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의 소원, 2010년을 예견하고 한 말?
[청년 백범의 도피 여정 자전거 순례 ⑥] 보성에서 공주 마곡사까지
보성을 떠난 청년 백범은 화순, 동복, 담양, 순창을 지나 하동의 쌍계사로 갔다. 쌍계사에서 산 위쪽으로 한 10km 들어가면 칠불사가 나온다. 칠불사에서 아자방(亞字房)을 구경하고 다시 충청도로 들어와 계룡산 갑사에 도착하였다. 사찰 부근에 감나무가 숲을 이루어 붉은 감이 익어서 저절로 떨어지곤 하였다는 것을 보니 그 시기는 음력 8, 9월, 즉 10월 경이었다.
절에서 점심을 사 먹고 앉아 있을 때, 동학사로부터 산을 넘어와 점심을 먹는 한 사람이 있어 인사를 나누니 공주 사는 이서방이라 했다. 초면일지라도 이야기가 잘 통했다. 이서방은 청년 백범에게 근처 40여리 밖에 있는 마곡사를 같이 구경하고 가자고 청하였다.
마곡사란 말에 청년 백범은 자신의 집에서 읽은 <동국명현록>에 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동지하례에 참례하여 크게 웃으니, 임금이 물었다. '경은 무슨 일로 무리 가운데서 혼자 웃느냐?' 화담이 아뢰었다. '오늘 밤 마곡사 상좌승이 밤중에 죽을 끓이려고 불을 때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죽솥에 빠져 죽었는데 다른 중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죽을 퍼먹으며 희희낙락하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습니다.' 임금이 곧 파발마를 놓아 하루 밤낮 쉬지 않고 300여 리를 달려 마곡사로 가서 조사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
그의 청을 승낙하고 같이 마곡사를 향해 출발했다. 마곡사로 가서 중이나 되어 일생을 편안하게 지내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는 이서방은 백범에게도 그리 하기를 권하였다.
한참 고심을 한 백범은 마침내 중이 되기로 결정한다. 냇가로 나가 삭발할 때 떨어진 상투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법명은 원종이었다. 그러나 속세를 떠났음에도 백범은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였다. 금강산으로 가서 경전의 뜻을 연구하고, 일생 충실한 불자가 되겠다는 구실로 마곡사를 떠난다.
기계 믿다가 된통 당하다
'백범 김구 은거의 집' 주인이 차려준 아침을 함께 먹고 배웅을 받으며 보성을 떠났다. 보성 읍내로 되돌아가다 새로 생긴 광주로 가는 국도를 타고 화순까지 갔다. 화순에서 22번을 타고 동복으로 향하였다.
지도를 보니 거리도 비슷한 것이 4차선 국도를 피해 한적한 길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국도를 빠져 지방도로 들어섰다. 처음엔 포장되었으나 공사 중으로 중도에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한참을 가니 산중에 호수가 나왔다. 서성제이다. 울창한 숲 속 호숫가를 둘러싸고 음식점 등 여러 집들이 있다. 피서 장소로 아주 좋은 듯했다.
갑자기 가는 곳과 다른 이정표가 나타나고 위성항법장치는 오른쪽으로 빠지라는 신호를 준다. 곰곰히 살펴보니 기계가 가리키는 방향이 지름길인 것 같아 길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바로 후회가 앞섰다. 길은 산으로 들어서고 좁은 길로 변하며 여러 번의 고개를 마주한다. 이미 깨달았을 때는 벌써 한참이나 와 있어 돌아가기도 그렇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결국 국도와 만났다. 기계 믿다가 된통 당한 것이다.
동복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지났고 더운 날씨와 고개를 여러 개 넘어 오느라 기운이 쭉 빠진다. 동복에서 쉬며 기운을 차린 후 15번 국도를 타고 담양으로 갔다. 오늘의 일정은 순창까지였으나 결국 담양에서 끝내야 했다.
