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가 친구 면회 가던 날
가없이 넓고 큰 꿈을 그렸던 친구들과 고향 냇가에 가고 싶다
▲ 친구 면회하러 간 광주교도소 ⓒ 이경모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꼭 가서는, 가지 않아야 할 곳이 있다면 교도소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독해진 여름 폭염과 수선스러운 세상살이에 비켜있는 것처럼 광주교도소 밖은 역설적일지 몰라도 훨씬 평화로웠다. 죽마고우인 친구가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있는 교도소에 면회를 갔다. 서울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친구가 고향에 들렀다가 오면서 가자고 해 다른 친구 두 명과 함께 갔다.
어색한 표정에 홀쭉하니 고개를 한 번은 돌려 친구들을 외면하는 것이 훨씬 진실하게 친구들 맘에 다가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00교도소로 가면 모범수는 2박3일 외출할 수 있다는데 그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갑자기 내 등 뒤에 있던 서울에서 온 친구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너는 여기서도 편한 곳에 있다면서 더 편한 곳을 찾아가려고 하느냐,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네 생각만 하느냐?"라며 호통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잠시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다른 친구가 화제를 바꾸어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들어 마땅한 말이었다.
그 친구의 죄목은 폭행죄다.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어 크게 싸운 모양이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 50에 주먹다짐으로 교도소에 왔다는 것, 친구들이 그런 친구를 면회 왔다는 것에 조금은 풀 죽어 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서울 친구는 야구공 만한 암 덩어리를 줄여 수술하려고 항암제를 투여하고 있는 중이다.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평소에 서그럽던 친구였지만 삶의 소중함을 몸서리치게 느끼면서 더 화가 났을 게다.
"내가 친구들 얼굴도 보고 밀린 상조회비도 내려고 왔다. 함께 해줘서 고맙다. 나는 걱정 마라. 또 보자."
면회를 마치고 교도소를 나서는 친구들의 발걸음이 더위를 먹은 것처럼 무거울 때 제일 힘들어야 할 친구의 작별인사다.
다음 날 서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서울에 도착해서 많이 힘들었단다.
"지금 누구랑 있어?"
"응, 애들은 출근하고 시골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옆에 계셔."
"집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을 한다.
"서울에 있는 몇몇 친구는 알고 있지만 모르는 친구가 많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됐다."
"아니, 여기 친구들은 다시 집을 나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 맞아 집을 나갔지.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뿐이야."
애써 감정을 감추려고 말하지만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있다.
인생이 뭔지 매만져볼 나이에 삶의 더위에 지치고 상처들이 덧대어지면서 힘든 친구들이 많다. 그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 고향 냇가다.
그곳에는 반듯한 수영 실력은 아니지만 개, 개구리, 송장 헤엄으로 누가 멀리 가나 시합도 하고, 자맥질로 고기 다슬기도 잡고, 입술이 파랗게 되면 미루나무 밑으로 찾아 들어 잘생긴 돌 골라 공기놀이도 하고, 귀에 물이 들어가 먹먹할 때 평평한 돌을 귀에 대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면 또르르 돌로 물이 흘러내리는 추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지금은 아련한 동화책 속에 그려지는 풍경이지만 잠시나마 가없이 넓고 큰 꿈을 그렸던,
너무나 많이 덧칠하여 지저분해졌지만 맑고 때묻지 않은 그때로 돌아가, 허기진 영혼을 달래주고 거기서 같은 시간 속에 머물러 있다가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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