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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여전히 연극은 연극이다!

[현장 스케치] 열돌맞은 2010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등록|2010.07.31 17:35 수정|2010.07.31 17:35

▲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가 열리는 밀양연극촌 입구 ⓒ 박솔희


한 달 전 밀양이라는 동네에 처음으로 들렀을 때 밀양연극제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밀양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는 찐한 경상도 사투리로 "밀양에 뭐 구경할 건 많이 없고…, 7월 말 되면 연극제 하는 데 그때 함 오이소. 그건 좀 볼만 합니데이"고 했다.

자기가 사는 동네가 별스럽잖게 느껴지는 건 자연스런 일이기에 그의 말과는 달리 밀양에는 상당히 구경할 거리가 많았다는 얘기는 차치하고, 어쨌든 당시에는 그런가 하고 말았던 연극제 얘기가 막상 칠 월 말이 다가오자 문득문득 떠오르다가 지난 학기에 대학로에서 봤던 연희단거리패의 <햄릿>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당장에 기차표를 끊었다.

밀양 가산면 부북리 밀양연극촌, 연극인들의 무대이자 삶터

▲ 셔틀버스에서 내려 연극촌 입구로 가는 길. 양편으로 연밭이 펼쳐져 있는데 마침 연꽃이 개화하는 시기라 충실한 눈요기가 되었다. ⓒ 박솔희


▲ 밀양연극촌 주변의 연꽃단지. 가득 핀 연밭 사이로 산책하는 맛이 그만이다. ⓒ 박솔희


7월 22일에서 8월 1일까지 가산면 부북리 밀양연극촌에서 열리는 2010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약칭 밀양연극제. 축제 기간 밀양역에서 밀양연극촌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20분 정도 걸리는데 시내에서 꽤 떨어진 '촌'인지라 시내버스로 들어가기는 힘들다. 역에서 택시를 타면 만 원은 족히 나온다고.

오후 8시 공연을 보기 위해 7시에 출발하는 차를 타고 들어갔다. 오후 10시 공연을 예매해 두긴 했는데 막상 멀리 밀양까지 와서 공연을 딱 한 편만 보고 가기에는 아쉬웠던 거다. 당일 공연은 예매가 안 된다고 해서 표가 남아있기만을 바라며 조바심을 냈다. 다행히 여유 좌석이 조금 있었고 '젊은 연출가전'의 <달려라 그루쉐> 표를 샀다.

▲ 이윤택 감독의 사택인 '월산제' ⓒ 박솔희


▲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의 숙소인 '화이트하우스' ⓒ 박솔희


▲ 밀양연극촌 전경. 왼편에 '밀양연극촌'이라는 글자가 박힌 건물은 '우리동네 극장'이다. ⓒ 박솔희


밀양연극촌은 단순히 축제를 위한 행사장이 아니다. 연희단거리패의 이윤택 감독을 비롯해 단원들의 숙소가 있으며 평소에 연습도 하고 주말이면 공연도 하는 공간이다. 사람에게도 연극에도 소중한 삶터인 셈. 폐교를 개조해 만든 연극촌에는 크고 작은 다섯 개의 극장과 연극자료관, 브레히트 연구소 등이 있다.

단원들은 월산제 뒤편의 '화이트 하우스'에 산다. 연희단거리패 단원들 중에서 부부가 탄생하면 따로 방을 내어주기도 한단다. 마침 이번 연극제 기간 중에 연희단거리패의 세 번째 부부가 탄생하기도 했다. <한여름밤의 꿈>에 출연하는 변진호(방준호, 오베론 역)와 홍선주(예빈 역)가 그들. 친인척 외에 일반관객들도 하객으로 참여해 이윤택 감독의 주례로 24일 전통혼례를 올렸단다. 그걸 놓쳐 아쉽다.

▲ 연극자료관 안에서 만난 이윤택 감독과 유인촌 장관 ⓒ 박솔희


화이트 하우스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연극자료관 앞에 기자들이 몰려 있다. 가 보니 이윤택 감독과 유인촌 장관이 자료관을 둘러보며 환담을 나누고 있다. 얼핏 들어보니 유 장관이 나중에 연극계로 복귀해서 이 감독의 연극에 출연하느니 뭐니 한다. 실제로 성사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렇다면 그것도 참 재미있을 터다.