가장 아름다운 길 : 섬진강 따라 담양에서 하동까지
다음 날 담양을 떠나 순창으로 향하니 바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이 나온다. 새로 국도가 생겨 이 길은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순수한 사람만을 위한 길이 되었다. 한 대의 차도 없는 넓은 길에 양쪽은 키가 쭉쭉 뻗은 나무로 가득 찼다.
이 길은 1970년대 초반 3~4년짜리 묘목을 심은 것이 지금은 하늘을 덮고 있는 울창한 가로수로 자라났다. 2002년 산림청과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본부가 '가장 아름다운 거리 숲'으로 선정한 곳이기도 하다.
국도변 양쪽에 자리 잡은 10~20m에 이르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저마다 짙푸른 가지를 뻗치고 있다. 초록빛 동굴과도 같은 이 길은 무려 8.5km에 이르러 거의 순창까지 이어졌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향기는 꼭 삼림욕장에 온 것 같다. 자동차가 없는 이 길 한 가운데로 들어서니 마치 내가 주인인 듯 했다.
이러한 길을 오래 전 고속도로를 개발하면서 없애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실소를 머금게 한다. 오로지 개발논리만 앞세운 무지한 정부의 정책에 많은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여 이 길이 보존될 수 있었으니 지역 주민에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너무도 영어를 사랑하는 철도공사
순창에서 730번 지방도를 타고 가니 섬진강이 나온다. 섬진강을 따라 곡성 입구에 들어서면서 잠시 4차선 국도를 타고 곡성을 우회하면 섬진강을 옆에 두고 섬진강 기차마을로 이어진다. 기차마을은 철도 폐선을 관광으로 재활용하여 매우 성공한 사업으로 보인다.
섬진강을 배경으로 침곡역에서 가정역까지 5.1km 구간을 페달을 밟아 이동하는 기차를 '레일바이크'라고 하였다. 너무도 영어를 사랑하는 철도공사이다. '철도자전거'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꼭 외국어를, 그것도 공기업에서 사용하는 것이 정말로 바람직한 일일까? 세종대왕이 만든 가장 과학적인 글인 한글이 우리나라 정부에 의해서 망가지는 경우를 전국 곳곳에서 너무도 많이 보았다. 문화대국을 지향한 백범 김구 선생이 이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곡성에서 섬진강을 옆에 두고 하동 화개까지 왼쪽의 지리산과 오른쪽의 섬진강을 음미하며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자전거를 탔다. 담양에서 이곳 하동까지 섬진강을 끼고 이어지는 이 길은 자전거 여행하기에는 매우 좋은 아름다운 길이다.
640m 칠불사에 자전거로 오르다
화개장터로 유명한 화개에서 지리산으로 올라가 쌍계사에 도착하였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에 절을 지어 옥천사라 이름하고 이후 문성왕 2년에 '쌍계사'라는 사명을 받았다. 국보 1점, 보물 6점의 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천왕상, 정상탑, 사천왕수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등 부속암자가 있는 이 절은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칠불아자방을 찾으려 했으나 없어 물어보니 칠불사에 가면 있다고 한다. 칠불사는 이곳에서 산길로 10km나 더 올라가야 한다.
한숨을 푹 내쉬며 '아자방을 보러 왔으니 할 수 없지' 하며 자전거를 다시 산 속으로 돌렸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절은 보이지 않았다. 경사는 왜 이리 급한지. 10km를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려 올라가 보니 절이 보였다. 관광버스로 온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로 올라가는 나를 보며 환호성을 친다.
나중 고도를 알아보니 640m였다. 아마도 이곳까지 자전거로 쉬지 않고 올라온 사람은 나뿐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자방(亞字房)은 아(亞)자 모양으로 내부가 설계된 방을 말한다. 칠불사 아자방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1세기경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삼촌인 범승 장유보옥 선사를 따라 이곳에 와서 수도한 지 2년만에 모두 성불하였으므로 칠불사라 이름하였다. 그후 신라 효공왕(897~911) 때 담공선사가 길이 약 8m의 이중 온돌방을 축조하였는데, 그 방 모양이 아(亞)자와 같아 아자방이라 하였다. 1951년 소실되어 초가로 복원하였다가 현재와 같이 신축하였다."
