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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드러내는 직업, 내가 버릴 건 나 자신뿐"

[인터뷰] 프로그램 진행 거부하고 파업 참가한 이상호 KBS 아나운서

등록|2010.07.16 15:47 수정|2010.07.16 21:04

▲ 15일, KBS 파업 문화제 현장을 찾은 아나운서 조합원들이 시민들과 함게 문화제를 즐기고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김윤지 아나운서, 박노원 아나운서, 정세진 아나운서. ⓒ 송재걸


"웃고 자지러지는 사이 어느새 머릿속에 개념이 들어선다"는 'KBS 개념 탑재의 밤' 행사가 열린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띈다. 나는 그들을 알지만 그들은 나를 모르는 유명인들, KBS의 꽃이자 얼굴인 아나운서다. 이들은 빼어난 용모와 똑 부러진 말솜씨에 개념까지 가득 찬 KBS 새 노조(언론노조 KBS 본부)의 조합원들이기도 하다.

15일부터 한동안 이들 아나운서 조합원들을 방송에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매일 오전 7시 KBS 라디오 '출발 FM과 함께'에서 상쾌하게 아침을 열던 정세진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당분간 들을 수 없다. KBS의 간판 프로그램인 '9시 주말뉴스'를 진행하는 김윤지 아나운서의 모습도 이번 주 토요일부터는 볼 수 없다. 이들을 포함한 17명의 KBS 아나운서 조합원들이 15일 0시를 기점으로 모든 프로그램 진행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부터 시작된 KBS 새 노조의 파업에 참가하면서도 프로그램 출연을 병행했던 이들은 14일 성명서를 내고 방송 출연 전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새 노조를 대하는 회사의 협상태도가 실망스러워 생명같이 소중한 프로그램들을 뒤로 하고 활활 타오르는 파업의 현장에 맨몸으로 뛰어들 것이다. 아나운서는 결코 영혼 없는 방송기능인이 아니다. 언론사에 근무하는 언론인이고, 우리말의 수호자이며, 방송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봉사자이다. 비뚤어진 언론사의 특별한 사원이기보다는, 바로잡힌 회사의 평범한 사원이기를 소망한다."

실업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나운서들, "방송인생을 걸고" 파업 참가

▲ <시사투나잇>을 진행했던 이상호 아나운서(오른쪽) ⓒ KBS


이에 정장을 빼어 입고 풀 메이크업을 한 채 카메라 앞에 있어야 할 아나운서들이 길거리에 앉았다. 안경을 끼고, 머리를 질끈 묶은 김윤지 아나운서와 캐쥬얼한 T셔츠 차림의 이상호 아나운서, 수수한 원피스를 입은 정세진 아나운서 등 10여명의 조합원들은 나란히 앉아 '개념 탑재의 밤' 행사를 즐겼다.

이들은 근심 한 점 없는 듯 박장대소를 하며, 옆에 앉은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며 파업 문화제에 폭 빠진 듯 보였다. 그러나 걱정이 없을 리 없다. 파업 현장에 얼굴을 비추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아나운서 조합원들이 파업이 끝나면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설'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파업 참가를 이유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방송국에 들어온 아나운서에게 방송을 빼앗는 것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파업 참가를 결심했다. KBS의 '자존심이자 상징'으로  꼽힌 프로그램이었던 <시사투나잇>을 진행하며 얼굴을 알린 이상호 아나운서. 그는 이날 행사 현장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얼굴 드러내는 직업 가진 내가 버릴 것은 나 자신밖에 없기에 파업에 참여했다"며 "외압이 없고 독립된 방송으로 KBS가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우리의 진정성을 알아준다면 방송을 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부차적이다"라고 결의를 밝혔다.

"<시사투나잇>을 맡은 후 소외된 이들을 취재하며 편견을 깨나갔다"는 이 아나운서였기에, 지난 2008년 초 <시사투나잇> 하차가 그에게는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MB 정권 들어서기 직전 봄에 <시사투나잇>에서 하차했다. '정권 바뀌는 시기에 너도 내려온다'고 주변에서 이야기했는데, 그 때 당시에는 그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새 정권과 프로그램 하차가 맞물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아나운서가 하차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시사투나잇>은 결국 폐지 되었다. 그 때 이 아나운서는 "입사 당시에 꿈꿨던 것들이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시사투나잇>과의 인연은 그를 '개념' 차게 만들었고, 지금의 KBS에 문제가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공영방송을 위해 거리에 서 있다.

파업에 얼굴을 비추고, 사진이 찍히는 것도 큰 부담이었을 테지만 이상호 아나운서는 기꺼이 인터뷰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그 용기와 결단이 인터뷰 내내 느껴졌다.

다음은 이상호 아나운서와의 일문일답이다.

