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피하지 마라, 당신은 '지금' 가장 빛난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함께 보낸 안면도 장삼포 해수욕장
▲ 노는 눈높이가 서로 다른 열 살 차이 형제를 억지로 붙여 놨더니 (나 보기에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 배지영
▲ 바다에서는 먼저 '대시'하고 무릎을 꿇어도 괜찮아. ⓒ 배지영
아기 돌보고, 밥벌이 하고… 잡념 없는 일상이다. 아이들을 키워주는 세월은 좋지만 거울 속의 나는 갈수록 낯설다. 그래서겠지, 오랜 벗들과 만나기로 하면서 딱 한 가지만 약속했다. 정직하게 나오는 사진은 안 된다고. 살찌거나 나이 들게 나오면 인정사정없이 삭제하자고. 미화하지 않는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고.
각자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안면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남편 대신 동생 부부와 완소제굴, 꽃얄리군과 함께 나섰다. 상상 이상으로 길치인 제부는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주어도 헤매는 사람. 통일되면 북한 거쳐서 러시아, 유럽까지도 가 버릴 사람. 운전하는 제부 뒷자리에 앉은 나는 사모님처럼 앉아 갈 수 없었다.
▲ 집 밖에 나오니까 이모 '껌딱지'가 된 꽃얄리군 ⓒ 배지영
나는 아이가 하나이던 시절에는 좀 약했다. 내 아이와 내 자매를 데리고 서울에 갔다 왔을 뿐인데 쌍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이제는 동생 부부에 아들 둘, 사람이 두 배 늘었으니 '떡실신' 감이지만 확 달라졌다. 박명수식 호통 놀이에 빠져서 지르고 본다. 희희낙락하면서도 할 말은 한다.
간월도에서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밥집에 들렀다. 우리끼리 서로 잘 보일 필요가 없어서인가, 힘차게 먹지 못했다. 남긴 음식이 많아서 민망했다. 풋고추 먹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돌 지난 꽃얄리군이 가장 선방했다고 해야 하나? 모두 칭찬 받을 식성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입이 짧은 내 자매에게 일침을 놓았다.
"멍충아! 최고로 맛있다고 뽑힌 식당이라고!"
"이상하잖아. 어떻게 경향신문하고 조선일보에 동시에 뽑히냐고? 그러니까 신빙성이 떨어지는 거지. 그러는 넌, 얼마나 잘 먹었어?"
▲ 바다를 보자 마자 바로 물에 뛰어든 '초딩' ⓒ 배지영
장삼포 해수욕장이 코 앞인 펜션, 짐을 부리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완소제굴은 곧장 바다로 뛰어들었다. 땅 짚고 헤엄치면서도 혼자 저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를 되풀이 하는 아이를 보며 뿌듯했다. 무탈하게 커준 게 고마웠다. 그런데 왜 집에서는 아이가 '초딩 포스'로 분위기를 압도하면 울화가 치미는지.
저녁에는 맛 조개를 잡으러 갔다. 펜션 사장님이 삽을 빌려주면서 "평생 할 삽질을 여기서 다 하는 사람도 있대요"라고 했다. 어쩐지 안 가고 싶어하는 제부 뒷모습이 씁쓸했다. 갈등했지만 좀 더 이기적이어야 했다. 완소제굴하고 꽃얄리군이 맛 조개 잡는 순간에 환호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물 빠진 바다를 한참 걸어 들어갔다. 어디가 명당인지는 알 수 없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시작했다. 맛 조개를 잡으려면, 떠먹는 아이스크림처럼, 땅을 들어 올리듯 납작하게 판다. 동그랗거나 세모난 숨구멍이 보인다. 그러면 삼각형 모양의 조금 큰 구멍에 빛의 속도로 맛소금을 뿌려야 한다. 쏙! 맛 조개가 올라온다.
▲ 맛 조개 잡는 사람들 ⓒ 배지영
▲ 삽질에 본능이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았는데... 1시간을 땅 파도 지치지가 않는 제부와 완소제굴 ⓒ 배지영
1시간 동안 맛 조개를 4개 잡았을 뿐인데 제부의 삽질에는 아직도 열정이 뿜어져 나왔다. 여자 친구의 허리를 감싸 안고 걷던 훈훈한 청년도, 땅 파고 생긴 구멍에 소금을 재깍재깍 넣지 못한다고, 여자 친구한테 "야, 빨리 소금 넣어!"라고 했다. 삽질에 본능이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았는데 좀 무서운 경험이었다.
다음 날 아침, 완소제굴은 밥 먹자마자 해수욕이었다. 형아를 따라나섰던 꽃얄리군은 펜션 마당의 모래에 푹 빠졌다. 신세 지는 걸 싫어해서 8개월부터 걸은 아기는 개미를 찾을 수 있는 능력자가 되고부터 살생도 한다. 바다 생명체들은 재빨라서 꽃얄리군 손에 걸려들지 않았다. '극락왕생 하소서' 같은 연등 달 고민이 필요 없어서 좋았다.