칠불사에 있는데 지리산 피아골에 살고 있는 분이 트럭을 몰고 왔다. 마침 휴가철에 주말이라 숙소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를 알고 찾아 온 것이다. 일면식도 없지만 뜻이 같다는 이유로 호의를 베푸니 너무도 고마웠다.
지리산 중턱에 자리 잡은 그의 집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니 그동안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 삼겹살에 직접 담근 술을 대접해 줘 잘 먹고 오랜만에 한 숨 푹 잤다. 다음 날 손수 지어 준 아침을 먹게 해주더니 쌍계사가 있는 화개에까지 다시 데려다 주었다.
섬진강과 지리산이 뿜어내는 아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구례를 지나 남원을 우회하여 진안으로 갔다.
다음 날 진안에서 용담호를 굽이굽이 돌아 다시 금산을 거쳐 집이 있는 대전으로 갔다. 오늘의 목적지인 대전시청을 바로 눈앞에 두고 또 다시 펑크가 났다. 새는 정도로 보아서는 구멍이 매우 가늘어 보였다. 새로 튜브를 바꾸어 시간을 지체 하느니 공기가 많이 빠진 듯 하면 다시 펌프질을 해대며 겨우 대전시청에 도착하였다.
오늘의 백범을 있게 한 모친 곽낙원 여사
마지막 날 두 사람이 자전거 주행에 합류하였다. 시청을 지나 대전 현충원에 이르렀다. 현충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이신 곽낙원 여사와 큰 아들 김인이 애국지사 제2묘역 771번과 772번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많은 위인들의 뒤에는 거의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듯 백범이 위대하게 된 것도 역시 그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크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청년 백범이 인천 감리서로 이송되자 백범의 어머니는 자식 옥바라지를 위해 먼 길을 따라 왔다. 당시는 죄수에게 음식을 일정하게 주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자식에게 밥 세 끼를 들여 주기 위해서 인천에서 유명한 물상객주의 집에서 밥 짓는 사람이 되었다.
이뿐이 아니다. 임시정부 시절에도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온갖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며 자식을 채찍질하였다. 그 분의 정성이 없었던들 지금의 백범이 있었겠는가?
백범 발자취의 여정은 모두 1400km였다
후원해 준 많은 분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곽낙원 여사와 김인 선생에게 참배를 올리고 함께 마곡사로 향하였다. 마곡사에 도착하니 인천서 출발하여 14일간 다닌 거리가 모두 1400km였다. 그동안 도로의 선형화 작업을 통해 추측한 거리보다 많이 짧아졌다.
