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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55회)

삼인행 <1>

등록|2010.07.13 10:45 수정|2010.07.13 10:45
그날 밤 날씨는 칼바람이 몰아쳤다. 멀지않은 색주가에선 희미하게나마 창기들 노랫소리가 왁자하게 웃어대는 소리에 섞여 바람을 타고 흐늘거렸다. 밤이 깊어지면서 야경꾼의 무심한 딱딱이 치는 소리가 한결 멀리서 들릴 때 검은 두 그림자가 제중당 담을 소리없이 뛰어넘었다.

의원의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쉰 평에 가까운 집은 용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중문 못 미쳐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이게 곤(困) 자형으로 액을 가져온다 하여 베어버린 흉터자국이 있는 마당은 휑뎅그렁하기 그지 없었다.

집안은 비어있는 듯 고적했다. 중문 쪽이 훤히 트여 그 한쪽에 가마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손님이 찾아든 것으로 보였는데 그 시각에 찾아든 손님이라면 아무래도 은밀한 거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에 충분했다. 방안에서 새어나온 말이 은근했다.

"어제 이주부가 올린 약제를 받으시고 대비마마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가까운 날 이주불 불러 상을 내린다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어허허, 이런 광영이 있나. 상금(尙今)이 자넬 대비전에 소개시킨 건 자네와 내가 힘을 합쳐야 될 일 때문이야. 지금은 내가 밖으로 드러날 처진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중 잡배마냥 허송세월 할 수만은 없잖은가. 자네도 그쯤은 아리라 보네."

"어찌 모르겠습니까. 쇤네가 대비마마를 뫼실 수 있는 건 모두 이주부의 진맥 솜씨지요."

"진맥 솜씨라?"

"나으리, 쇤네가 자고 갈 순 없으나 나으리의 허기를 채워드릴 수는 있습니다."

이주부의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계집이 먼저 알고 다가왔다.  대비전 나인이라기보다 하루 전에 보낸 약제에 대한 공치사가 더 가까웠다. 정순왕후는 그런 말을 했었다.

"상금이 네가 큰일을 하려면 무엇보다 네 곁에 사내가 있어야 한다. 작은 일이야 아녀자 몫이라지만 큰일은 사내들이 처리하질 않던가."

앞뒤 안 가리고 일을 추진해 나가는 추진력이 있고 지략이 뛰어난 사내가 매력있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처럼 제중당을 나온 이 날 이주부의 마음자릴 파고들었다. 의원은 관형찰색(觀形察色)에 밝다. 낯을 살피며 색깔이 어찌 변하고 눈빛이 달라지는 질 헤아리는데 밝아, 사람 마음을 읽고 빈틈없이 치료할 수 있는 효과를 얻는다.

모시는 이의 지시라지만 깊은 밤 감사의 말 한 마디 하기 위해 제중당에 온다는 게 가벼운 일이 아니고 보면 이유가 있어야 했다. 상대의 마음을 얻거나 내 마음을 주는 방법에 이까짓 추위가 문제겠는가.

이제 삼십대의 피 끓는 사내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여인의 뜨거움이었다. 계집의 마음이 어떻다는 걸 알게 되자 이주부의 목소리도 자연 뜨거워졌다.

"자넨 사내 마음을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상금이가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엔 짙은 교태가 섞여있어 마음을 열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이주부의 손길도 자연스럽게 계집의 몸을 싸안았다.

사내의 손길을 가만히 밀어내며 상금이는 걸터앉는 자세를 취하더니 사내의 뜨거움을 자신의 몸에 집어넣었다. 호흡이 다급히 엉켰다. 사랑이 열기로 시작했어도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이 없다면 그것은 이내 식어버린다. 사랑이 식으면 어찌 해야되는 질 알았으나 이주부는 정수리를 찍어내리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사랑놀일 싱겁게 끝냈다. 상금이가 애써 미소를 띄며 일어나는 걸 보며 이주부가 한 마디 내놓는다.

"오늘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이녁이 급한 마음이니 나 역시 초조해 지는구먼. 조심해 돌아가게."

이주부가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달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이내 하속배가 나타나 가마를 대령했다. 마음에 차도록 소득을 얻은 건 아니지만 그녀는 미련없이 자리를 떴다. 멀지않은 곳에서 야경을 알리는 딱딱이 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고양이가 발길질하듯 눈바람 소리가 극성스러웠다.

한 곳으로 집중하지 못한 마음은 한쪽으로 쏠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찬바람을 몰고 들어서고 있었다. 두 사내였다. 바깥의 기척이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오래 전 집안에 들어온 것으로 직감했다.

"누, 누구시오?"

듬직한 체격의 사내가 이주부와 석 자 거리에 앉자 그가 원숭이 도방에 새로 온 사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날 찾아온 아이가 죽었는가 하면 품안에 지닌 약초까지 사라졌네. 그걸 자네가 아리라 생각해 찾아왔네."

"금석곡을 말하십니까?"
"아는가?"

"소인이 그 약초를 구한 건 맞습니다만 젊은이의 죽음에 대해선 아는 바 없습니다. 도방 나으리가 오셨으니 사실을 말씀드리지요."
"그래야겠지."

"며칠 전 한 젊은이가 우리 가게에 들려 약초를 보인 모양입니다. 짓궂은 약초꾼들이 그 젊은이를 꼬여 술을 사게 했습니다만 그 이후의 일은···."
"모른단 말인가?"

