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곁에서 도와준 동포 박유종 선생의 덕분이었다. 그밖에도 재미 사학자 이도영 박사, 방선주 박사, 동포 주태상, 이선옥, 이재수 씨 등의 노고가 없었다면 이 일을 감히 할 수 없었다.
▲ 피란민촌인 움집들. 1952. 9. 28. 경기도 파주 ⓒ 눈빛출판사
한국전쟁 비망록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세계전쟁사에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한 형제가 두 편으로 나눠 싸워야했던 동족상잔의 전쟁이었고, 6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의 전쟁'이기에 그렇다. 아직도 한반도를 가로지른 휴전선에는 긴장이 감돌고 이따금 우발적인 총포소리가 들리고 있다. 지난 3월 26일에는 서해에서 '천안함'이 침몰하여 46명의 젊은이들이 유명을 달리하는 아픔도 겪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지난 오늘, 젊은이들 가운데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전혀 모르고 있는가 하면, 남북한의 일부 극우 극좌 매파들은 전쟁불사를 공언하는 현실이다. 이제 다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1950년의 한국전쟁보다 더 비극적인 전쟁이 될 것이다. 그때는 남북의 겨레가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이 분명한 일이다.
▲ 탄약 등 고지로 군수물자를 나르는 지게부대 노무자들. 1951. 2. 4. ⓒ 눈빛출판사
▲ <한국전쟁Ⅰ, Ⅱ> 의 표지 ⓒ 눈빛출판사
<한국전쟁 ‧ Ⅰ>은 미국 해외참전용사협회가 엮은 것으로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남북한의 대치상황과 한국전쟁의 모습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보고서 등과 교차 편집했다.
포로로 잡힌 인민군의 모습이나 부서진 한강 다리, 참전한 터키군의 모습 등이 잘 잡혀 있다. 폐허가 된 곳에서도 다시 집을 지으려고 발목까지 진흙에 빠지는 곳에서 재료를 모으는 사내의 모습도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 Ⅱ>는 기자가 그동안 3차례 방미하여 나라(NARA)에서 발굴한 사진으로 엮었다. 이전에 펴냈던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3권에 실린 사진들과 그동안 미공개 되었던 사진을 모아 보급판으로 한 권에 담았다.
이 사진집에는 당시 북한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일부 수록하고 있고, 사진 설명은 가능한 간결하게 사실만을 기록했다.
엮은이로서 이 사진집이 한국전쟁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이바지하고, 후세에 한 사료가 되기를 바란다.
일찍이 <손자병법> 모공(謀攻) 편에는 "싸우지 않고 상대를 이기는 것이 최선(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고 경세(經世, 세상을 다스림)의 최상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다시 한반도를 1950년대처럼 포화(砲火)로 초토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현대 무기가 그때보다 수십 배 더 발달하여 남북 겨레가 모두 함께 죽는다. 앞으로 남북의 긴장완화와 분단된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 성당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생들이 구호품을 받고 있다. 서울. ⓒ 눈빛출판사
남북의 정치지도자에게 간절히 바란다. 현재의 정전협정을 우선 평화협정으로 바꿔라. 이것이야 말로 오늘 정치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책무다. 백성의 세금을 받아 다리를 놓거나 강둑을 막고, 도로나 철도를 놓는 일은 행정가의 몫이다. 모름지기 정치가라면 조국의 분단을 풀고,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고, 통일을 이루게 하는 일이다.
정치는 최고의 예술이라고 한다. 남북한 겨레가 한반도에서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정치지도자들의 지도 역량을 보여 달라.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남북통일에 앞서 지금의 정전협정을 우선 평화협정으로 바꿔야만 앞으로 '천암함사태'와 같은 비극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조국 통일로 가는 길도 한 걸음 단축시킬 수 있다. 이 일이 정치지도자로서 역사에 죄 짓지 않은 일이요, 후세에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참다운 정치가로 추앙받을 일이다.
삼가 이 사진집을 조국의 평화 제단에 바친다. 이 사진집이 한국전쟁의 비망록이 되기를….
▲ 전란 속에서도 구김살 없는 소녀들. 1950. 10. 원산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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