마곡사에서 관계자가 나와 설명을 해 준다. 그동안 마곡사도 많이 변하여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 받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해방 후 마곡사에 들려 백범이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었고 은거하였던 곳도 새로 복원하였다. 그뿐 아니라 '백범 명상길'도 만들어 삭발하였던 바위까지 길을 내 백범 선생의 체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백범은 "고금도의 충무공 전적지, 금산의 칠백의총, 공주의 승장 영규의 비 등을 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그 뒤 50여 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는 백범의 민족자주노선은 이때의 느낌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 삼남지방을 돌아본 뒤 김창수(백범의 본명)는 세상을 등지고 한동안 산사의 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오늘의 지표가 되는 백범의 소원
마지막으로 백범이 평소 소원했던 것을 몇 구절 소개하며 마치기로 한다. 경쟁적인 대북 관계, 권위적인 정부, 아프카니스탄 파병, 군사작전권 이양, 4대강 사업, FTA와 같은 현안에 백범의 소원은 우리에게 이미 답을 주고 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이다. 수백 년 동안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않은 일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개인생활에도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이다. 국론을 움직이려면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든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절에서 점심을 사 먹고 앉아 있을 때, 동학사로부터 산을 넘어와 점심을 먹는 한 사람이 있어 인사를 나누니 공주 사는 이서방이라 했다. 초면일지라도 이야기가 잘 통했다. 이서방은 청년 백범에게 근처 40여리 밖에 있는 마곡사를 같이 구경하고 가자고 청하였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동지하례에 참례하여 크게 웃으니, 임금이 물었다. '경은 무슨 일로 무리 가운데서 혼자 웃느냐?' 화담이 아뢰었다. '오늘 밤 마곡사 상좌승이 밤중에 죽을 끓이려고 불을 때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죽솥에 빠져 죽었는데 다른 중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죽을 퍼먹으며 희희낙락하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습니다.' 임금이 곧 파발마를 놓아 하루 밤낮 쉬지 않고 300여 리를 달려 마곡사로 가서 조사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
그의 청을 승낙하고 같이 마곡사를 향해 출발했다. 마곡사로 가서 중이나 되어 일생을 편안하게 지내려는 의향을 가지고 있는 이서방은 백범에게도 그리 하기를 권하였다.
한참 고심을 한 백범은 마침내 중이 되기로 결정한다. 냇가로 나가 삭발할 때 떨어진 상투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법명은 원종이었다. 그러나 속세를 떠났음에도 백범은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였다. 금강산으로 가서 경전의 뜻을 연구하고, 일생 충실한 불자가 되겠다는 구실로 마곡사를 떠난다.
기계 믿다가 된통 당하다
'백범 김구 은거의 집' 주인이 차려준 아침을 함께 먹고 배웅을 받으며 보성을 떠났다. 보성 읍내로 되돌아가다 새로 생긴 광주로 가는 국도를 타고 화순까지 갔다. 화순에서 22번을 타고 동복으로 향하였다.
지도를 보니 거리도 비슷한 것이 4차선 국도를 피해 한적한 길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국도를 빠져 지방도로 들어섰다. 처음엔 포장되었으나 공사 중으로 중도에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한참을 가니 산중에 호수가 나왔다. 서성제이다. 울창한 숲 속 호숫가를 둘러싸고 음식점 등 여러 집들이 있다. 피서 장소로 아주 좋은 듯했다.
갑자기 가는 곳과 다른 이정표가 나타나고 위성항법장치는 오른쪽으로 빠지라는 신호를 준다. 곰곰히 살펴보니 기계가 가리키는 방향이 지름길인 것 같아 길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바로 후회가 앞섰다. 길은 산으로 들어서고 좁은 길로 변하며 여러 번의 고개를 마주한다. 이미 깨달았을 때는 벌써 한참이나 와 있어 돌아가기도 그렇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결국 국도와 만났다. 기계 믿다가 된통 당한 것이다.
▲ 기계가 알려준 지름길. 여러 고개를 지나야 했다. ⓒ 이규봉
동복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지났고 더운 날씨와 고개를 여러 개 넘어 오느라 기운이 쭉 빠진다. 동복에서 쉬며 기운을 차린 후 15번 국도를 타고 담양으로 갔다. 오늘의 일정은 순창까지였으나 결국 담양에서 끝내야 했다.
가장 아름다운 길 : 섬진강 따라 담양에서 하동까지
다음 날 담양을 떠나 순창으로 향하니 바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이 나온다. 새로 국도가 생겨 이 길은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순수한 사람만을 위한 길이 되었다. 한 대의 차도 없는 넓은 길에 양쪽은 키가 쭉쭉 뻗은 나무로 가득 찼다.
이 길은 1970년대 초반 3~4년짜리 묘목을 심은 것이 지금은 하늘을 덮고 있는 울창한 가로수로 자라났다. 2002년 산림청과 생명의 숲 가꾸기 국민운동본부가 '가장 아름다운 거리 숲'으로 선정한 곳이기도 하다.