제부는 오전 내내 혼자 해수욕하는 완소제굴을 망 봤다. 그에게는 잡티 없는 하얀 피부가 젊어 보이는 비결이다. 전날에는 삽질해서 허리까지 아프다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바다에서 첨벙거리는 큰아들과 펜션 마당에서 뒹굴거리는 작은아들의 거리는 상당했다. 둘을 해변에 억지로 끌어 모아 놀게 했더니 (나 보기에)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 "형아야, 나는 이제 달릴 수도 있는데 바다에 오니까 왜 다시 기어다니지?" ⓒ 배지영
▲ "이모부, 돌 지나니까 참 좋네요. 요렇게 피서도 댕기고요." ⓒ 배지영
오후에는 광주에서 친구 윤화와 수정이가 제각각 식구들과 왔다. 돌 지난 아기 둘, 기저귀 찬 쌍둥이, 유치원생 한 명, 초등생 한 명이 모이자 아수라장이었다. 계단에 올라가서 떨어져, 고기 굽는 불에 '달겨들어', 틈틈이 저희들끼리 싸워, 자기 좀 쳐다보라고 울어… 친절로 자자하게 소문난 펜션 사장님이 바비큐를 도와줘도 속수무책이었다.
들에 매어진 소나 말도 먹고 싶은, 신비로운 식성을 가진 친구 수정이는 쌍둥이 아들을 낳더니 딴 판이 되었다. 그녀 남편 미식씨에 따르면, 상견례 자리에서도 긴장하지 않던 식욕, 투병 중에도 입맛은 건재해서 "아픈 사람 맞아요?" 라는 말을 듣던 강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쌍둥이 뒷감당에 입맛을 잃는 모습을 리얼다큐로 보여주었다.
"거 봐! 그러니까 엄마가 너랑 꽃얄리군이랑 열 살 터울로 낳은 거야" 하면서 완소제굴한테 으스대는 것도 잠깐, 나는 '쩔고' 말았다. 해외 출장 가서도 밤마다 호텔에서 아내에게 손 글씨로 편지를 쓰고, 밥도 맛있게 하고, 아이들 건사까지 잘 하는 윤화 남편 동우씨, 남편 세계의 블루칩. 그런데 그가 우리들 사진을 막 찍고 있었다. 세.상.에.나.
▲ 수정의 남편 미식씨와 쌍둥이 아들 찬영이와 준영 ⓒ 김동우
▲ 친구 남편이 찍어준 사진, 단점 많은 사람이라서 카메라 울렁증이...^^;; ⓒ 김동우
오랜만에 만난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주는 친구 남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단점 많은 사람, "하나 둘 셋!"하고 찍은 사진 속의 나를 마주보는 것도 어려워서 후다닥 지워버리기 일쑤다. 뜻밖의 상황에 맥주만 들이키는데 동우씨는 티 없이 웃으면서 "지영씨, 멋있다"라고 치켜세워주기까지.
카메라 울렁증은 바닷가의 전투적인 모기들 때문에 희박해졌다. 꽃얄리군이 물릴까 봐 밥 한 숟가락도 움직이면서 먹었다. 어릴 때는 언니 노는데 낄 수 없었던 내 자매 지현은 신나게 까불고 기분 좋게 취했다. 집 나설 때마다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처럼 노트북을 갖고 다니는 완소제굴은 맘껏 게임하는 자유를 누렸다.
▲ 신비한 식성을 가진 친구 수정과 내 자매 지현 ⓒ 김일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자정 넘어서 술잔 비워지는 속도도 더뎌졌다. 친구 남편들도, 지현 부부도 자러 갔다. 수정과 윤화, 그리고 나만 남았다. 우리는 봉숭아 꽃망울처럼 젖가슴이 돋아나던 때에 속옷 차림으로 밤새워 놀던 여자애들이 되었다가도, 아기들 우는 소리가 나면 잽싸게 방으로 달려가는 애 엄마로 돌아왔다.
말소리는 주위의 적막에 맞게 점차 낮아졌다. 줄곧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지난달부터 새로운 분야에서 사장님이 된 친구 윤화는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한 번 들어선 밥벌이 길에서 궤도 이탈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에게 질문을 갖게 했다. 몇 시간 동안 들리지 않던 파도소리가 볼륨을 최대한 높이고서 파고들었다.
동이 터왔다. 일기 예보를 거스르며 이틀 내내 참아주었던 비도 흩뿌리면서 내렸다. 졸리면서도 마음이 순해지고 모든 것이 좋은데 딱 한 가지가 걸렸다.
"그런데 윤화야, 동우씨는 사진 찍은 거 어떻게 해?"
"왜야? 괜찮해. 네 메일로도 보내 줄 것이다이."
내 친구 남편은 '마당 쓸기 3년, 물 긷기 3년' 같은 수련을 마치고, 이미 강호의 세계에 발 딛은 사람일 수도 있다. 친구, 또 친구의 친구 블로그에 모자이크 처리하고 싶은 내 사진이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외면하면서 버틸 것인가. 사진 속 자신을 마주보라.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다.
▲ 직장 생활을 접고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사장님이 된 내 친구 윤화네 식구들. ⓒ 배지영
▲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 ⓒ 배지영
덧붙이는 글
7월 9일~11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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