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사리
우리 사회에서 드러난 종교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제목을 읽으면, 상투적인 문안이나 반가운 인사라기보다는 정말 걱정이 되어서 정색을 하고 안녕 여부를 묻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성스러운 종교가 고단한 세상살이에 지쳐 신음하는 속인들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할 텐데, 처지가 거꾸로 되었다는 저자의 탄식이 전해온다.
하지만 근년에 잇달아 출간되고 있는 '교회 내부 개혁 이야기'와는 색깔이 조금 다르다. 몇 꼭지는 개신교 내부의 교리 논쟁을 다루기는 하지만, 큰 흐름은 종교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운다'는 꼭지가 있다. 개신교 바깥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부 사람들은 금세 알아듣는다. 장로교든 감리교든 성결교든 오순절 교단이든, '기독교OOO'와 '예수교OOO'로 갈라졌다. 교리 논쟁이나 교권 싸움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이좋게 둘로 찢어 하나씩 꿰차고는 서로 자기가 진짜라고 원조 논쟁을 벌이는 현실을 보여준다.
'월마트형 교회와 패스트푸드 신자', '노무현의 최대 정적은 한국교회였다', '한국 개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교 정복인가' 같은 꼭지는 제목만 읽어도 한국교회의 모습이 대충 파악된다. 물론 고 김수환 추기경을 한껏 드러내면서도 실제 행보는 그의 뜻과 반대 길로 가고 있는 가톨릭이나 교리로는 불살생(不殺生)을 가르치면서 실제로는 참전(參戰)을 독려했던 호국 불교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일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종교의 사회적 책임이나 기능에 대해서 작은 관심이라도 가졌다면, '화해와 평화와 생명의 담지자이자 전파자로서의 종교'라는 표현이 너무 뻔하고 식상하게 들릴 것이다. 표지 디자인이 아무리 산뜻하다 한들 책장을 넘길 엄두가 나지 않을 위험이 크다. 하지만 백찬홍 선생은 뻔한 주제를 빤하지 않게 쓸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책에서 그 능력을 잘 발휘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는 데 시간을 그리 많이 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조카는 몇 년 전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코스'를 한 달가량 걷고 돌아 온 적이 있다. 자기 삶에 대해 뭔가 진지하게 성찰한 것 같은 글을 미니홈피에 남겼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로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주 만나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몸무게가 제법 빠졌다는 사실이다. 조카는 아마도 산티아고 순례길과 관련한 책을 읽었거나 방송을 본 다음 자극 내지 감동을 받아서 비싼 돈과 많은 시간을 들여서 그곳을 다녀왔을 것이다. 조카가 순례길을 가기 전에 내가 먼저 백찬홍 선생의 책을 읽었더라면, 틀림없이 이 책부터 읽은 다음 떠나라고 건네주었을 것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백찬홍 선생이 인용한 파울로 코엘료의 말처럼 '헛된 욕망과 분노에서 벗어나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목표를 상실한 현대인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저자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러나 이 길의 역사를 제대로 되새기려면 자신에 대한 성찰뿐 아니라 그 길 위에서 희생당한 사람들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의 첫 꼭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십자군의 길이다'의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야고보의 묘에 성당을 세우고,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봉했다.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야고보의 묘를 성지로 선포하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의 죄를 감해 준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몰려들었다.
그들 중 일부가 스페인 군대와 연합하거나 입대해 이슬람 세력과 싸웠고, 그 결과 스페인의 영토가 확장됐다. 이사벨라 여왕은 스페인을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이슬람과 유대인 신자를 축출했다. 개종을 거부하는 이교도와 반체제 인사들을 이단으로 몰아 불에 태워 죽이거나 재산을 몰수한 뒤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이런 희생자가 무려 24만 명이 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목적을 다한 이 길은 폐허가 되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16세기 이후 잊힌 산티아고가 부활했다. 스페인에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7년 이 길을 거쳐 산티아고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교황의 방문 이후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는 사람들이 넘쳤고, 제법 많은 한국 사람들도 그 행렬에 동참했다. 스페인 교회는 주요 거점 도시들의 성당에서 순례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교회 차원의 이벤트를 열어 주고 있다. 종착지에 있는 대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마련한 장엄 미사가 대미를 이룬다. 순례자들은 보수적인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잠재적 지지자가 되거나 우호적인 자세를 갖게 된다.
