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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52회)

괴이한 왈자 <2>

등록|2010.07.02 10:34 수정|2010.07.02 10:34
소문은 그렇다 해도 혼례를 올렸으니 점잖게 신랑 구실이라도 해야 뒷소문이 좋을 것인데 무뢰배 같은 친구들이 나타나면서 한아름이나 되는 걱정을 박봉사에게 안겨주었다. 혼례를 올렸으면 좋아하는 친구는 나중에 만나 약주를 나누고 오늘은 평생을 같이할 여인네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얘기라도 나눠야 제격이었다.

어찌된 인간이 낮참에 빠져나가 여덟 시가 넘도록 콧배기도 보이지 않아 신방엔 가볍지 않은 족두리를 쓴 채 여섯 시간이나 신부가 앉아 있었다.

"어허, 이런 변이 있나. 아무리 친구가 좋아도 그렇지 장가를 들었으면 신방엔 돌아와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술을 잘 마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토록 앞뒤 분간 모르고 혼례를 올린 첫날부터 술에 쩔었으니 난리 아닌가. 어허, 이거 물릴 수도 없는 일이고."

박봉사의 울화가 사랑채에서 새어나오는 걸 모를 리 없는 하인들이었다. 장삿길에 도가 튼 부친 덕분에 상삿골에 괜찮은 집터를 사들였지만 그것은 박씨 집안의 일이지 사위놈과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하릴없이 대문간을 살피다 돌아오길 벌써 몇 차례인가. 문밖의 날씨는 금방이라도 눈발을 뿌릴 양으로 도둑바람만 오락가락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돌아오면 되겠지만 날새도록 술 마시고 기생품에 떨어진다면 집안 망신시키는 건 둘도 없는 일이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간간이 진눈개비까지 날리자 주위는 더욱 어두워졌다.

"어허엄, 카악!"

가래 끓는 기침을 몇 차례나 뽑아냈는데 요란한 발짝 소리와 함께 하인 녀석의 다급한 말소리가 날아들었다.

"봉사 어른, 서방님이 이제야 돌아오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간밤에 먹은 무말랭이가 내려간 듯 답답한 속이 겨우 가라앉았다. 신랑이 들어와선지 신방엔 정겨운 놀이가 한창이었다. 간밤에 골목 안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말똥냄새가 코끝에 어려 불을 환히 밝힌 박봉사댁 대문 가까이 이를 때엔 술기가 밀어 올라 걸음까지 비틀거렸다. 대문간을 지키던 하인 녀석들은 다짜고짜 사내를 잡아끌어 신방에 집어넣었다.

'어, 어?'

뭔가 변명거릴 찾았지만 어두워진 데다 진눈개비까지 뿌린 탓에 틈을 주지 않고 아랫것들은 신방에 집어넣고 돌아섰다. 사내는 이 집 문전에 이를 때부터 자신을 잡아끄는 건 기생방의 호리 꾼이라 생각했다.

오가는 사내를 이유 없이 잡아끌어 잡것들의 행음놀이에 구전 몇 푼 뜯기 위한 수작이라 여겼다. 우중충한 날씨에 잠자리도 못 정한 터여서 가만히 있었지만 향긋한 몸단장 냄새가 풍겨오자 회가 동했다.

'에라이, 죽기밖에 더 하겠어.'

더구나 조촐한 술상까지 차려져 있고 윗목엔 화관(花冠)을 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연지를 좌우로 찍고 곤지까지 찍었으니 시골장터에서 보았던 영락없는 춤추는 기생이었다. 한양으로 향하던 자신의 걸음마당에 만난 한량들의 농지거리가 머리에 스쳤다.

"저기 말이야, 계집의 볼 따귀에 연지를 찍는 건 묘한 의미가 있지. 그건 우리의 오랜 풍습이라고나 할까.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중원을 호령할 때 천하의 여인들을 수중에 넣었잖아. 밤이 되면 제왕은 어느 방으로 갈까를 고민했는데 이때 사용한 짐승이 염소라네. 염소 등에 앉으면 고 녀석이 느릿느릿 데려다 준 방으로 들어갔는데 하필이면 이 날 여인의 몸에 달거리가 찾아온 거야. 그래서 볼 따귀에 연지를 찍어 '오늘은 쇤네 몸에 달거리가 찾아와 모시지 못 하옵니다' 했다는 거야. 그래서 연지를 찍는 것인데 하필이면 혼례 때 이걸 쓰느냐 말이야. 달리 생각하면 날파리 같은 사내놈이 함부로 기웃거리는 걸 막으려는 거겠지."

