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동행해줘서 고맙수, 귀신님"
[공모- 무서운 이야기] 장돌뱅이 아버지가 겪은 귀신과의 하룻밤
4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이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니까 아주 옛날에 들은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장돌뱅이셨다. 창호지를 지고 이곳저곳 오일장에 다니시면서 장사를 하신 것이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라 밤 늦게 걸어 다니시는 것이 다반사였다. 아버지는 그 때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주셨지만 아직까지 뇌리에 똑똑히 박혀 있는 것은 귀신에 대한 것 몇 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올해로 만 40년이 되었으니 사람은 가고 이야기만 남아 있다고나 할까.
그 때 우리는 경남 함양의 두메산골에 살고 있었다. 모두 합해야 30호가 될까 말까한 마을에 살면서 아버지는 인근 고장으로 장사를 다니셨다. 인근 고장이라고 했으나 함양뿐만 아니라 거창, 산청, 합천 멀리는 하동 장까지 다녔으니 그 범위는 결코 좁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니 꼭 생활의 한 방편으로 장돌뱅이 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는 주위에서 한량이라고들 했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분의 생활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거창 장에 일을 보고 늦은 밤 시간에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직접 겪은 이야기이다. 거창에서 함양 우리 마을까지는 80리 길이라고 했다. 거창에서 해거름에 출발한다고 해도 그 이튿날 날이 샐 녘이 다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날도 지인들과 막걸리를 한 잔 걸치고 기분 좋게 출발했다고 한다. 장거리 행보에 얼큰한 막걸리 취기는 큰 도움이 된다는 지론을 아버지는 가지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중간중간 담배를 피우며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80리 길은 사람의 걸음으로 감당하기에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걷는다고 걸었지만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중간 지점을 조금 더 지났을 뿐이었다. 50년 전의 우리나라 야밤은 아주 어두웠다. 전기의 보급률이 형편 없을 때여서 대도시라고 해도 중심부 이외에는 깜깜한 밤을 맞이해야 하는 시절이니 시골은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거리 도보에 다행히 반달이 친구가 되어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내 대장부이다. 웬만한 무서움은 무서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날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자정이 지나 칠흑 같은 밤을 혼자 걷는데,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는 것이다. 걸음을 멈추면 그도 멈춰서고, 또 속도를 내서 걸으면 그도 동일한 속도로 따라붙는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해대고 또 담배를 피워 물어도 그의 동행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아직도 집에 당도하기까지는 빨리 걸어도 두 시간은 훨씬 더 걸어야 했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머리가 쭈삣 서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한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다행히 그곳에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살고 있다. 그 마을까지만 가도 살 방도가 생길 것 같았다. 심야,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이지만 염치불구하고 친구를 깨울 생각이었다. 그 집 사랑채에 잠깐 눈을 붙이는 신세를 질 수도 있겠으나 호롱불을 빌어 가던 길을 계속 잇기로 마음먹었다. 호롱을 빌리는 것은 생각대로 성사되었다.
호롱불을 밝히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마을을 벗어나서 한참을 걸으니 그가 다시 동행했다. '동행하는 것 같았다'가 아니라 '동행했다'고 단정적 표현을 쓰는 것은 그가 바로 귀신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갈 길을 비춰주는 호롱불이 이상했다. 바람막음용 유리 안의 심지불이 십여 발걸음을 간격으로 계속 꺼지는 것이 귀신의 장난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성냥으로 어렵게 불을 붙이면 또 몇 걸음 뒤에 꺼지고, 또 붙이면 꺼지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마음을 다잡고 그를 얼러대기 시작했다.
"혼자 오기 힘든 먼 길은 동행하며 지켜줘서 고맙수. 우리 친구하며 집에까지 함께 갑시다. 서운하지 않게 사례는 하겠시다."
혼자 말처럼 했는데,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호롱불은 더 이상 꺼지지 않았다. 온전한 호롱불 빛이 길을 계속 밝혀주고 있었다. 귀신과의 동행, 아버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와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신세 한탄도 하고, 얼기설기 얽힌 인간관계를 푸는 해법도 물어보고,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도 그에게 했다고 한다. 물론 일방적 대화였다. 귀신이 답을 준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도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귀신이 지켜주는 밤길, 얼마나 무서우면서도 한편 든든한 길인가!
가을밤은 더디 새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이 짧은 여름이면 벌써 먼동이 훤이 틀 시각이지만 쌀쌀한 바람은 아직도 밤을 어둠으로 잡아두고 있었다. 삽작문을 들어서니 드디어 다 왔다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마침 건너 동네 도가(양조장)의 불독이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도가의 불독은 부잣집을 지켜주는 고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명한 개였다. 아버지는 귀신에게 밤길을 동행해주면 서운하지 않게 사례하겠다고 한 약속이 생각났다. 그는 귀신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무서운 밤길을 동행하며 지켜줘서 고맙수다. 내가 드릴 것이 변변치 않다는 것은 잘 아실 터니, 저 건너 마을 도가 개나 가지시유. 도가 어른 알면 야단날 일이지만… ."
이렇게 인사하고 안채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잠을 깼다. 차려주는 밥을 떠는 둥 마는 둥하고 논으로 향했다. 장돌뱅이 생활은 농사일에 지각생을 만들기 십상이다. 전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낫으로 일일이 벼야하는 나락단을 묶어세우고 사람들이 모여 있을 주막으로 향했다. 몇몇 사람이 떠돌아다니는 소문들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걸치고 있었다. 도가가 있는 '신기말'에 사는 박씨도 자기만 알고 있는 소식이라며 말은 건넸다.