저자는 이교도들의 피로 이루어진 멀고 먼 스페인의 시골길에서 방황하지 말고, 이 땅의 올곧은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애환이 서린 땅을 먼저 밟아볼 것을 권한다. 다산 정약용이나 고산 윤선도나 추사 김정희가 걸어간 길, 또는 백두대간이나 제주도 올레 길 같은 곳 말이다.
자아 성찰의 공간으로 뜻깊게 느껴진 곳이 사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처음에는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성찰의 색깔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런 교훈들이 재미있는 소재들과 어우러져서 풍성한 읽을거리, 생각거리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 '문선명, 현대사 격변기에 탁월한 정세 인식으로 성공하다'라는 제목만 보고 꼭지가 확 돌아버릴 독실한 개신교 신자는 아예 읽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저자 역시 문선명씨가 이단이라는 것을 확신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교리 논쟁을 할 뜻은 아예 없다. 저자가 보기에 문선명씨는 탁월한 리더십을 갖고 있다.
그가 한국 개신교의 이단 시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리더십과 함께 시류에 영합하면서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 권력과 결탁해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해 왔기 때문이다. 교리는 달라도 하는 짓은 보수 개신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저자의 관점이 이러하니, 이단 박멸이나 교리 수호 등에 목숨 건 신자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화해와 평화와 생명의 담지자이자 전파자로서의 종교'가 제 정체성을 지키면서 안녕히 지내고 계신지 진지하게 반성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나 유익하다.
전체 31꼭지로 구성된 이 책 내용은 최근 2년 가까이 <오마이뉴스>에서 '백찬홍의 종교로 세상 읽기'라는 타이틀로 연재한 글 중에서 약 3분의 2를 골라서 편집한 것이다. 각 꼭지의 분량이 별로 길지 않아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내용에 빠져 들어가다 보면 왠지 읽다가 마는 느낌이 드는 단점도 있다. 또 단행본으로 출간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성이 강한 데 비해 통일성이 약하다는 점이 아쉽다.
저자 백찬홍 선생은 한국외대와 감리교신학대학원을 나와 청년 시절부터 기독교 사회 운동에 참여했으며, 그동안 여러 시민 사회 단체에서 일했다. 지금은 에코피스아시아 운영위원장 겸 이사다. 에코피스아시아는 중국, 몽골에서 사막화를 방지하고, 초지를 조성하며, 숲을 복원하고, 친환경 에너지를 보급하는 일을 하는 NGO다. 그리고 유영모,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 운영위원이다. 예나 지금이나 내용은 좋은데 돈은 안 되는 일만 하고 있는데, 이 책도 그래 보인다.
저자는 3년 전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라는 책을 김진호, 최형묵 목사와 함께 낸 적이 있다. <종교의 안부를 묻는다>는 그의 첫 번째 단독 저서다. 다음에는 화해와 평화와 생명의 담지자이자 전파자의 삶을 아름답게 살았던 종교인들 이야기를 낼 계획이다. 이 책에서 맛보기로 등장한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킨 조니 워커 교황' 같은 인물이다.
'조니 워커'라는 브랜드의 스카치위스키를 즐겨 마시던 교황이 아니라,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낮은 곳만 찾아다닌 walker 요한이다. 자료는 어느 정도 모아 놓았다고 하니 머지않아 두 번째 책이 나오겠다. 다음 작품은 내용 좋으면서 돈도 꽤 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31가지 주제로 읽는 우리 시대 종교의 속살 <종교의 안부를 묻는다> / 백찬홍 / 평사리 / 2010-06-19 / 1만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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