어여쁜 새색시를 보호하려는 차원이 연지라는 말이었다. 납의(衲衣)를 걸친 사내는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여인의 속살 한 번 만진 적이 없는 데다 얘기만 무성하게 들었고 보니 사내의 욕망은 풍성히 영글어 있었다.

그러나 일정한 법식을 알 리 없었다. 춤추는 기생들은 화관을 벗기면 몸을 허락하는 것으로 알았기에 앞뒤 살필 겨를 없이 화관을 떼어내고 옷가지를 서툴게 벗겨냈다. 얼핏 훑어본 머리맡에 술상이 있으니 기생방이란 게 맞은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서방님."

황촉불에 조심스럽게 올려다 본 낯이었지만 신부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자신이 들은 바론 스물일곱의 한량이라 했다. 실없는 농질을 잘 하는 왜가리 매파의 달금진 말이 아직도 귓전에 머물러 있었다.

"아가씬 차암 복도 많수! 서방님 되는 그 분은 술을 좀 먹는다지만 체격이 듬직하고 사내다운 힘이 그만이라우. 오죽 했으면 다방골 기생들이 장안 한량 중 솜씨 좋은 사내라고 손을 꼽는답니까. 사내는 인물도 좋아야 하고 술도 마셔야지만 그런건 몸에 지닌 일종의 노리개 같은 거유. 사내는 뭐니 뭐니 해도 계집 넋 떨어지게 하는 힘이 있어야 해요. 똘똘한 녀석이 용솟음치는 힘만 있으면 어딜 가든 밥 굶을 염려는 없다우!"

그랬던 것인데 뭔가 이상했다. 친구들과 기생방에 들렀다면 입고 있는 옷가지는 깨끗해야 옳았으나 방에 들어온 사내는 어디서 굴렀는지 뗏국물이 줄줄 흘렀다.

더구나 신부의 옷을 벗겨내는 솜씨가 어찌나 엉성한 지 이상할 정도였다. '이 사람이 서방님 맞나?' 싶은 의혹은 사내의 손이 가슴에 들어오면서 굳어버렸다. 그것은 익숙한 행동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젖무덤을 움켜쥐더니 도도록이 솟은 젖꼭지를 입술로 간질이며 다급히 이층을 쌓았다.

여인의 몸을 안온하게 풀어헤치며 좀 더 황홀한 분위기로 끌고 갈 줄 알았는데 사내의 힘이 거칠게 아래쪽을 파고들자 모락모락 일어난 의혹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뜨거운 불이며 온 몸을 꿰뚫는 화살이었다. 아니 그것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였다.

"아, 아!"

뭔가 해야 될 말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입안에 갇혀 그저 모닥숨만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이 사내는 이상했다. 얘기로 들었던 것과는 달리 여인의 몸을 잘 아는 게 아니라 처음 대한 듯 몹시 어설퍼했고 스스로 황홀하게 자지러졌다. 그러나 그게 처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처음 여자라는 것. 어쩌면 이 사내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소문만 요란했을 뿐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졌는지 모른다. 이 사내에게 자신의 향기가 전달됐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사내의 거친 숨소리와 출렁이는 자맥질 속에 찾아든 고통을 완화시켜 주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의 물고였다. 사내는 자신의 힘을 여인의 깊은 곳에 방앗개비처럼 알을 까고 나동그라졌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젊음이란 넘치는 힘이 있어 좋았다. 포근하면서도 뜨거운 여인의 향기에 취하는 게 그렇듯 좋았다. 어둑새벽이 오자 사내의 힘이 다시 살아났다.

거의 벗다시피한 몸은 다시 불이 붙었다. 뜨거운 숨결은 다시 열화로 위에서 살아나고 그것은 간밤의 요란한 방사가 있었다는 걸 상관없이 거칠게 출렁거렸다.

한 차례 불길을 태우고 숨가쁘게 몰아쉬던 한숨이 가라앉자 사내는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아가씨, 여긴 어딥니까?"
"?···."

