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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해 꼴깍 넘어가면, 저녁 산책길 나선다

걷기예찬

등록|2010.07.20 11:52 수정|2010.07.20 11:52

이웃집 담장 위를 넘어 흐드러지게 핀...능소화 ⓒ 이명화


이곳에 이사를 온 지 달포가 거의 다 되었다. 언젠가부터일까. 막연하게나마 산이 가까이 있어 시나브로 산에 드나들 수 있는 도시나 근교에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한비야는 북한산 가까이 이사해 무시로 산을 찾는다 했고, 소설가 최인호는 청계산을 매일 오르내린다고 했다. 소설가 박완서는 아차산 지척에 산다. 막연히 내가 좋아하는 산자락 아래 깃들어 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오봉산은 아니었다.

막상 오봉산 자락 끝에 이사를 와서 살면서 매일 몇 번씩은 오봉산을 올려다보게 되었고 시나브로 올려다보는 오봉산이 제법 근사한 산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언젠가 오봉산 정상에 올랐다가 정상석을 둘러싼 나무들 때문에 조망이 가려 조금은 실망스러웠는데,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오봉산을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노라면 제법 산세가 있어 보인다.

무화과 열매...길을 지날 때마다 향기로운 무화과 향기...이 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들 맛이라도 보라는 듯 무화과 나무 위 길 옆에 잘 익은 무화과 열매 올려놓았다...나는 그냥 지나가고... ⓒ 이명화


아주까리...어릴 적에 우리 이웃집에서 보았던 아주까리 나무... 신기하다 여기서 다시 본다... ⓒ 이명화


뜨거운 햇살이 사위고 저녁이 오면 오봉산 산책로를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여름날엔 역시 저녁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이사 온 뒤 아직까지 오봉산 깊은 숲이나 등산길까지 등산은 하진 못했지만, 지척인 산책로를 따라 걸어보긴 했다. 자주 오봉산에 오르내리면서 오봉산과 친해질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살아서 참 많이 걸어서 다녔지만, 지금도 사색하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초중학교를 우리 마을에서 산 고개 넘어 면소재지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그 시절 떠올려보면 고갯길 함께 넘었던 아이들 모습 아련히 떠오른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마을로 접어드는 오솔길을 걸으며 발견한 낮은 들꽃들, 졸졸 흐르는 도랑물에 발을 씻기도 하고 물소리 들으며 걸었던 기억들이 선명하다. 천천히 걸으면서 눈 여겨 보고 귀로 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일 게다.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학교 오갔던 그 길, 그 길 걸으며 종아리가 굵었고 키가 자라고 마음이 자랐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언제나 느긋하게 길가에 핀 풀꽃들과 새소리 벌레소리...바람과 햇빛, 가까이 느끼고 보곤 했다.

걷기...저녁 산책하며 마주오는 사람들과 인사하는 마을 사람들... ⓒ 이명화


산을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나는 가끔 산으로 든다. 힘들게 땀 흘려 걷다보면 산길에서 발견하는 것들이 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낮은 곳에서 피고 지는 들꽃들에 마음이 끌린다. 뒤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며 걷는 길에서 마음이 상쾌하고 밝아진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내 뒤로 물러나고 앞에 다가오는 사물들...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의 신비를 걸으면서 경험한다.

언제나 산을 가까이 보고 느끼고 싶었던 나는 이곳으로 이사를 온 뒤로 가끔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한다. 한적한 동네 한 바퀴 돌기도 하고, 가까운 산책로를 따라 장맛비로 불어난 개울물 소리 들으며 호젓이 걷기도 한다.

마을을 품은 듯 오봉산 줄기가 길고 높게 펼쳐진 마을에는 고만고만한 주택들과 빌라 등이 이웃해 있고 대부분 가가호호마다 텃밭 한 두 개쯤은 끼고 있다. 옥수수, 콩, 아주까리, 자두나무, 무화과나무, 모과나무, 복숭아, 접시꽃, 도라지꽃, 고추, 상추... 걷는 길엔 눈길 끄는 것들이 지천이다. 조석으로 솔솔 부는 바람 상쾌하고, 새소리 여기저기 화답한다. 매일 보는 것들이지만 언제나 새로워 보이는 비밀은 무엇일까.

"걷기는 자연과 대지의 신비를 탐색하는 모노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는 수고와 기쁨이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수고이면서 동시에 기쁨이 되는 것이 걷기이다. 그는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바라봄은 피동적인 것이어서 풍경의 겉면만 보게 된다. 걷는 자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풍경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바라봄(?) 스스로 만들어낸다. 대상이 거기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씩 나아감으로써 풍경 속에 뛰어들어 풍경 전체를 살아있는 무대로 만든다."(서영은, <노란 화살표...>

걷기를 통해 심신의 건강을 얻었다는 사람들과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는 사람들...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소설가 김형경은 우울하다 싶을 때, 우울증이 찾아들면 걷기로 다스렸다고 '사람풍경'에서 말했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20분 정도 걷거나 달리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라앉고 40분 정도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 시간쯤 지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오른다'고 했다.

가지꽃...산과 집과 밭이 어우러진 곳... ⓒ 이명화


<느긋하게 걸어라>(조이스 럽)에서 예순 살 생일을 앞둔 노 수녀가 목사 친구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얻은 깨달음은 언제나 독립적으로 혼자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깨뜨린 것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어깨로 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조이스 럽은 걷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면의 고독은 내 안에 묵상의 공간을 터주었다. 내 몸의 리듬이 점차 내 영의 리듬과 균형을 이루었다. 쫓기거나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느긋하게 걷다보니 전에는 무턱대고 급히 지나쳐버렸던 삶이 제대로 보였다. 속도를 늦추는 것이야말로 이 묵상의 필수조건이었다."(p214)고 말하였다.

그녀는 또 "모든 의미 있는 여정은 어떤 식으로든 나를... 우리를 변화 시킨다'고 말했다. 서영은은 인생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걷기'에서 돌파구를 찾았다고 했다. "길을 떠날 때마다 늘 그랬었다. 내게는 길 떠남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애벌레가 자기 집이었던 고치를 벗어던지듯, 그렇게 이전 삶의 자리를 떠나,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구를 실현하고자 하는 적극적 꿈이었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p50)고 했다.

린다 호건은 또 이렇게 말했다. "걸으면서 나는 더 깊이 듣는다. 갑자기 내 모든 선조들이 내 뒤에 있다. 가만히 있어 보고 들으라고 그들은 말한다." 존오도너휴는 "저마다의 인생 여정은 그 핵심을 보면 순례다. 보이지 않는 성지를 지나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은 넓어지고 부요해진다."고 했다.

오늘도 저녁산책을 나선다. 길가에 빨갛게 익었던 산딸기도 없어지고 수령이 얼마나 되었을까. 머리 위에서 그늘을 드리우던 자귀나무 꽃도 다 떨어지고 장마 비로 불어난 개울물 소리 웅얼웅얼 흐르는 산책로엔 오랑캐꽃, 쑥부쟁이꽃 흐드러지게 피어 나비를 부른다. 장마도 지나고 오늘은 초복이다. 하루 온종일 여름햇살 뜨겁게 대지를 달구고, 하늘은 맑고 흰 구름 눈부셔서 가을하늘처럼 높더니 저녁이내 깔리는 저녁시간, 오봉산은 짙은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방금 발을 뗀 그곳은 뒤로 물러나고 내 몸은 점점 앞으로 나가가는 길, 걸은 만큼의 내 뒤엔 그만큼의 과거가 있다. 걸으면서 사유하는 것은 켜켜이 먼지 쌓인 피동적 사유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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