"글세 말이여, 어제 밤새 우리 동네 도가 개가 없어졌다네. 그 무서운 불독을 누가 훔쳐 갔을까 몰라. 도둑이라곤 눈 닦고 찾아도 없었던 마을인데 말이야. 귀신이 곡할 일 아닌감!"
도가 집 불독이 사라진 까닭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거창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밤길을 동행해준 귀신에게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로 준 사례품이 애꿎은 도가집 불독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밤이었다. 지천명을 지나 그 중반으로 접어든 나이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들려준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무서우면서도 한편 따스한 향수 비슷한 것에 젖곤 한다.
그 때 우리는 경남 함양의 두메산골에 살고 있었다. 모두 합해야 30호가 될까 말까한 마을에 살면서 아버지는 인근 고장으로 장사를 다니셨다. 인근 고장이라고 했으나 함양뿐만 아니라 거창, 산청, 합천 멀리는 하동 장까지 다녔으니 그 범위는 결코 좁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니 꼭 생활의 한 방편으로 장돌뱅이 생활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는 주위에서 한량이라고들 했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분의 생활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80리 길은 사람의 걸음으로 감당하기에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걷는다고 걸었지만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중간 지점을 조금 더 지났을 뿐이었다. 50년 전의 우리나라 야밤은 아주 어두웠다. 전기의 보급률이 형편 없을 때여서 대도시라고 해도 중심부 이외에는 깜깜한 밤을 맞이해야 하는 시절이니 시골은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거리 도보에 다행히 반달이 친구가 되어 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내 대장부이다. 웬만한 무서움은 무서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날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자정이 지나 칠흑 같은 밤을 혼자 걷는데,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는 것이다. 걸음을 멈추면 그도 멈춰서고, 또 속도를 내서 걸으면 그도 동일한 속도로 따라붙는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해대고 또 담배를 피워 물어도 그의 동행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아직도 집에 당도하기까지는 빨리 걸어도 두 시간은 훨씬 더 걸어야 했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머리가 쭈삣 서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한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다행히 그곳에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살고 있다. 그 마을까지만 가도 살 방도가 생길 것 같았다. 심야,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이지만 염치불구하고 친구를 깨울 생각이었다. 그 집 사랑채에 잠깐 눈을 붙이는 신세를 질 수도 있겠으나 호롱불을 빌어 가던 길을 계속 잇기로 마음먹었다. 호롱을 빌리는 것은 생각대로 성사되었다.
호롱불을 밝히니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마을을 벗어나서 한참을 걸으니 그가 다시 동행했다. '동행하는 것 같았다'가 아니라 '동행했다'고 단정적 표현을 쓰는 것은 그가 바로 귀신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갈 길을 비춰주는 호롱불이 이상했다. 바람막음용 유리 안의 심지불이 십여 발걸음을 간격으로 계속 꺼지는 것이 귀신의 장난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성냥으로 어렵게 불을 붙이면 또 몇 걸음 뒤에 꺼지고, 또 붙이면 꺼지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마음을 다잡고 그를 얼러대기 시작했다.
"혼자 오기 힘든 먼 길은 동행하며 지켜줘서 고맙수. 우리 친구하며 집에까지 함께 갑시다. 서운하지 않게 사례는 하겠시다."
혼자 말처럼 했는데,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호롱불은 더 이상 꺼지지 않았다. 온전한 호롱불 빛이 길을 계속 밝혀주고 있었다. 귀신과의 동행, 아버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와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신세 한탄도 하고, 얼기설기 얽힌 인간관계를 푸는 해법도 물어보고,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도 그에게 했다고 한다. 물론 일방적 대화였다. 귀신이 답을 준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도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귀신이 지켜주는 밤길, 얼마나 무서우면서도 한편 든든한 길인가!
가을밤은 더디 새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이 짧은 여름이면 벌써 먼동이 훤이 틀 시각이지만 쌀쌀한 바람은 아직도 밤을 어둠으로 잡아두고 있었다. 삽작문을 들어서니 드디어 다 왔다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마침 건너 동네 도가(양조장)의 불독이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도가의 불독은 부잣집을 지켜주는 고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명한 개였다. 아버지는 귀신에게 밤길을 동행해주면 서운하지 않게 사례하겠다고 한 약속이 생각났다. 그는 귀신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무서운 밤길을 동행하며 지켜줘서 고맙수다. 내가 드릴 것이 변변치 않다는 것은 잘 아실 터니, 저 건너 마을 도가 개나 가지시유. 도가 어른 알면 야단날 일이지만… ."
이렇게 인사하고 안채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잠을 깼다. 차려주는 밥을 떠는 둥 마는 둥하고 논으로 향했다. 장돌뱅이 생활은 농사일에 지각생을 만들기 십상이다. 전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낫으로 일일이 벼야하는 나락단을 묶어세우고 사람들이 모여 있을 주막으로 향했다. 몇몇 사람이 떠돌아다니는 소문들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걸치고 있었다. 도가가 있는 '신기말'에 사는 박씨도 자기만 알고 있는 소식이라며 말은 건넸다.
"글세 말이여, 어제 밤새 우리 동네 도가 개가 없어졌다네. 그 무서운 불독을 누가 훔쳐 갔을까 몰라. 도둑이라곤 눈 닦고 찾아도 없었던 마을인데 말이야. 귀신이 곡할 일 아닌감!"
도가 집 불독이 사라진 까닭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거창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밤길을 동행해준 귀신에게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로 준 사례품이 애꿎은 도가집 불독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밤이었다. 지천명을 지나 그 중반으로 접어든 나이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들려준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무서우면서도 한편 따스한 향수 비슷한 것에 젖곤 한다.
덧붙이는 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응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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