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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모자를 쓴다, 쪽팔리니까

[출장 청소부 체험 21일] 청소 유목민, 도시의 찌꺼기를 쓸다

등록|2010.07.14 10:21 수정|2010.07.14 14:34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대나 만남에 대한 설렘 따위는 없다. 산뜻한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살갑게 인사를 건네지만,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 금빛 명찰을 단 매니저가 직원을 타박한다. "아저씨 지나가시잖아, 길 좀 비켜줘라." 파란색 물통을 들고 주방에 들어선 나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지만 청소복을 입은 '아저씨'일 뿐이다.

우리는 청소 유목민이다. 수원, 안양 등 수도권과 청주, 천안, 춘천까지 전국 어디든 부르면 달려간다. 전문화와 외주화가 우리를 낳았다. 꽤 규모가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들이 우리가 달려가는 '초원'이다. 마지막 손님이 나가는 시간, 오후 11시. 현장 책임자 최 과장이 매장에 올라가 완전히 비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차 트렁크에서 장비를 내린다. 주방으로 올라가는 화물칸 승강기에 장비를 싣는다. 한 손엔 대걸레를 움켜쥐고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없는 비상계단을 오른다. 오후 11시 13분, 청소 시작이다!

▲ 바닥 청소를 하기 전 테이블 위에 의자를 올린 모습.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3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사 먹는 대신 밤마다 3만5000원짜리 출장청소를 한다. ⓒ 황상호


청소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다. 다만 규칙은 있다. 작업 동선을 지켜야 한다. 홀 청소는 의자를 테이블 위로 올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테이블 안쪽 의자를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린다. 다음 바깥 쪽 의자를 그 위에 뒤집어엎는다. "안 쪽 것부터 올리라고요!" 이 과장이 스무 살이나 많은 오 반장에게 짜증을 낸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 반장은 실수가 많다. 이 과장은 이 일을 한 지 6년째다. 그 전에는 외국 담배 납품 일을 했는데 잘 안 풀렸다고 한다.

70cm가 넘는 긴 빗자루로 쓰레기를 쓸어 담는다. 허리를 숙이지 않고 '슥' 쓸어야 몸이 덜 힘들다. 따뜻한 물에 세제를 푼다. 축구공 3개 만한 솔이 달려 있는 청소기 '스윙 머신'에 희석한 세제를 넣고 돌린다. 바닥이 많이 더러우면 대걸레에 세제를 묻힌 뒤 바닥에 초벌칠을 한다. 거품 위를 지나가며 골고루 묻혀야 한다. 휘청휘청, 미끌미끌,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왜 김연아의 금메달이 위대한지 이해할 수 있다.

식탁 다리에 이물질이 끼지 않도록 식탁을 밀지 않고 들어 옮긴다. 불빛이 밝지 않은 레스토랑 안이지만 바닥에 조그마한 이물질이라도 있으면 껌 칼로 떼어낸다. 일만큼은 확실하다. 어설프게 했다간 밥줄이 떨어진다. 다음날 청소한 가게에서 작업평가서를 보낸다. 주방 A, 홀 A+, 배수구 B… 낮은 평가가 쌓이면 재계약을 못한다.

가게의 평균 면적은 661m²이다. 이런 가게를 4명이 한 달에 25일 정도 청소한다. 한 달 동안 청소하는 면적을 합하면 월드컵 경기장의 2배가 넘는다.

독한 주방 세제 코와 입으로... 피부 벗겨지기도

▲ 기름끼가 잔뜩 낀 후드의 철망은 독한 세제를 뿌린 뒤 고압의 물로 벗겨내야 한다. ⓒ 황상호


"컥컥…."

주방 세제는 독하다. 찌든 기름때를 벗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고무장갑 없이 세제를 만졌다간 피부가 벗겨지기 십상이다. 천장의 후드를 닦기 위해 머리 위로 세제를 뿌린다. 마스크가 없어 세제가 코와 입으로 들어간다.

▲ 음식찌꺼기가 가득한 배수로를 청소하다보면 구정물이 입에 튈 때가 많다. ⓒ 김상윤

후드를 닦는 일은 젊은 일꾼들 몫이다. 조리대 위에 올라가 작업을 해야 하니 유연성이 필요하다. 베테랑들도 종종 바닥으로 떨어지곤 한다. 어떤 후드는 식지 않은 튀김 기름 조리대 위에 있어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어설프게 덮인 철판을 밟았다간 기름에 빠져 중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먼저 후드에서 철망을 분리한다. 떼어낸 망에 알칼리성 세제를 묻히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고압 분사기로 물을 쏘면 새것처럼 은빛 찬란해진다.
청소한 티는 벽타일에서 가장 확실히 난다. 광낸 구두처럼 반짝거려야 한다. 매미처럼 벽에 달라붙어 빛이 날 때까지 젖은 걸레와 마른걸레를 번갈아가며 닦는다. 이걸 '벽을 잡는다'고 표현한다.