"금석곡은 아녀자의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데 둘도 없는 약초인데다···."
"그래서 윗전에 보내 벼슬자릴 구했는가?"
"그건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거랩니다."

"약초를 팔러 온 젊은이는 보았는가, 어쨌는가?"
"시생은 그날 제중당의 자릴 비웠습니다. 그 젊은이가 온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약초는 구했는가?"

"다행히 술을 먹고 놓아둔 것이랍니다. 소인은 나중에 찾아온 젊은이에게 두 촉의 금석곡을 촉당 스물다섯 석씩 백미 쉰 석을 치렀습니다. 그 젊은인 나으리도 갖다 줘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만, 같은 가격이면 내가 대신 주겠노라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이주부는 비단천에 싸인 약초를 상자에서 꺼내놓았다.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약초는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한 눈에 귀물이었다. 조선 환경에서도 잘 자라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이주부가 그리했다면 그냥 가져갈 수는 없지. 내 날 밝는 대로 금액을 보낼 것이네."
"이왕 나선 길이시니 약초는 오늘 가져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주부는 그것을 처음의 모양대로 싼 후 상자에 넣었다. 그렇게 보면 이곳에 들른 젊은이와 이주부가 만난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선지 이주부가 넌지시 반격하고 나섰다.

"한데, 어인 일이십니까. 닫힌 문 안에 함부로 도방께서 들어오실 분이 아니신데."
"이곳에 들른 젊은이가 수표교 물 웅덩이에서 발견됐음을 아는가?"

"주검이 발견됐다는 건 들었습니다만, 그 젊은이란 건 금시초문입니다."
"등에 우(又) 자를 새긴 것도 처음 듣는가?"
"그렇습니다."

"이곳의 약초꾼이 이상한 곳을 가르쳐 준 모양이네. 그러했기에 표씨 성의 약초꾼은 목숨을 잃은 것이고···. 한데 말일세 이주부."
"예에."

"자네가 이거 하나는 알고 있어야 하네. 그 젊은이의 죽음에 자네가 관련되지 않았다 하니 내 그리 믿겠네. 그 약초를 쉰 석의 금액으로 구했다니 그것도 믿어야겠지. 죽은 자의 몸에 이상한 글자가 쓰인 것이네. 그건 도방에서 손쓴 게 아니란 것이네. 그게 자네와 가까운 자의 솜씨라면 자네 역시 사는 걸 포기해야 될 게야."

그 말을 떨구고 나온 건 좀 더 두고 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나 있었다.

여인이 궁 안의 삼운각에 기댄 채 숨이 끊겨 있었다. 연락을 받은 정약용은 현장에 나가 금줄을 쳐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죽은 자의 신원파악에 들어갔다.

신장은 1미터 60센티 정도로 계란형 얼굴의 도톰한 미인이었다. 화장하지 않았지만 백랍같이 하얀 얼굴엔 수심이 내려앉았고 그것이 눈자위 어림에 기러기 발자국 같은 기미를 어슴푸레 남기고 있었다. 서과가 현장을 돌아본 후 보고했다.

"이 나인은 소향이라 하는 데 나이 스물 셋입니다. 궁에 들어온 지 다섯 해가 지났으며 가끔 삼화루에 출입합니다. 소향이는 명례방에 자리한 하원이란 기생 양성소 출신으로 열두 살 되던 해 내관의 손에 이끌려 왔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향 가루를 뿌리지 않아도 향내가 풍기는 기이한 체질로 나인들 말을 빌리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이 없고 가끔 내명부의 서점에 들려 얘기책을 빌려갔답니다."

"흐음?"
"나으리, 예전엔 환관학사들이 나라 안의 흥미로운 일을 비롯해 궁 안의 은밀한 얘기를 귓속질로 전했습니다만 소인이 서점에 들려 소향이가 빌려간 대여 목록을 봤더니 참으로 흥미로운 게 눈에 띄었습니다."

대여된 책은 <금궤요략>이었다. 중국 한나라의 명의가 지은 것으로 남녀 간의 방사를 다룬 이 책은 여인의 몸을 거문고로 비유했다.

음양의 이치는 거문고를 어떻게 타느냐에 따라 소리 빛깔이 달라진다는 것으로 독자층이 꽤 넓었다. 궁에 있는 많은 여인이 그 책을 보았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몸을 탄주할 사내가 없으니 명저라 해도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소향이가 이 책을 일곱 번이나 대여했다는 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서과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나으리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삼운각에 간이천막을 쳐 구경꾼들의 눈길을 차단하고 여인의 옷가지를 벗겼다. 서과가 주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자 뒤돌아선 채 정약용의 물음이 날아갔다.

"검시기록을 작성해라."
그녀가 사람의 몸그림을 펼치는 걸 보며 의례적인 조건들을 따졌다.

"여인의 사체는 외간 남녀가 보지 않도록 하고 감초즙으로 닦아냈으렷다?"
"그렇습니다, 나으리."
"흔적이 있느냐?"

"사체엔 외상이 한 곳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소인이 영초를 초에 담가 몸에 발랐으나 일체의 상흔은 보이지 않고 목 언저리가 깨끗해 자액이나 목젖 등이 베인 게 아닌 데다 도검 등의 날붙이에 의한 상해도 아닌 듯싶습니다. 벌레가 문 흔적도 없어 독물에 중독된 것이 아닌가 하여···."
"법물을 사용했느냐?"

[주]
∎금궤요략 ; 중국의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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