국도변 양쪽에 자리 잡은 10~20m에 이르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저마다 짙푸른 가지를 뻗치고 있다. 초록빛 동굴과도 같은 이 길은 무려 8.5km에 이르러 거의 순창까지 이어졌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향기는 꼭 삼림욕장에 온 것 같다. 자동차가 없는 이 길 한 가운데로 들어서니 마치 내가 주인인 듯 했다.
이러한 길을 오래 전 고속도로를 개발하면서 없애려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실소를 머금게 한다. 오로지 개발논리만 앞세운 무지한 정부의 정책에 많은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여 이 길이 보존될 수 있었으니 지역 주민에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 사람이 주인이 되는 담양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 ⓒ 이규봉
너무도 영어를 사랑하는 철도공사
순창에서 730번 지방도를 타고 가니 섬진강이 나온다. 섬진강을 따라 곡성 입구에 들어서면서 잠시 4차선 국도를 타고 곡성을 우회하면 섬진강을 옆에 두고 섬진강 기차마을로 이어진다. 기차마을은 철도 폐선을 관광으로 재활용하여 매우 성공한 사업으로 보인다.
섬진강을 배경으로 침곡역에서 가정역까지 5.1km 구간을 페달을 밟아 이동하는 기차를 '레일바이크'라고 하였다. 너무도 영어를 사랑하는 철도공사이다. '철도자전거'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꼭 외국어를, 그것도 공기업에서 사용하는 것이 정말로 바람직한 일일까? 세종대왕이 만든 가장 과학적인 글인 한글이 우리나라 정부에 의해서 망가지는 경우를 전국 곳곳에서 너무도 많이 보았다. 문화대국을 지향한 백범 김구 선생이 이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곡성에서 섬진강을 옆에 두고 하동 화개까지 왼쪽의 지리산과 오른쪽의 섬진강을 음미하며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자전거를 탔다. 담양에서 이곳 하동까지 섬진강을 끼고 이어지는 이 길은 자전거 여행하기에는 매우 좋은 아름다운 길이다.
640m 칠불사에 자전거로 오르다
화개장터로 유명한 화개에서 지리산으로 올라가 쌍계사에 도착하였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년에 절을 지어 옥천사라 이름하고 이후 문성왕 2년에 '쌍계사'라는 사명을 받았다. 국보 1점, 보물 6점의 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천왕상, 정상탑, 사천왕수 등 수많은 문화유산과 칠불암, 국사암, 불일암 등 부속암자가 있는 이 절은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칠불아자방을 찾으려 했으나 없어 물어보니 칠불사에 가면 있다고 한다. 칠불사는 이곳에서 산길로 10km나 더 올라가야 한다.
한숨을 푹 내쉬며 '아자방을 보러 왔으니 할 수 없지' 하며 자전거를 다시 산 속으로 돌렸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절은 보이지 않았다. 경사는 왜 이리 급한지. 10km를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려 올라가 보니 절이 보였다. 관광버스로 온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로 올라가는 나를 보며 환호성을 친다.
나중 고도를 알아보니 640m였다. 아마도 이곳까지 자전거로 쉬지 않고 올라온 사람은 나뿐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 아(亞)자 모양의 방이 있는 칠불사 아자방 ⓒ 이규봉
아자방(亞字房)은 아(亞)자 모양으로 내부가 설계된 방을 말한다. 칠불사 아자방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1세기경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삼촌인 범승 장유보옥 선사를 따라 이곳에 와서 수도한 지 2년만에 모두 성불하였으므로 칠불사라 이름하였다. 그후 신라 효공왕(897~911) 때 담공선사가 길이 약 8m의 이중 온돌방을 축조하였는데, 그 방 모양이 아(亞)자와 같아 아자방이라 하였다. 1951년 소실되어 초가로 복원하였다가 현재와 같이 신축하였다."