주방 청소의 마침표는 배수로 세척이다. 배수로 뚜껑을 연다. 막힌 혈관처럼 콜레스테롤 같은 음식 찌꺼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잠시 숨을 멈추고 그 안으로 손을 넣는다. 수세미로 닦아내는 것이지만 우선은 손으로 퍼 올려야 한다. 새우, 소시지, 조갯살, 파프리카, 양배추 같은 것들이 나온다. 악취는 '직속 타구'다. 맡는 순간 구역질이 난다. 격한 수세미질에 구정물이 입술에 튄다.

쉬는 시간은 한번, 오전 2시다. 20분 정도 쉰다. 그렇다고 '새참'같은 건 없다. 가끔 '센스' 있는 가게 직원이 퇴근 전에 과자나 음료수를 챙겨주고 가기도 한다. 5일에 한 번 꼴로 관리직 김 부장이 현장에 와 캔커피를 산다. 사장의 친동생인 김 부장은 낮에 근무하는데, 가끔 현장을 돌아보며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따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운동권 출신 아냐?", "스파이 아냐?"하고 묻곤 했다.

오전 5시 귀경길 시속 140km, 무사하기만 빈다

귀경길도 속도전이다. 계기판 속도가 올라가야 퇴근이 빨라지니 140km를 넘나든다. 앞 차선에 빈틈만 보이면 끼어든다. 운전수는 이 과장이거나 최 과장이다. 그 둘도 밤새 일했다. 워낙 숙련된 일꾼이어서 둘이 전체 일의 60% 이상을 해치운다.

최 과장은 현장 총책임자다. 15년 전 택배를 하며 부업으로 청소를 시작했는데, 8년 전 전업으로 바꿨다. 핸들을 잡은 그가 졸리는지 라디오 볼륨을 높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오전 4시 57분,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클라이맥스의 심벌즈 소리까지 아득하게 들린다.

아찔한 순간이 많다. 지난해에도 대형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대전에서 올라오던 길, 무리하게 차선을 바꾸다가 1차선에서 가드레일을 받고 역방향으로 정지돼 있던 차량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차는 폐차됐다. 이 과장은 한 달간 병원신세를 졌고, 운전을 했던 최 부장도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보상 문제 등이 얽혀 그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루 동안 이동한 최장거리는 왕복으로 398.6km였다. 한 달 평균 이동한 거리는 왕복으로 2310km. 서울과 부산을 3번 왕복하는 거리다. 밤샘 작업, 졸린 운전자, 장거리 운전, 과속 질주… 그저 무사하기만 빌 뿐이다.  

▲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하기 위해 빨리 달리다보면 교통사고가 날 위험이 크다. ⓒ 김상윤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은 3평 남짓이다. 3인용 소파, 정수기, 원탁 테이블 하나, 옷걸이 몇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이 비켜서지 않으면 서로 못 지나갈 정도로 좁다. 샤워시설은 없다. 한 평 남짓 화장실만 하나 있다. 곧장 옷을 갈아입고 퇴근한다. 특별히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한시라도 빨리 퇴근하고픈 마음뿐이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퇴근한다.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청소 아주머니들이 어떤 도구, 어떤 자세로 일하는지 관찰한다. 저 자세로 계속 일하면 필시 허리가 휠 것이다. 걱정스럽게 보지만 눈 마주칠 일은 없다. 그들 대부분이 바닥만 보면서 일한다. 아침의 활기나 웃음기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산재와 구조조정의 희생자 오씨, 8천원으로 한달 버텨

"오 반장님, 일은 몸에 좀 붙었어요?"

책상에 앉아 김 부장이 묻는다. "으 헤헤헤, 그게 뭐…" 오 반장은 멋쩍은 웃음을 지을 뿐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는다.

오씨는 58년 개띠다. 28살에 고향에서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공사장 막일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경마장에서 보일러 배관공 일을 8년 했다. 그 경력으로 이곳저곳 배관공사를 하러 다녔다. 그러다 6년 전 추락 사고를 당했다. 11m 높이에서 배관작업을 하다 동료 2명과 함께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왼쪽 갈비뼈가 부러지고 허리를 다쳤다. 동작이 느리다고 매번 핀잔 듣는 건 그때 다친 허리 때문이다.