"나는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加里王山) 계곡에서 약초를 캐던 표갑(表哥)니다. 약초를 캐면 수표교 옆 한약방에 간다는 말에 찾아왔습니다만 주인은 만나지 못하고 늦도록 술만 마셨습니다. 새로운 분이 주인이라는데 그 분을 아침 일찍 만날 생각에 골목으로 들어왔는데 좋아하지도 않은 술을 몇 잔 들이켠 탓에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 댁 대문간에 불 켜진 걸 보고 기방(妓房)이라 여겼는데 틀린 건 아니지요? 오랜만에 한양에 왔으니 처음 만난 처자와 인연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들어온 것인데···, 방안···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 묻습니다. 여긴 어딥니까?"

"도련님은···, 이번 혼사에 오신 새신랑이 아닙니까?"
"혼사요?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약초꾼입니다."

그때 약간 떨어진 대문간에서 발길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맹구(孟狗)란 하인이 신경질적으로 눈을 치뜨며 짜증부터 쏟아냈다.

"어떤 놈이 새벽부터 지랄이여."

느실거리는 걸음으로 대문 가까이 다가가 틈새로 밖을 내다 보던 녀석의 낯이 홱 변했다.
의당 신방이 있어야 할 신랑이 인사불성 되도록 술에 만취한 채 대문짝에 발길질하며 삿대질 하는 게 아닌가. 말을 할 때마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술내가 풀풀 풍겨났다.

"야 이 새끼들아, 내가 이 집에 장가 든 신랑이다. 빨리 문 못 열 것냐!"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흐물흐물 흔들리며 데쳐진 파김치처럼 대문 앞에 허물어진 채 연신 헛구역을 토해냈다. 맹구는 한달음에 사랑채로 달려가 예기치 않은 변고를 알렸다.

"봉봉봉, 봉사 어른! 소인 맹구이옵니다."
"무슨 일이냐, 이 시각에."
"난리가 벌어졌습니다요."

박봉사는 모처럼 찾아든 단잠을 버리지 않으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난리라니, 무슨 난리냐."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신랑이 바뀌었습니다. 어제 오후에 나간 서방님은···, 친구분들과 약주를 마시다···, 지금에야 돌아왔습니다."

거칠게 문이 열리며 박봉사의 노한 음성이 쏟아졌다.
"그 노오옴! 정신 나간 그 인사 지금 어딨느냐?"

"아직 술이 안 깨어···, 대문간에 기댄체···."
"잠들어 있더냐?"
"예에, 봉사 어른."

"허어, 이런 변이 있나. 그 인사가 우리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었구나. 천하에 다시없는 말종이란 말을 들었거늘 혼례를 치른 첫날부터 그 지경이야? 모든 게 그놈 때문에 생긴 일이니 대문 열어 줄 생각 아예 말거라! 그 놈이 깨어나 대문을 두드리더라도  열어주지 말거라! 또한 어느 누구도 문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 알겠느냐?"

"예에, 봉사어른."
"그래도 놈이 돌아가지 않으면 말해라. 우리 서방님은 어제 신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어떤 자가 소란 피우느냐 말해라!"

아닌 게 아니라 소란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누구 한 사람 대문간에 얼굴을 디밀지 않자 술이 깨기 시작한 신랑은 머리통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과 어둑새벽에 몰아닥친 한기에 떨며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소리 고함 질렀다.

"이놈들아! 어서 문 열지 못할까!"
대문 안에서의 대꾸도 곱지 않았다.

"네 이놈! 무슨 헛소릴 주절대느냐. 어제 장가 든 서방님은 신방에서 곱게 주무시는데 웬 미친놈이 새벽부터 혼가(婚家)를 찾아와 소란 떠느냐! 빌어먹을 양이면 다른 집을 찾아가 구걸할 게지 하필이면 혼가에 와서 지랄이냐!"

"어허, 이놈 봐라! 내가 새 신랑이라지 않느냐! 어서 문을 열어라! 경을 치고 싶으냐!"
"저런 미친놈을 봤나. 입은 살아 횡설수설 말은 잘 한다. 우리 서방님이 신방에 계시지 너처럼 고주망태가 돼 남의 집  문전에서 구걸한단 말이냐? 그게 글 읽는 선비가 할 짓이냐!"

그 말이 사내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잠시 문밖이 잠잠하더니 크흠! 큼! 헛기침을 쏟아내며 발걸음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사내에겐 손해날 게 없었다. 이 집에 장가들었으니 아무 때나 올 수 있다는 자만심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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