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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젊은 부자가 아니라면 꿈 깨시라

[1만1000원의기적⑤] 늙고 가난한 자 위한 민간보험이 존재할 수 없는 원리

등록|2010.07.08 15:57 수정|2010.07.14 19:15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하자'는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민이 어떤 질병에 걸려도 병원비를 걱정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이다. 이들은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에 손을 벌리기에 앞서 국민 스스로 보험료 부담을 조금 더 늘리자고 제안하고있다. 지금보다 건강보험료를 1인당 월평균 1만1000원 올려서 모든 사람이 필요한 혜택을 받을수 있도록 한다는 것. <오마이뉴스>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의료복지혁명을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심도있게 고민해본다. 다섯 번째는 정태인 경제평론가의 글이다. [편집자말]

▲ 드라마 <하얀거탑>의 한 장면. ⓒ MBC


오바마 대통령이 '히틀러! 공산주의자!'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까지 의료시스템 개혁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새로운 공공보험을 도입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시장에 의존하는 미국 의료시스템의 비효율성은 거의 개선되지 못할 전망이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오바마의 소원이었던 바로 그 공공보험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국 정부는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세계 5위 정도의 효율성을 달성한 것으로 평가되는데도 말이다.

'의료 산업화'(참여정부)와 '의료선진화'(이명박 정부)로 이름만 달라졌을 뿐 참여정부 때 제출되었던 의료 민영화 법안이 다시 부활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시장 요소를 더 많이 도입하면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보수시대'의 신화, 2008년부터의 금융위기로 사경에 처한 시장만능론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의료부문에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은 애로우(Kenneth Arrow, 197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고전적 논문('불확실성과 의료의 후생경제학') 이래 경제학자들에게도 상식이다. 표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시장 실패'가 다 관찰될 뿐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의 위험과 불확실성이 넘실대는 곳이 바로 의료부문이다.

건강보험 질병리스트가 민간보험에 넘어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고 암을 치료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그러나 어떤 은행도 암에 걸린 사람에게 치료비를 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병이 나아서 돈을 빨리 갚을 수 있을까, 지극히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것이 보험이다.

그러나 민간보험시장은 소비자의 역선택과 보험사의 위험선택(risk selection)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인)라면 가난한 사람, 노인, 임산부 등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사람과 함께 보험에 들지 않으려 할 것이고 보험회사는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 부자들만 뽑아서 보험에 가입시키려 할 것이다. 결국 보험의 원래 기능은 사라지고 만다.

후자의 경우를 특히 "단물 빨아먹기"라고 부르는데 교육 등 서비스 시장에서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최근 정부는 보험업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보험사기(보험에 가입할 때 당신이 앓았던 질병 리스트를 하나도 빼 놓지 않고 말해야 사기가 아니다)를 막으려 한다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질병 정보가 민간 보험회사에 넘어간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들은 사람들을 그룹별로 분리한 상품을 만들어 가격차별화를 통해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 할 것이다. 원리 상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보험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거대한 자본과 방대한 정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몇 안 되는 보험회사들이 시장에 진입장벽을 치고 카르텔을 형성하기 십상이다. 즉 독과점이라는 시장실패도 필연적이다. 보험시장이 분리되고 또한 독점이 형성되면 당연히 보험료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최근 실손형 보험이 한국의 의료비 급증을 주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병원 내 소비자 주권 찾기, 불가능에 가깝다

▲ 마이클무어 감독의 <식코(SICKO)>는 미국의 민간의료보험에 얽힌 충격적 사실을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은 작품. ⓒ 스폰지

공급자와 소비자가 알고 있는 정보가 서로 같지 않은 경우를 정보의 비대칭성이라고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만큼 정보의 비대칭성이 극심한 경우는 좀체 찾을 수 없다. "MRI를 찍어야 하고 3일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가? 응급 상황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할 것이다. 치료의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병원비를 미리 알 수 없으니 값싼 진료를 선택할 방법도 없다. 병원에서 소비자 주권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영리법인은 건강보험 비급여 부분을 늘리는 가격차별화를 꾀할 수 있다. 의료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면허제도는 의사의 공급을 제한하고 대형병원은 각 지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린다. 이 역시 의료비 증가를 가져오는 요인이다. 또한 전염병의 예방이나 위생 관리는 그 자체로 외부성이 강한 공공재이므로 시장이 공급할 수 없다.

<오마이뉴스> 독자라면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건강보험은 이런 실패들을 거의 다 막을 수 있다. 건강보험은 전 국민이 하나의 보험에 들어 있으니(강제가입) 규모의 경제를 통해 관리비용을 줄이고 모두가 위험을 공유하도록 만든다.

또한 건강보험은 환자들을 대신해서 모든 병원에 대해 수요독점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병원 당연지정제) 정보의 비대칭성과 독점으로 인한 폐해를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다. 병원이 제출한 보험금 신청서를 일일이 검사해서 고가 약품 사용, 고가의 의료기기 사용 등 과잉진료를 억제할 수 있다. 현재 병원이 비영리법인인 것도 투자자들을 위한 수익성 추구를 일정하게 견제할 수 있다.

우리 아이 위해서라도, 건보 보장성 강화는 필수

문제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평균 60%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중병에 걸리는 경우 본인부담금 40% 때문에 집안이 망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값비싸고 비효율적인 민간보험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 1인당 평균 1만1000원을 더 내서 입원 중심의 병원비를 사실상 무상의료에 가깝게 보장하고 연간 내야 할 치료비를 최대 100만 원에서 막을 수 있다면 위에서 말한 문제를 거의 다 해결할 수 있다.

의료는 필수재이며 가치재(merit goods)이다. 수요에 따라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공급되어야 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임신했다고 해서, 늙었다고 해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누구나 늙고 병든다. 지금 어르신의 의료비를 우리가 치르면 우리가 늙었을 때 다음 세대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는 의료비 상승을 막기 위해서도,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이 평생 걱정 없이 살게 하기 위해서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필수적이다.

현재의 진료비 낭비구조를 개혁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건강보험 하나로' 제안서는 행위별 수가제를 포괄 수가제, 또는 총액수가제로 바꾸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1차의료기관에는 주치의제도를 도입하여 지역주민의 건강과 질병 문제를 포괄적이고 효율적으로 잘 돌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다. 이런 모든 개혁의 첫걸음이 "건강보험 하나로"이다.
덧붙이는 글 정태인 기자는 경제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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