퇴원 후 아는 사람 소개로 한 대형마트에서 지게차 일을 했다. "오후 10시부터 오전 3시까지 일했지, 그때는 월 270만 원은 벌었어." 그때도 마트 직원이 아닌 용역업체 소속이었다. 1천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지게차 사업권을 사서 들어갔다. 지난해 그 회사가 1500명의 인원을 감축하면서 그도 일자리를 잃었다.

오 반장에겐 3살 난 아들이 있다. 뒤늦게 필리핀 출신 아내 사이에 얻은 아이다. 아내는 필리핀 사람들끼리 알음알음해서 일자리를 얻었다. 어린이집 영어강사로 두 곳에서 60만 원을 받는다. "집사람이 벌지 않으면 무조건 적자야." 그가 가진 재산은 보증금 5500만 원짜리 전세집이 전부다.

보육비가 걱정이다. "아침에 집에 가자마자 기저귀를 사러갔어, 한 달 기저귀 값이 5만 원이야." 애가 태어나고 처음 석 달은 한 달에 10만 원 씩 정부에서 육아보조금을 받았다. 지금은 없다.

"돈 있으면, 만 원만 빌려주라."

땅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찾더니 결국 나에게 돈을 꾼다. 오 반장은 다음날 20여일치 봉급을 받았다. 70만 원 남짓이다. 한 달로 따지면 100만 원 조금 넘는다. "공과금 20여만 원 내고, 보험료, 생활비 등 주고 나니까 주머니에 만 원 들어오더라고, 담배 하나 사니까 8000원 남던데." 그는 다음 월급날까지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밤새워 일한다고 집에서 걱정 안 하세요?"
"마누라? 우리 마누라는 돈만 세지! 자식 놈들도 코빼기도 안 비춰."

손아무개(59)씨는 자영업을 하다 접고 청소 일을 한다. "마누라가 들어오지 말래." 서아무개(53)씨도 개인 사업에 실패하고 이 일을 시작했다. 손씨는 자녀 둘을 출가시키고 아내와 살고 있고, 고씨는 아내와 고등학생인 아들이 있다.

서씨, 손씨가 받는 돈도 한 달에 100만 원 남짓이다. 열심히 일해서 직원으로 채용된다고 해도 130만~140만 원이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2년 마다 재계약을 하는 비정규직을 말한다. 오 반장도 마찬가지다. 부양가족이 있는 50대의 세 사람에게 이 정도 수입은 '입에 풀칠하기도 부족할 정도'다. 노후준비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노후? 생각해 놓은 거 없어. 애와 엄마 보험금도 10만 원 정도씩 내니 나까지 하면 힘들지. 계속 일하다보면 어떻게 안 되겠어?"

오 반장은 큰 병 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손씨나 서씨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겐 국민연금도 없고, 보험도 언감생심이다.

3만 원 스테이크· 5천 원 커피 메뉴에 울컥

▲ 파이프를 잡고 벽을 닦는다. 젖은 수건과 마른 수건을 번갈아가며 닦아야 반짝거린다. ⓒ 황상호


"아유, 스테이크 하나에 3만 원이야. 나 같은 사람은 못 와."

손씨는 청소하다가 메뉴판을 보고 기겁한다. 그 식당에서는 보통 수준인 스테이크가 3만  원을 넘는다. "여기 오냐? 먹어봤어?" 최 과장이 내게 물었다. 서울 강남의 한 커피전문점을 청소 할 때다.

"미쳤어. 커피가 오천 원이 넘고. 세상이…."

나의 일당은 3만5500원이다. 쉬는 날은 빠지니 한 달 수입이 채 100만 원이 안 된다. 일인당 3만 원짜리 스테이크, 5천 원짜리 커피는 가당찮은 사치다. 만일 내가 혼자 살면서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처지라면, 이 돈으로 어떻게 생활할 수 있을까 따져봤다. 방값이 30만 원이라면 생활비로 70만 원 남는다. 이틀에 한 번만 아침을 챙겨먹는다고 했을 때 한 달 총 75끼를 먹는다. 한 끼 5000원을 기준으로 밥값만 37만5000원이 든다. 해장국에 소주 한 병을 곁들이는 게 부담스럽다.