"얼굴 드러내는 직업 가진 내가 버릴 것은 나 자신밖에"

▲ 15일, KBS 파업 문화제 현장을 찾은 이상호 아나운서가 시민들과 함께 문화제를 즐기고 있다. ⓒ 이주연


- 아나운서로서 파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듯 하다. 그럼에도 참여 한 이유는.
"PD나 기자들은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작품으로 드러나지만 아나운서는 얼굴로 드러난다. 파업에 참가해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그것 자체를 버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조에 가입하고 파업에 참가한 것은, 얼굴을 드러내는 직업을 가진 나에게 버릴 것이 나 자신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 방송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
"파업에 참가한다는 것은 파업이 실패로 돌아가도 감안하고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올인' 한 것이다. 목숨을 걸었다. 방송인생을 걸었다. 우리의 진정성을 알아준다면 방송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방송의 공정성, 외압이 없고 독립된 방송으로 KBS가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 KBS의 공영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던 <시사 투나잇> 진행을 하면서 얼굴을 많이 알렸다, 본인에게 <시사 투나잇>의 의미는.
"입사 전에는 유명한 MC, 아나운서가 되는 것을 원했다. 성공에 도취되어 있었다. <시사투나잇>을 진행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변했다. 방송을 하면 할수록 사람이 바뀌었다. 프로그램을 1년 동안 진행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소수자들을 취재하면서 나의 고정관념과 편견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래서 <시사투나잇> 하차 이후에도 나서서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려 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사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고 싶다."

- 프로그램이 폐지되었을 때 아쉬웠겠다.
"MB 정권 들어서기 직전 봄에 <시사투나잇>에서 하차했다. '정권 바뀌는 시기에 너도 내려 온다'고 주변에서 이야기했는데 그 때 당시에는 그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새 정권과 프로그램 하차가 맞물렸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그램이 폐지되었을 때 가슴이 굉장히 아팠다. 입사 당시에 꿈꿨던 것들이 어긋난 느낌이었다. 내가 진행할 때까지만 해도 외부의 압력 없이 공정성 있게 방송을 한 지점이 있다. 이후에는 목소리가 많이 완화 되었다. 이런 변화를 느끼고 있었지만 회사 측에 얘기도 못했고, 다른 이들과 고민을 나누지 못했다. 그랬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우리는 영혼 없는 방송기능인이 아니다"

- 아나운서 조합원들이 발표한 성명서 중 "우리는 영혼 없는 방송기능인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어떤 의미인가.
"입사 전까지만 해도 생각 많고 의식도 있고 똑똑했던 이들이 입사하고 나면 방송에서 보이는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 시켜서 포장할 것인가, 아니면 본인이 가졌던 의식과 양심을 발현시킬 것인가 기로에 선다. 이러한 의식과 양심을 키워주거나 발현시켜주는 역할을 회사, 사회, 국가가 해야 하는데 이러한 여건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방송에서 보이는 기계적 중립, 방송의 꽃, 이런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만 떨치고 나오기 두려운 지점이 있다. 그동안 영혼이 없었을 수도 있다.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웃었던 그런 순간들이 많았다. 파업을 기점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 같다."

- 파업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를 느끼나.
"방송을 마치고 집에 갈 때 한 어르신이 '파업하는 거 잘 봤다, 그런 모습도 있었냐' 물으면서 전단지를 달라고 하셨다. '순해 보이는데 결정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겠다, 마음속으로 응원하겠다'며 용기를 북돋는 말을 건네셨다. 나 자신을 깨고 시선을 돌리는 만큼 반응이 왔다. 귀를 닫고, 입을 막고, 얼굴을 가렸을 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이제껏 만들어 온 이미지가 깨질까봐 겁을 먹었을 땐 안 보였던 것들이 내 자신을 버리니까 느껴졌다. 내가 밀알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부서져서 척박한 땅에 들어가 있으면 거기에 비를 내려주는 것은 시민들이고 국민들이다. 내가 부서지더라도 비가 내려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걱정하지 않나.
"아내가 임신 4개월인데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서 걱정했다. 그런데 아내 스스로 나를 지지해줘야 본인도 마음을 더 편히 가질 수 있다며 나를 밀어줬다. 장인어른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셨다. 초기에는 마음에 갈등이 있었지만 마음의 결정을 하고 나니 편해졌다. 가족들이 지지해 주어 마음의 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이젠 다 내려놓아 잃을 게 없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 회사 측에서 압박은 없나.
"아나운서실 특성상 각자의 개성이 강하다. 아직까진 없었다. 프로그램에 잘릴 수도 있는데 걱정된다는 우려 섞인 말을 건넬 뿐 압박 등은 없다."

- 지금 진행하고 있는 <세상은 넓다> 시청자와 <여기는 라디오 정보센터> 청취자에게 한 마디 하자면.
"앞으로 나를 방송에서 보지 못하거나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파업에 왜 참가하게 되었는지 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시청자와 청취자들은 알아주리라 생각한다. 마음과 양심의 소리를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시리라 믿는다. 끝까지 열심히 싸우겠다. 지켜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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