수준급의 공연에 관객 매료... 연일 성황 이룬 밀양연극제

▲ 브레히트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극단 봉의 <달려라 그루쉐> ⓒ 박솔희


'숲의 극장'에서 오후 8시에 <달려라 그루쉐> 공연이 있다. 연극촌 내 다섯 개의 극장 중 '숲의 극장'과 이번 축제에 맞춰 새로 개관한 '성벽극장'은 야외 공연장이다. 야외 공연장의 특성상 다소 어수선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탁 트인 시골 공기를 마시며 공연을 즐기는 운치가 있어 좋다.

'젊은 연출가전'이래서 그 수준을 기대하기보다는 젊은 극단을 응원하고픈 마음이 강했는데 배우들의 연기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브레히트를 재해석한 작품이랬는데 흐름이 다소 정제되지 않았다는 느낌은 있었으나 배우들의 열정과 뛰어난 표현력을 보는 재미에 이내 푹 빠졌다.

▲ 새로 개관한 성벽극장 입구. 실제 성벽의 모양처럼 단단한 돌로 무대를 짓는 데 21억 원이 들었다고. ⓒ 박솔희


▲ 뮤지컬 <한겨울밤을 견디기 위한 한여름밤의 꿈> ⓒ 박솔희


이번 연극제와 함께 첫선을 보인 성벽극장은 말 그대로 성벽처럼 생겼다. 가설 세트가 아니라 진짜 돌(직접 두드려보았으니 믿어도 된다)로 지어졌는데 무려 21억 원이나 들었다고. 앞으로 밀양연극촌의 상징물이 될 것이다.

뮤지컬 <한여름밤의 꿈>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한겨울밤을 견디기 위한'이라는 부제가 서정적이다. 구현정과 방준호라는 인물들의 결혼을 계기로 한 극중극 형태를 띠는데 '난장 뮤지컬'이라는 설명처럼 한바탕 시끌벅적 논다는 느낌이다. 야외에서 공연하는 것부터가, 어쩌면 우리네 고유의 마당극과 같은 느낌도 주고. 참 연희단거리패 다운 일이다. 보조석까지 죄 끌어내 1500석에 달하는 성벽극장에 빈 자리는 없었다.

연극의 아날로그적 순수성 지켜가는 밀양연극제

▲ 연극촌 곳곳의 가로등마다 새겨져 있던 익살스러운 표정의 탈 ⓒ 박솔희

'21세기에도 여전히 연극은 연극이다'라는 이번 축제 슬로건은 연극의 아날로그적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밀양연극촌과 연희단거리패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준다.

충분히 더 편리하고 안락하게 만들 수 있었겠지만 객석은 딱딱한 나무의자였고 천장 없는 야외공연장 탓에 소나기가 내린 날은 관객들이 무대로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단다. 그 와중에도 배우들은 꿋꿋한 열연으로 박수를 받았고.

또한 밀양연극제는 지역민과 함께하는 축제라는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공연표 정가는 1만 원~3만 원 수준이지만 밀양시민만 구입할 수 있는 시민사랑권을 이용하면 5천 원에 공연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문화시설은 서울에 집중돼 있고, 사정이 그렇다보니 지방에서는 연극 한 편 볼래도 먼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경남지역의 명소가 된 밀양연극촌, 그리고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덕분에 지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혜택이 나누어지는 모양새가 보기 좋았다.

온가족이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서울에서의 공연장이란 영화관이 질린 커플들의 이색 데이트 코스 정도로 인식되기 마련.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연극을 보고 싶어도 '뻘쭘'함을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밀양연극제에는 혼자 공연을 보러 온 사람도 적잖이 보였고 커플보다는 가족 단위가 많았다. 연극이 어려워 몸을 배배 꼬다가도 어느 순간 넋 놓고 무대에 집중하는 어린아이들부터 "뭔진 잘 몰라도 거 재밌더라야" 하시는 어르신들까지. 이번 축제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아동극 <푸른하늘 은하수>도 선보이고 있다.

지역마다 우후죽순 생긴 컨셉이 뭔지도 모르겠는 지저분한 축제, 상업적 이득과 관광수입 증대에만 혈안이 된 축제들과 비교하면 지역민, 온가족과 함께 하는 이런 축제야말로 진짜배기라는 생각이 든다. 연극계가 어렵다는 게 하루이틀 얘기는 아니만 글쎄, 이런 순수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희망은 충분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희단거리패의 대표작이 된 <햄릿>의 명대사로 글을 맺고 싶다.

"연극 만세!"
덧붙이는 글 연희단거리패 http://www.stt1986.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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