매일 8~10시간씩 야간 일을 하면서 한 달에 100만 원은 아무리 따져도 너무 적다. 일반 기업이면 야간작업에 50%의 추가 수당을 줄 것이다. 이 회사에서 대기시간과 이동시간은 근무에 포함되지 않는다. 보통 오후 9시에 출근해 한 시간 대기하고 10시에 작업장으로 이동한다. 일을 시작하는 11시가 되기 전까지 2시간을 그냥 보낸다. 퇴근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멀리 갈 때는 편도만 199km를 달려가지만 특별 수당 같은 것은 없다. 일이 일찍 끝나서 오전 3~4시쯤 돌아와도 집까지 차를 태워주거나 택시비 같은 것을 챙겨주는 법이 없다. 대책 없이 지하철역에 앉아 있다가 첫 차를 타고 퇴근해야 한다.

지방에 일이 연이어 있으면 현지에서 숙식을 할 때도 있다. 청소하는 사람들은 어떤 곳에서 자고 먹을까? 충청도 출장 첫 날, 일을 마치고 '24시간 고기집'에 갔다. 모두 6명이었다. 새벽까지 일했으니 배가 무척 고팠다.

"3300원 짜리 고기가 없네, 그게 맛있는데."

최 과장이 메뉴판을 보고 아쉬워하더니 삼겹살 5인분을 시켰다. "간단하게 먹고 자야하니까요, 그렇죠?" 억지 동의를 구했다. 고기가 불판에 오르기도 전에 빈속에 소주를 들이켰다. 밥을 같이 시킨다. "된장찌개는 서비스죠?" 최 과장이 아주머니에게 몇 차례나 묻는다. 남자 6명이서 삼겹살 5인분에 소주 7병을 마셨다.

숙소로 모텔 방 2개를 잡았다. 3명 씩 나뉘어 자기로 했다. 계산대에서 주인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5천 원 더 주셔야 돼요. 다섯 명이라고 하셨잖아요." 최 과장이 예약했던 이 과장을 쳐다본다. "이 과장, 6명이라고 예약 안 했어?" 이 과장은 엘리베이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다섯 손가락을 쫙 폈다. "에이, 한 명 가지고 되게 그러네. 난 옥상 가서 자면 되지, 아니면 화장실에서 자면 될 거 아냐!" 술이 들어간 김씨가 소리를 높였다. 6만 원을 줘야 한다는 주인을 겨우 설득해 5만5천 원을 내고 6명이 잠을 잤다.

'일하며 공부'는 희망사항일 뿐, 시간도 돈도 없다

처음에 나는 밤에 일하고 낮에는 공부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오전 5시 40분, 지하철 첫 차를 타고 퇴근한다. 빠르면 7시 집에 도착한다. 작업이 길어지면 아침 9시 무렵에야 돌아오는 날도 있다. 씻고 밥 챙겨 먹은 뒤 잠을 청한다. 바로 잠들어도 햇빛 때문인지 생체리듬 때문인지 오후 1~2시가 되면 잠이 깬다. 멍한 상태로 한 시간 정도를 보내고 3시쯤 점심을 챙겨먹는다. 졸려서 다시 자다 깨다 하다가 오후 6시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밥 챙겨 먹고 8시에 집을 나선다. 시간을 잘 내봐야 신문 하나 정도 볼 수 있다.

주말도 없다. 기본적으로 주 6일, 한달 26일 근무다. 토요일엔 출근하지 않지만, 사실 그 날도 아침까지 일하다 돌아온 것이다.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곤 자기계발이 어렵다. 의식주 외에 쓸 돈도 없다.

모두들 모자를 쓴다. 손씨, 서씨, 황씨, 그리고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최 과장도 쓴다.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대부분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다. "쪽 팔려"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특히 독립 건물이나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따로 있는 가게가 아니라, 지하철역 등 사람 많은 곳을 거쳐 들어가야 하는 장소는 다들 싫어했다. 책임자급인 이 과장도 "더러운 일이지만", "쪽팔린 일이긴 하지만"을 심심찮게 내뱉는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일하러 나가는 길이 괴로웠다. 일찍 도착해도 빌딩 앞을 서성였다. 대기실에서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이 땀 뻘뻘 흘리며 일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 '시간을 죽이려고' 실없이 주고받는 야한 농담에 웃어주거나 대꾸하기도 싫었다. 진짜 직장이 아니고 잠시 일하는 것일 뿐인데도,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최 과장에게 그만 두겠다는 말을 꺼냈다. 15일간 일한 뒤였다. 그는 담배에 불을 댕겼다. 딸이 냄새난다고 뽀뽀를 안 해 준다며, 담배를 끊었다고 했던 그였다.

"어떡하냐, 저 영감들 데리고…."

