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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가마 804개로 탑을 쌓은 놀라운 사진

등록|2010.06.30 13:13 수정|2010.06.30 13:13

창고에 쌓인 곡물1926~33년 사이에 군산내항의 창고 3동에는 쌀 25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 김종길



1908년에 준공된 옛 군산세관 청사 내부에는 옛 군산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보던 중 놀라운 사진을 발견했다. 쌀가마니로 쌓은 탑이었다. 하늘을 향해 수십 미터 치솟은 쌀가마니를 보고 있자니 놀라움과 동시에 궁금증이 생긴다.

▲ 사진은 군산항 제3차 축항공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쌀가마니를 탑처럼 쌓아 올렸다. ⓒ 김종길



"이 쌀가마니가 몇 개나 될 것 같아요?"

세관 내부를 설명하던 해설사가 여행자에게 물었다.

"글쎄요. 어림잡아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데요. 몇 개인지 혹시 아세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세어 보니 804개라고 하더군요."

해설사의 자신 있는 말에 여행자는 이내 수긍하였다. 얼핏 보아도 그 정도의 수량은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 쌀가마니의 위에서 아래로는 ‘축 축항기공 역전정우회’라는 글씨가 보인다. ⓒ 김종길



사실 쌀가마니로 탑을 쌓은 사진을 놀라움만으로 볼 수는 없었다. 이 사진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군산항 제3차 축항공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쌀가마니를 탑처럼 쌓아 올렸다. 쌀가마니의 위에서 아래로는 '축 축항기공 역전정우회'라는 글씨가 보인다.

군산세관의 옛 모습군산세관은 경술국치 이후 해방까지 일제가 호남, 충청 지역의 쌀, 곡물 등을 수탈하였던 창구로 이용되었다.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진 망루가 오른쪽에 보인다. ⓒ 김종길



1899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된 군산은 호남 곡창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내가는 거점이었다. 전북의 기름진 땅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던 일본인들은 군산을 쌀 수탈의 창구로 만들었다. 1908년에 전주와 군산을 곧장 연결한 우리나라 최초의 포장도로인 전군도로를 내고 호남선과 군산선을 놓아 많은 쌀을 수탈해갔다.

▲ 군산세관의 옛 모습과 쌓아놓은 쌀가마 ⓒ 김종길



또한 일제는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군산내항에 부잔교(뜬다리)를 가설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있어도 수면의 높이에 맞춰 다리 높이가 조절되어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시설이다. 일제는 보다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부잔교를 3개나 설치한 것이다.

제3차 축항기공탑일제는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군산내항에 부잔교를 설치하였다. ⓒ 김종길



사실 쌀가마니로 쌓은 탑에 대한 놀라움보다는 이렇게 많은 쌀들을 일본이 수탈해갔다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놀라움이었다. 사진들을 보며 착잡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산 여행은 개항과 일제 수탈의 역사를 다시 아로새기는 여정이었다.



1910년대 쌀을 배에 싣는 광경1933년에는 전국 쌀 생산량의 53.4%라는 엄청난 양의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군산항에서는 1934년 200만석의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 김종길

덧붙이는 글 사진자료(옛 군산세관 전시실 제공) 2010.6.25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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