칠불사에 있는데 지리산 피아골에 살고 있는 분이 트럭을 몰고 왔다. 마침 휴가철에 주말이라 숙소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를 알고 찾아 온 것이다. 일면식도 없지만 뜻이 같다는 이유로 호의를 베푸니 너무도 고마웠다.
지리산 중턱에 자리 잡은 그의 집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니 그동안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모두 풀리는 것 같았다. 삼겹살에 직접 담근 술을 대접해 줘 잘 먹고 오랜만에 한 숨 푹 잤다. 다음 날 손수 지어 준 아침을 먹게 해주더니 쌍계사가 있는 화개에까지 다시 데려다 주었다.
섬진강과 지리산이 뿜어내는 아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구례를 지나 남원을 우회하여 진안으로 갔다.
다음 날 진안에서 용담호를 굽이굽이 돌아 다시 금산을 거쳐 집이 있는 대전으로 갔다. 오늘의 목적지인 대전시청을 바로 눈앞에 두고 또 다시 펑크가 났다. 새는 정도로 보아서는 구멍이 매우 가늘어 보였다. 새로 튜브를 바꾸어 시간을 지체 하느니 공기가 많이 빠진 듯 하면 다시 펌프질을 해대며 겨우 대전시청에 도착하였다.
오늘의 백범을 있게 한 모친 곽낙원 여사
마지막 날 두 사람이 자전거 주행에 합류하였다. 시청을 지나 대전 현충원에 이르렀다. 현충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이신 곽낙원 여사와 큰 아들 김인이 애국지사 제2묘역 771번과 772번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많은 위인들의 뒤에는 거의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듯 백범이 위대하게 된 것도 역시 그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크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청년 백범이 인천 감리서로 이송되자 백범의 어머니는 자식 옥바라지를 위해 먼 길을 따라 왔다. 당시는 죄수에게 음식을 일정하게 주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자식에게 밥 세 끼를 들여 주기 위해서 인천에서 유명한 물상객주의 집에서 밥 짓는 사람이 되었다.
이뿐이 아니다. 임시정부 시절에도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온갖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며 자식을 채찍질하였다. 그 분의 정성이 없었던들 지금의 백범이 있었겠는가?
백범 발자취의 여정은 모두 1400km였다
후원해 준 많은 분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곽낙원 여사와 김인 선생에게 참배를 올리고 함께 마곡사로 향하였다. 마곡사에 도착하니 인천서 출발하여 14일간 다닌 거리가 모두 1400km였다. 그동안 도로의 선형화 작업을 통해 추측한 거리보다 많이 짧아졌다.
마곡사에서 관계자가 나와 설명을 해 준다. 그동안 마곡사도 많이 변하여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 받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해방 후 마곡사에 들려 백범이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었고 은거하였던 곳도 새로 복원하였다. 그뿐 아니라 '백범 명상길'도 만들어 삭발하였던 바위까지 길을 내 백범 선생의 체취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 백범 명상길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삭발터’ ⓒ 이규봉
백범은 "고금도의 충무공 전적지, 금산의 칠백의총, 공주의 승장 영규의 비 등을 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그 뒤 50여 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는 백범의 민족자주노선은 이때의 느낌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 삼남지방을 돌아본 뒤 김창수(백범의 본명)는 세상을 등지고 한동안 산사의 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오늘의 지표가 되는 백범의 소원
마지막으로 백범이 평소 소원했던 것을 몇 구절 소개하며 마치기로 한다. 경쟁적인 대북 관계, 권위적인 정부, 아프카니스탄 파병, 군사작전권 이양, 4대강 사업, FTA와 같은 현안에 백범의 소원은 우리에게 이미 답을 주고 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모든 계급 독재 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이다. 수백 년 동안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않은 일이다.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개인생활에도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이다. 국론을 움직이려면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든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기사를 마치며 백범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에서 인용하였고, '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 '민족문제연구소', '청년백범'의 후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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