7년 동안 나처럼 석 달 이하로 일하고 떠난 사람이 150명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하루 해보더니 다신 안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한 20명 쯤 돌아야 쓸 만한 사람 하나 정도 생기는 것 같다." 사장은 월급을 올려서 사람을 붙잡을 생각은 없고, 적은 인원으로 어떻게든 해내고 그 몫을 관리직들이 나눠 갖자고 했단다.

부장과 과장들은 돌아가며 조금 더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부장은 어차피 취업도 잘 안 될 텐데 야간작업 좀 하다가 낮에 사무실 근무를 시켜주겠다고 나를 구슬렸다. 거절했다. 그러자 돈을 조금 더 줄 테니 예정돼 있는 지방 출장까지만 도와달라고 했다. 그렇게 총 21일을 일했다. 하지만 그가 챙겨 준 '웃돈'은 고작 5천 원이었다.

2000년 이후 6년간 청소용역업체 70% 증가

▲ 청소 노동자 덕분에 우리는 쾌적한 삶을 누린다. 고개를 숙이고 일해야 하는 그들의 근로 여건이 언제쯤 나아질까. ⓒ 황상호


우리나라에서 청소직 노동자들이 대거 용역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라고 한다. 정부와 기업의 '노동 유연화' 정책에 전문화 바람이 겹치면서 청소 용역업체수가 급격히 늘었다. 민주노총의 2009년 '간접고용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0년에 3997개였던 위생관리용역업체수가 2006년에 6681개로 68% 늘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조사한 2006년 산업·직업별 고용구조조사에 따르면 '청소 및 파출부 관련직'으로 분류된 인원은 46만5000명 정도다. 여기에는 환경미화원, 건물청소원, 세차원뿐 아니라 가사도우미도 포함된다. 청소 노동자들 중에는 여성이 70.64%로 다수를 차지하고, 학력은 중졸 이하(74.8%)가 가장 많았다. 평균연령도 55.8세로 높았다

같은 조사에서 청소직 노동자들은 10명 중 8명이 비정규직(86.5%)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등 민간연구소들이 추정하는 우리나라 비정규직 비율 55%(845만 명)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임금도 낮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의 2006년 '청소용역 노동자의 인권상황 실태조사'에서 이들의 평균 근로시간은 주 48.9시간이었고 월평균 임금 총액은 72만2586원이었다. 당시 전 산업 평균 임금인 240만원의 1/3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생계비도 안 되는 임금 때문에 직원 식당에서 밥을 사 먹기가 부담스러워, 청소 아주머니들이 건물 내 여자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먹는 경우도 많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일한 야간 청소 용역은 그나마 평균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 축에 속했다.

청소일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부업 삼아 하기 때문에 임금이 낮아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고용정보원 분석에 따르면 청소노동자 10명 중 6명이 가구주였다. 내가 일한 현장에서도 50대 근로자들에게 모두 부양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노동 강도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청소부 없는 빌딩을 상상해 보라

우리가 다니는 학교, 회사, 공공기관 등에 청소부가 없다고 생각해 보자. 며칠 못 가 쓰레기통에선 쓰레기가 넘쳐나고 화장실에서 악취가 진동할 것이다. 지난해 11월 말 동덕여대 환경미화 노동자들이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학교가 이틀만에 '쓰레기 하치장'을 방불케 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렇다. 청소는 너무나 필수적인 기능이고, 늘 필요한 서비스다. 지금도 필요하고, 내년에도 필요하고, 그 후년에도 없어선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필수적이고 지속적인 기능을 왜 하나같이 외부 용역에 맡기고, 근로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방치할까? 정말 전문적인 기계작업, 혹은 야간작업이 필요한 경우라면 몰라도 일상적 청소업무는 직접,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하는 게 아닌가? 중간에서 용역업체가 떼 가는 수수료만 얹어 주어도 청소원들의 임금 수준은 꽤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전문 용역업체들도 근로자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 주고, 정규직으로 고용하면 일이 몸에 익은 사람들이 중간에 떠나 버려서 전전긍긍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내가 일 했던 회사도 사람을 못 구해 그렇게 애를 태우면서도 근로 여건을 개선할 생각은 안 했다. 최저가 입찰 때문에 인건비를 억누를 수밖에 없는 용역구조, 대다수 업체들의 영세성, 4대 보험 등의 부담으로 정규직 고용을 꺼리는 현실 등이 그 배경에 있을 것이다.

오늘도 수십 만 명의 청소 노동자가 도시의 찌꺼기들을 쓸어내고 있다. 우리는 그 덕택에 조금 더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과 한숨, 고통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일하는 그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밝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이 만든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 창간특집으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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